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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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과 그 소년의 아버지는 서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두 권의 책을 쥐여줬었다. 바로 이 <명상록> 과 <군주론>을 소년은 이해하기 힘든 책을 쥐여준 아버지가 싫었다. 만화책을 읽고 싶었었으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완강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야, 소년은 성장하여 그 책에 대해서 느낀 점을 서평으로 쓰고 있다.

 

아버지께선 나완 반대로 책을 좋아하시진 않았지만, 보통의 철학서나 사상서들은 많이 알고 계셨다. 어린 나에게 사주셨던 책 2권 중 하나인 <명상록>, 이 책은 많이 읽었던 책이나, 리뷰를 보류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논어>가 일전 리뷰에서 할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명상록>은 아버지의 바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권유하신 두 책 <군주론>과 <명상록>은 내용이 전혀 상반되는 책이다. <군주론>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책이었으며, <명상록>은 다소 도덕적 관념과 내면의 성찰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군주론>과 <명상록>의 공통점은 어쨌든 리더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군주론>은 리더의 치국에 대한 방법이 써진 책이고 <명상록>은 저자 자체가 리더다. 리더가 개인적인 성찰을 적은 글을 모아논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유명한 황제 중 한명이고 5현에 마지막을 장식한 현군이었다.

 

블로그의 서평을 쭉 살펴보니 동양 고전과, 위인들에 대한 책만 쓴 것 같다. 하지만 플라톤을 비롯한 서양 철학 책이나 역사 책들도 읽고 있다. 다만 내 능력이 일천하여 아직까지 서평으로 승화하여 쓰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블로그에 처음 올리는 이 <명상록>을 필두로, 서양 사상 책에 대해서도 서평을 남기도록 노력해볼까 한다.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단 스토아학파의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스토아학파는 대체적으로 인내를 강조하며, 현실을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기본적 모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상형은 현인으로, 그 현인은 개인의 자아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도덕적 수양을 목표로 한 위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반대적 입장의 에피쿠로스 학파의 경우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지만 스토아학파는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공동체에 대한 도덕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기본적 관점은 이성이다. 어찌 보면 운명론적이기도 한데, 그들은 이성에 따라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 이성의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현인이라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바꿔 본다면, 동양 사상의 유교 사상과도 일통한 부분이 있다. 유교의 절대 상인 군자와 현인은 어찌 보면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 물론, 세상을 인지하는 그런 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전체적인 틀로 보면 비슷하다고 느꼈다.

 

책은 그런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은 황제가 직접 서술했다. 놀라운 점은 이 명상록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책은 저자가 공개적인 목적으로 출판을 생각한 책이 아닌 그냥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을 담은 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솔직한 면도 볼 수 있었고, 로마의 현군이라 칭하는 그의 진솔한 모습을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현인의 상을 볼 수 있었다.

 

일단 그의 치세에서는 로마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다. 로마는 넓어진 영토와는 다르게 비효율적인 행정 체계가 만연했고, 이민족들의 반란 등이 많았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의 나날을 보낸다. <명상록> 역시 그런 전쟁 속에서 지어진 책이다.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는 그는 사실 피곤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 현상들을 외면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황제의 자리지만 그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전쟁터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움을 진두지휘하는 모범을 보였지만, 사실 그 역시도 피곤하고 혼탁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매일을 반성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적었던 것이 바로 이 <명상록> 이다. 책의 체계는 <논어>와 비슷하게 일관적이지 않은 황제의 단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 1권은 자신의 가족들을 비롯한 평을 조리 있게 적어놨는데, 그 점을 빼면 <논어>와 마찬가지로 장마다 공통점은 없었다. 그는 이 책에서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노력과, 반성, 성찰 등을 토로했다. 그의 사상 속에는 강력한 도덕적 의식이 있었으며, 때론 운명론에 수긍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체념 감초차 보이기도 하고 인간의 허무주의에 대해서도 토로한다.

