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이덕일의 역사특강 2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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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그의 시대>의 후속작으로 나온 책이다. 전작인 <정도전과 그의 시대>는 뒷부분이 급작스러운 마무리를 나타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던 책이다. 그런 뒷부분들까지도 잘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대체로 전작에 비해 책 양이 늘어났으며, 정도전의 관점이 아닌 군주의 관점, 이성계와 이방원에 대한 관점으로 여말선초를 해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책은 잘 서술됐다. 몇몇 군데에 삼천포로 빠지는 논의가 있긴 하고, 저자의 사관 의식을 보여 주는 부분이 있지만, 잘 정리한 책임은 맞다. 나는 아쉬운 부분이, 지금 정도전 드라마의 유행으로 인해 정도전이 재해석되고 집중적으로 조망 받고 그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동지였던 이성계에 대한 평전은 한 권도 없으며 이방원에 대한 평전은 한 권밖에 없다. 정도전 현상에서 이런 부분을 볼 때, 너무나도 편협적이고 즉흥적인 부분이 아쉬웠다. 물론 정도전의 입장이 굉장히 주도적이고 중요함은 맞다. 하지만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이성계와,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이지만 이방원에 대해서도 조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정몽주에 대한 부분 역시도 잘 고찰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책은 기존의 정도전 현상과는 다르게 군주의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두 주인공, 이성계와 이방원. 역사적으로 이 둘은 라이벌이었다. 그리고 책에서 나온 둘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이성계는 세간을 많이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행동해야 할 때를 알고 설사 그 부분에서 욕을 먹더라도 행동하는 군주였다. 아마도 정도전이 아니었으면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지 못 했을거다라고 책에서 주장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성계와 같이 주변 신경을 많이 쓰는 리더는 피곤하기 마련이다. 정도전은 이런 부분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악역을 자처하여 이성계를 이끌었다. 이방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정몽주를 격살한 것에서 그런 부분이 잘 나타나있다.

 

내가 중점적으로 본 사람은 이방원이었다. 그는 정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콤플렉스인 무인의 집안에서 과거 급제를 통해, 이성계의 한을 씻어줬으며, 매 번의 이성계의 정치적 결단에는 이방원이 앞장서 있었다. 회군할 때, 강 씨 아들 둘을 말에 태워서 같이 도주시킨 것도 그였고, 이성계를 대신해 이색과 함께 명나라 사신길을 간 것도 그였다.

 

치세에는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옳으나 난세에는 다르다. 여말선초는 동아시아 자체가 난세의 장이었다. 따라서 왕위는 이방원이 이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이성계는 무리한 세자 책봉을 감행한다. 정도전은 이를 용인했고, 결국 이방원은 칼을 갈았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차이는 바로 현실 인식이다. 이방원은 시국을 잘 읽는 능력이 있었고, 복잡한 정세를 단순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해야 할 때, 즉각적으로 행동을 했다. 그는 아버지보다 좀 더 현실주의적 관점이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 대목이다.

 

태조는 치국은 유교의 도를 따랐지만 개인적으론 불자였다. 그는 고려의 불교가 폐단이 있다는 것을 문제 삼았지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탄압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뿌리 깊은 유학자다. 그에게 있어 충과 효는 절대적이었다. 과거를 급제한 이방원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 그였지만 아버지에게 칼을 겨눌 때 그의 심정은 어땠겠는가, 애초에 이성계와 이방원이 인식하는 효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이성계의 효는 절대적 권위를 따르라는 것이었고, 이방원은 그른 부모의 말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몽주를 죽이자 분노하는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효를 위해서 죽였습니다.'라고 했다.

 

 분명 왕조국가에서 왕위를 찬탈한다는 사실은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든 부분이다. 그리고 그 찬탈한 권력을 사욕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비극인 것이다. 대부분의 전제 왕권 군주들은 이런 사욕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었다. 세조를 보라. 세조는 자신의 찬탈한 권력을 직계 공신들과 함께 나눠서 사용했다. 그러나 태종은? 아니었다. 태종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수도승과 같이 왕위에 전념했다. 그는 국가의 법을 바로 세워서 법 앞에 설사 공신이더라도 군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가장 많은 오해 중 하나가 태종이 공신들을 내 친 이유가 개인적인 권력 야욕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책을 읽어보니 이유가 다 있었다. 적어도 태종은 이유 없이 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이나 과시적인 모습을 보일 시에는 가차 없이 내쫓거나 죽였다. 사회지도층에 비리를 하나하나 다 감시하며, 백성들에게는 신문고 제도를 비롯한, 선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했던 군주였다.

