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노예가 많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운명의 노예가 된 이후, 끝없는 노예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적어도 법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노예가 아니다. 원래 노예를 뜻하던 글자인 民이 주인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직도 삶의 곳곳에 노예 상태로 머물러 있는 부분이 많다. 금융기관에 대출을 한 사람은 빚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대학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점수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사상의 노예, 종교의 노예, 심지어 자유의 노예도 있다.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유가 없는 인간들은 자유의 노예다. 힘써 부르짖는다고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삶을 바꾸어야 한다. 사회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에 완전한 인간의 이론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럴수록 다양한 주장이 수용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양성은 창의성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다양성이 죽은 사회는 북한처럼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입시 제도는 다양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창의성을 죽이는 길이기도 하다.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문제와 똑같은 답을 원하는 사회가 창조적일 리가 없다. 한국의 초중등학교는 대학입시의 노예라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참으로 서글프고 답답한 심정을 느겼다. 창의성 없는 엘리트가 나라를 이끌고, 창의성 없는 서울대가 한국의 입시지도를 조정하고 있다. 우선 급한대로 서울대의 학부를 없애자. 대학원만 남기자. 로스쿨은 저자의 주장과는 반대의 결론으로 가고 말았다. 교육관료들은 현장을 모르고 날뛰고 있다. 교육개혁은 교육관료의 개혁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개혁이 이야기 되어야 한다. 정작 필요한 현장은 잠자코 있고 바깥에서 더 야단이다. 이것도 주객의 뒤바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