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 화이질서의 완성 아이필드 히스토리 History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 / 아이필드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영락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솔직히 조선 태종 때문이었다. 두 군주는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 영락제도 묘호도 태종이며(훗날 성조로 격상됨),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점과, 외향적인 기질을 가진 점, 그리고 찬탈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점까지 두 군주는 비슷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집권하고 있던 점과,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난 점이 있다는 점도, 영락제에게 관심이 갔던 요인이었다. 사실 조선의 초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정치 상황 역시 알고 있어야만 한다. 조선은 명에 사대를 하던 관계였으므로,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명의 정치 상황에 굉장히 민감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기심으로 책을 뽑아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만족하고 읽었다.

책은 기존의 전기 형식을 따르기보다,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영락제의 인생을 풀어나갔다. 그 특정 테마는 다름 아닌 화이질서였다. 화이질서란 결국 중국의 중화사상의 일부인데, 중화의 주변에 있는 오랑캐들을 질서 있게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중화사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역사적인 고찰을 시작으로, 영락제에 이르러 어떻게 제도적으로 완성되는지를 심도 있게 고찰했다. 책을 읽으며, 너무 특정한 부분으로만 인물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있었지만, 글을 읽어보니, 결국 영락제의 핵심은 바로 중화의 완성이었으며, 특히 영락 시기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화이질서에 입각한 '중화주의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니, 화이질서를 통해 영락제를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화의 개념을 단번에 깨부순다. 흔히 중화를 한족이 중심이 되어 지배하는 패권주의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해석이라고 꼬집었다. 이는 우리 머릿속에 은연중에 각인된 고정관념일 뿐이다. 본디 중화라는 개념은 중원에 천명을 얻은 국가가 다스리는 것으로, 민족과는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중화라는 단어는 유학에서 비롯했는데, 역대 이래로 유학이 국학으로 채택되면서 역대 국가들이 중화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유학에서는 중화라는 개념을 두고, 한족과 이족을 철저하게 구분을 지어 설명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한족만이 중원의 주인이라고 못을 박진 않았다. 물론 태생적인 이유로 한족을 편들고 우월시한 부분은 있지만, 한족이더라도 '덕'이 없으면 오랑캐와 같아지고 오랑캐더라도 천명을 받고 덕이 있다면 중원에서 주인이 되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틈을 열어놓았다. 그렇기에 역대의 이민족 왕조들은 이러한 유학의 중화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따라서 중화라고 했을 때 한족의 패권주의가 연상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중국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투영된 해석이다. 명나라는 흔히 한족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사실은 아니다. 역대 이래로 중국 대륙에 들어선 왕조 치고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도층의 출신이 역대 왕조마다 다르다는 차이는 있어도, 이러한 지도층의 출신에 의거해 국가 전체의 민족 구성을 단일화하는 것은 너무나도 견강부회한 해석이다. 중화사상 역시도 마찬가지다. 중화사상은 한족만을 우대하는 사상이 아니라, 그 면모를 잘 살펴보면, 천명을 받은 중원의 주인 국가와 주변의 오랑캐 국가가 조화롭게 사는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따라서 원명 교체기 시대에서 중원을 장악한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남아 있었다.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중화를 시스템화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 태어난 왕조의 존재 이유였으며, 천자의 임무이기도 했다. 화이질서는 이러한 중화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중화의 이념은 주원장이 황제권의 강화와 공포정치를 통해 터를 닦아놨으며, 결국 아들인 주체, 영락제에 의해 완성됐다. 번왕이었던 그가 반정을 통해 집권을 하고 나서도, 그는 정치적인 스탠스를 중화에서 찾았다. 아버지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하는 것. 더 많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 그렇게 자신의 영락대가 유일무이한 시대로 존립하는 것이 평생의 목표였다. 비유해보자면 이렇다. 조선 태종 이방원이 반정으로 인해 정권을 잡아서,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생을 돌보고 정사에 엄중히 매진했다면, 명 태종 영락제 주체는 화이질서를 통하여,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을 찾은 셈이다.

흔히 우리는 태종 이방원을 피의 군주라고 이야기한다. 확실히 그는 손에 숱한 피를 묻혀왔다. 그러나 영락제의 행동을 보고는 이방원이 오히려 너그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영락제는 피를 부른 군주였다.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는 남경에서 자신을 따르지 않은 정치세력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했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지, 친구 9족을 멸한 사례도 있었다. 집권 말기까지 그는 정략적으로 피해를 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 태종 이방원 역시 정적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태종 이방원은 사람을 쓸데없이 죽이진 않았다. 죽여야 할 사람이 있으면 희생을 최소화하여 집행했다. 게다가 집권 말기에는 자신이 자행했던 정치적 보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심지어 역사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의 아들까지도 품으려고 노력했다. 정치적 반대파와의 악업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 정적들과 '나름의 화해'를 시도한 셈이다.

