스노볼 2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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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치고 싶은 상상력, 최상의 몰입감

한국형 영어덜트의 진화를 알리는 SF 블록버스터

위의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은 소설 『스노볼』을 읽었습니다.

지난 번 책을 받았을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카카오페이지에서 이 소설을 먼저 접했어요. 카카페에서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다니, 하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발한 상상력과 휘몰아치는 속도감에 연신 다음 편 결재를 하며 봤었거든요. 완결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아 아쉬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소설Y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어 신기했습니다. 현재 카카페에서도 지난 연재에 이어 추가로 연재되고 있는데요. 전 소설Y대본집으로 완결까지 쭈욱 달릴 수 있었어요.

『스노볼』은 평균 기온이 영하 41도로 내려간 혹한기를 배경으로 돔으로 둘러쳐진 따뜻한 지역 ‘스노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스노볼'은 이본 미디어 그룹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스노볼의 '재건 가문'인 이본가 사람들에게는 '전력을 생산하거나 사생활을 공유하'는 의무가 주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늘 '이본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으며 특권을 누리지 않'음을 강조하지요.

스노볼 안에는 액터와 디렉터가 존재하고, 카메라의 필름을 교체하기 위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카메라가 돌아가요. 스노볼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으로, 스노볼에서 살기 위해선 리얼리티 드라마를 연기하는 액터가 되거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디렉터여야만 해요. 스노볼 밖에 사는 이들은 극한의 추위를 견디며 스스로 쳇바퀴를 돌려 전기를 생산합니다. 이 전기로 스노볼의 드라마를 수신하는 시청료를 지불하지요. 문밖으로 나서기만 해도 콧속이 얼어붙는 스노볼 밖의 세상에서 주인공 '전초밤'은 디렉터를 꿈꾸지만 번번이 탈락하고 말아요.

1권에서는 주인공인 '전초밤'이 스노볼에 입성하여 최연소 기상캐스터인 '고해리'의 대역으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려냅니다. 스노볼의 디렉터 가문의 주요 일원인 차설은 베일에 싸인 이본가의 사생활을 대중 앞에 보여주고 싶어하지요. 고해리가 된 전초밤을 통해서요.

우연히 스노볼의 비밀을 알게된 전초밤은 이본 그룹의 후계자 이본회와 마주치기도 하고, 이제 겨우 고해리로서의 적응이 되어가던 찰나에 또다른 고해리인 '배새린'에게 뒤통수를 맞아 퇴직자 마을에 버려지기도 합니다. 디렉터 가문 출신으로 전설의 디렉터인 할아버지 차귀방, 언니인 차설의 잘못을 외면하며, 스노볼을 떠나온 차향은 전초밤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게 되지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스노볼로 향하는 길에 전초밤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아이들과 합류하여 생방송 무대로 무단 침입을 강행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이본회에게 승부수를 띄워요. 1권의 마지막인 '각성과 인식'에서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대미를 장식하지요. 전 2권의 끝자락에 가서야 이 의미를 알아챘습니다.

1권이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면, 2권의 전초밤은 이제 스노볼의 비밀을 폭로하여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집니다.

스노볼에 임시 체류하게 된 전초밤 일행의 생활 역시 리얼리티 드라마로 제작되는데요. 전초밤이 스노볼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 이본영 회장이 최면술사를 이용해 전초밤의 기억을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전초밤에게 강력한 고통을 남겨요. 계획에 실패한 이본영 회장은 전초밤을 함정에 빠뜨립니다. 이본 그룹이 전초밤을 위협하며 스노볼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사이 스노볼을 설계한 사람이 전초밤 앞에 등장합니다.

전초밤은 과연 누구의 손을 잡게 될까요. 진실을 밝히고 사람들을 구하려는 시도는 서로를 속고 속이며 전초밤을 이용하려는 이들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복선이 드러나고 소위 말하는 떡밥까지 회수되는 걸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는 저를 발견했어요.