 

그러나 주 모토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끊임없는 반성을 종용, 그것이었다. 동양의 <논어>와 비교해봤을 때, <논어> 가 친근하고 조곤조곤하며 일상적인 느낌이라면 <명상록>은 전혀 다르다. 엄숙하고 절제적이며, 때론 숭고함, 경건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그것은 한 인간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승리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명상록> 1장에 그는 자신의 아내를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송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좌를 전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비워둔 탓인가 그의 아내는 그 외에 다른 장군과 소문까지 날 정도의 평판을 가졌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충실했었다. 심지어 후궁도 없이!! 이 여인만으로 여색을 잠재웠다고 한다!! 이런 부분으로 봤을 때 정말이지 초월적인 인간 자제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구나 더 놀라운 점은, 이 책의 원문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이라는 점. 이 당시 로마 사람들 상류층은 모국어인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역시도 빠삭했었다.  전쟁 끝나고 와서 모국어로 일기 쓰기도 귀찮을 텐데, 황제는 엄숙하게 '외국어'로 자신의 성찰을 담담하게 기록해나간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닌 스스로를 반성하며 스스로를 경계하며, 스스로를 질책하며 쓴 책. 그것이 바로 명상록이다. 그런 책이니만큼 책에서 풍겨져 나오는 엄숙함과 숭고함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만했다. 지금의 모습으로 치자면, 일상을 마치고 영어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영어를 잘 한다선 치더라도 사실 편한 모국어를 놔두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도 비교해보자. 공통점은 둘 다 로마의 지도자가 쓴 책이지만 둘의 성격은 너무나 다르다. <갈리아 전쟁기>는 애초부터 카이사르가 로마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기를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 쓴 자전적 영웅전이다. 물론 그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며 '카이사르는 ~했다.'라는 구절을 써오긴 했지만... 반면 마르쿠스의 <명상록>은 전혀 반대적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쓴 책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쓴 것이 아닌 주관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진솔하게 기록했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문체 자체도 다르다. 카이사르의 글은 수사학적으로 볼 때, 굉장히 짧고 단문이 많다. 그러나 <명상록>의 문체는 그렇지 않다. 그는 그의 글은 단출한 것 같으면서도 숭고한 면이 있으며 그 숭고한 면은 아무래도 좀 현학적인 표현 때문이 아닌가도 싶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글은 대체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느낌이 강했다.

 

 로마의 스토아학파 저술을 볼 때 가장 참고되는 저자가 세네카다. 그리고 이 <명상록> 역시도 마찬가지다.

 

최고지도자가 이런 정신적 원숙함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다. 여러 유혹에 굴하지 않고 이렇게 성찰하려고 했던 노력. 그 노력을 <명상록>은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노력 속에는 앞서 말했듯 황제의 절망이나 허무주의 역시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숭고함과 엄숙함 속에서도 비인간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뇌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 한 인간의 영혼의 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다 봤을 때 그래서 더 그를 존경했었다.

 

그렇게 올바르게 살고 로마를 위해 봉사한 그지만, 그의 대에서 로마 현군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로마는 이 시기 보통 왕위를 덕망이 높은 자에게 양위하는 방식을 보여줬는데, 그는 자신의 친자인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리고 알다시피 코모두스는 로마 시대에 유례없는 폭군으로 기록된다. 이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서양 고전 역본을 볼 때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번역가에 천병희라고 쓰여있으면 일단 믿어라. 우리나라에서 번역되는 서양 역본은 대부분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이중 번역이 많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숙한 학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천병희 선생님은 둘 다 능숙하시고 전문가시다.  초기엔 문학서를 번역하셨는데 지금은 역사학이나 철학 서적도 번역하시고 있다.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 특징은 일단 원전 번역서라는 장점이 있겠고, 두 번째가 가독성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즉 직역 위주로 한다 하더라도 다른 원전 번역자들에 비해 가독성을 염두에 두고 번역하신다. 이 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던 것 같다. 문학과 역사 고전은 그냥 이분 책으로 다 샀었다.

 

요즘은 플라톤 대화편들을 번역하시는데, 개인적으로... 플라톤 번역서는 정암학당의 책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뢰할 만한 번역가 선생님이시고, 책의 내용 자체도 좋고 번역도 괜찮았던 것 같다. 다만 주석이 뒤로 있는 구성이라서 좀 왔다 갔다 번거롭게 책장을 옮겨야 하지만, 책을 보는 데에는 거슬리진 않았다.

 

책은 굉장히 짧다. 본문은 모두 합쳐서 200페이지 정도고, 짧은 문단으로 구성돼서 사실 작정하고 읽으면 하루에도 다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읽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진 않다. 이런 책은 한 구절을 읽고 사색을 해 보면서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봤던 것 같았고,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고기처럼, 이 책도 그런 맛을 보여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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