두 군주의 집권 말기도 굉장히 판이하다. 영락제는 과도할 정도로 화이질서 구축에 열정을 다 했다. 그는 지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화이질서에 들어오지 않는 몽골을 향해 무리한 원정을 감행했다. 신하들이 반대하고, 북경 천도로 인해 민심이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화이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결과 5차 몽골 원정에서 객사한다. 마치 고구려에 집착하던 당 태종의 말로를 보는 듯하다. 반면 조선 태종 이방원은 오로지 조선을 다지는 것에 일념 했으며, 자발적으로 양위를 통해 세종에게 권력을 승계했다. 물론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그는 세종을 흔들 수 있는 요소들을 뿌리뽑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 결과 세종은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통해 치세를 이어나갔다.

책을 읽으며 나는 중원 대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확실히 중원 대륙은 문화와 사상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수많은 제자백가의 사상이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우월한 문화가 발흥된 곳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원 대륙은 문화와 사상의 무덤과도 같았다. 유학이라는 이념이 중원 대륙에 각인될 때, 중원을 지배한 것은 황제도, 한족도, 이민족도 아닌 바로 중화라는 사상이었다. 중원의 주인은 매번 바뀌었지만, 바뀐 주인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중화주의를 표방했고, 화이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즉 표면적으로는 왕조의 황제가 주인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은 중화사상'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는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라 중국을 기초로 한 화이질서의 국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우리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의 일원화는 결국 다양한 사상의 탄생을 가로막았으며, 중국 대륙과 화이질서의 국가에서는 '중화사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령만이 배회하고 있었던 셈이다.

분명 영락제의 시대, 14세기 15세기는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더 발전했다. 영락제 시기에 벌였던 정화의 해외 원정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정화가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벌였던 해양 진출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훨씬 앞서서 일어났으며, 유럽의 대항해시대의 항해술보다, 명나라 정화의 함대가 훨씬 더 발전했다. 과장은 있겠지만 기록에 의하면 정화의 함대는 오늘날로 말하면 당대 최고의 항공모함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이런 선박 기능을 제조할 기술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월한 문명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락제는 이를 그저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 화이세계 구축을 위해 사용했을 뿐, 정작 경제적인 부분으로 확장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었던 명의 군주들과 청나라 군주들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매우 확대해석한 감이 있지만 결론적으로 영락제가 구현했던 중화사상과 화이질서는 동아시아를 보수화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참 아쉬웠다.

우리는 흔히 사상이라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실체하지 않고, 관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저 허울좋은 이념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체하지 않는 관념이 중화 대륙에서, 그리고 아시아 전역권에서 미친 영향은 이토록 강대했다.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강력하고 뛰어난 군주들조차 이러한 사상의 관념을 초월한 자는 없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영락제는 결국 중화라는 이념을 화이질서로 통해 시스템화하는데 성과를 거둔 군주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말이 왜 이렇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영락제라는 뛰어난 명군도 결국 중화라는 이념에 조종당하고 희생당한 군주였을 뿐이다.'

책은 매우 재미있었다. 일본 저자가 쓴 책으로, 확실히 하나의 주제에 입각하여 영락제를 풀어나가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읽혔다. 내가 재미있었던 부분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집요하게 풀어낸 점이다. 게다가 문체도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핵심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가히 '일본스러운 모범 역사'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개인적으로 저자가 마음에 들었던 점은 또 있는데, 바로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특정 상황의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단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일본인들은 특히 타국의 역사에 있어서는 논점을 흐리지 않고 객관화하여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다만 이러한 객관성이 자국의 역사를 비출 때에는 빛을 잃어가는 것이 늘 아쉬웠는데, 저자는 이런 시류를 매우 비판적으로 생각했다. 그가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책에 나온 그의 역사관은 귀감이 될 만하다.

일본 사람이 쓴 중국 황제 열전 중 개인적으로 가장 우위에 두는 작가는 바로 '미야자키 이치사다'다. 그가 쓴 저서인 《옹정제》, 《수양제》를 읽으며, 얇고 제한된 분량에 이렇게 밀도 있고 정밀하게 인물을 설명할 수 있구나라고 감동을 받았다. 얇지만 깊이가 있고, 문체도 좋았으며, 삶의 교훈적인 내용도 가득했다. 마찬가지로 저자인 단죠 히로시의 《영락제》 역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단죠 히로시의 《명 태조 주원장》 책도 번역됐으면 좋겠다. 아울러 이런 스타일로 조선 태종에 대한 평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기 위해 읽는 것이다. 그저 과거의 지식만을 위한 배움이라면 안 배우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영락제》를 읽으며 나는 시진핑이 계속 떠올랐다. 그가 오늘날 자행하는 중국 중심의 정책들은 결국 현대판 중화주의에 입각한 것이고  화이질서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재됐다. 우리나라 역시도, 이러한 팽창주의의 중국을 이해하고 대응하려면, 뿌리 깊은 중화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선행되야만 할 것이다. 《영락제》는 그러한 중국의 중화주의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기에 최적의 도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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