혹시 영화 다이버전트 시리즈(다이버전트, 인서전트, 얼리전트) 보신 분들 있으실까요?


전초밤이 최면술사를 만나고 트라우마를 벗어나기 위해 겪는 일련의 일들을 읽으며 전 이 영화가 저절로 떠올랐어요. '헝거게임', '트와일라잇' 시리즈나 '인셉션'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제 취향엔 딱이라 여러 번 봤던 영화인데요. 이 영화에선 주사를 맞고 기기에 연결하면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돼요. 환영을 통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 나타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분파가 결정되는데요. 덕분에 전초밤이 최면술사 '부해'를 만난 뒤 스노볼의 설계자를 만나러갈 때, 최면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맞닥뜨리는 장면이 더욱 생생하게 연상된 것 같아요. 비단 이 장면뿐 아니라,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어서 와,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싶어졌습니다.

세계관도 독특하고 2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라 문장 추려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책속의 한 줄'이라기엔 너무 길지만 그래도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이라 적어보며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타인의 삶이 딱히 구별되지 않는 이 쳇바퀴 무덤을 떠나, 오직 나만이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스노볼을 향해 나는 부지런히 달린다. 쳇바퀴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부쩍 스노볼에 가까워진다.

스노볼1_P.28

그리고 이 광경은 쳇바퀴 탑과 마찬가지로 5층 높이 정도 되는 거대한 유리벽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거인이 사용하는 거대한 시계 속의 태엽 장치를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스노볼의 대형 아쿠아리움 같기도 하다. 다만 그 안에는 해양 생물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 인간들이 들어 있다.

스노볼1_P.133

스스로를 의심하는 차향의 고백에는 진실된 울림이 있다.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무엇이든 너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해. 왜나면, 차설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액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줬다고 믿는 인간이니까."

스노볼1_P.374

이로써 우리의 탄생 목적이 사라졌다. 나를 기다리는 위대한 인생 계획과 화려한 수식어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내일의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상을 흉내 낼 필요도, 나의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일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의 또 다음 날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

스노볼1_P.424

눈부신 야경을 바라보며, 이 기괴한 세상을 누군가 바로잡아 주길 소망해 본다. 비록 살인마의 손길이라도, 그날이 오는데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어 줄 테니.

스노볼1_P.455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뻐꾸기 새끼는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그 둥지의 다른 알과 부화한 새끼들을 밖으로 밀어내 제거한다. 그게 뻐꾸기의 본능이라고 한다. 본능에 악의는 없다. 다만, 악의 없는 본능은 떄때로 다른 존재를 위협한다.

스노볼2_P.27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너 자신을 속여.

스노볼2_P.74

"영웅은 타인을 위해 세상을 구하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거야."

"뭐?"

"나를 향한 금기와 한계를 깨기 위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 원래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기꺼이 감내하고 이어 가는 것. 그게 세상을 바꾸는 일의 본질이야."

스노볼2_P.145

옳고 그른 건 없었다. 모든 게 그저 당연했다. 따뜻하고 행복해질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 세상은 공평했다. 불행한 사람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을 뿐.

하지만 누군가에게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타인에게 이용당하려 대어나거나, 스노볼을 유지하라는 사명을 타고난 사람의 세상은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운명이라는 괴물의 입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부단히 기어올라야만 한다.

스노볼2_P.338

"꼭 행복할 필요는 없어요, 항상 행복할 수도 없고요. 다만 혼자가 되진 말아 주세요. 힘들면 왜 힘든지, 즐거우면 뭐가 즐거운지, 당신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해 주세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누군가 당신에게 요구한 삶이 아니라, 그저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아 주세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행복하게 살다 아주 많이 늙은 뒤에 저를 만나러 와 주세요."

어느덧 차향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찬다.

"알았으니까, 무사히 돌아와요."

미류 언니가 두레박에 오른다.

스노볼2_P.396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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