 

세종과의 비교도 보였는데, 노비제에 대한 부분에서 언급했는데 해석이 좋았었다. 노비제는 종부법과 종모법이 있다. 대체적으로 고려에서 성행하던 것은 종모법이다. 종모법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서 노비의 신분이 결정 나는 것이다. 종부법은 그 반대라 할 수 있겠다. 신분제 사회에서 조선은 아버지의 신분이 어머니의 신분보다 높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종부법을 시행한다면, 국가적으로 사노비가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양인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인이 많다는 것은 국가에 의무를 할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하는데, 태종은 기존의 노비제에서 종모법이 아닌 종부법을 주장하여, 결과론적으로 사대부들의 과한 사노비 소유를 억제하려고 했었다. 사노비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 도움이 전혀 안되는 존재들이다. 나라에 있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은 인원들인데다, 공노비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세종 치세에는 종모법으로 다시 환원된다. 사대부들이 계속해서, 종모법으로 고치자고 하면서 든 이유가, 여자들이 높은 집 자제들을 유혹해 자기 자식을 신분상승에 이용하려고 할 우려가 있고 그렇게 된다면 사회 윤리가 문란해진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말해서 억지라고 본다. 종모법이 있으면 대대손손 노비를 불리기에는 더 유리한 것이 맞다. 어쨌든 조선의 대부분의 상황은 남자가 여자보다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세종은 사실 노비들에게 출산 휴가를 주거나 그런 부분에서 치적이 있지만, 그런 부분들보단 범국가적으로 봤을 때, 태종의 정책이 국가적으로 양인을 확충하는 데에는 효율적이다. 국가는 어쨌든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는 양인이 많아야지만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노비도 줄일 수 있고, 국가 제정도 높일 수 있는 태종의 발상이 돋보였다.

 

세종은 사실 백성을 위한 군주임에도 맞지만, 사대부들의 손도 많이 들어준 군주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세종보다는 태종이 더 백성을 생각했다고 본다. 나는 몰랐는데 태종우라는 것이 있다. 5월 10일 날 태종이 죽은 날 내리는 비를 일컫는다. 태종은 태조를 밀어내고 왕이 됐다. 그에게 있어서 합리화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천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종 시기에 유난히 가뭄이 많이 들었다. 태종은 아마 괴로웠을 것이다. 피를 토하고 싶었을거다. 그래서 기우제도 드리고, 양위 소동도 기획하는 등,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많이 한 군주였다.

 

그런 태종이 죽은 날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 부분은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로, 얼마나 태종이 백성을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국가 권력을 찬탈하였지만 누구보다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었다. 노비제도 등을 개선하며 부국강병을 이뤘고, 후계 권력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위험요소는 모두 제거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오른 그여서 더더욱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부패가 연루되면 직계 공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내친 자였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 책에서는 안 나오는데, 하륜에 대한 부분. 태종은 이상하리만큼 하륜을 감싸준다. 그의 부정부패를 보고서도 눈 감은 적도 있었고 경고를 준 적도 있었다. 이 부분은 솔직히 많이 아쉽다.

 

태종은 솔직히 무인의 이미지가 강한 군주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합격할 만큼 책을 많이 보고 경서를 많이 읽었다. 임금이 돼서도 독서를 게을리한 적은 없다. 물론 세종과는 다르게 경연은 싫어했으나 그가 책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사색과 독서를 즐겼던 문인이었다. 태종은 난세는 말위에 군주가 다스려야 하지만 치세에는 군주가 도서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말위의 군주지만 후대의 군주는, 독서를 강조했다. 충녕이 왕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독서다.

 

외교관계에서 이방원은 실리적인 사대주의자였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의 황권 다툼에서 명 성조가 등극했다. 영락제라고 불리는 이 군주는 스타일이 완전 태종과 흡사했다. 그는 무력으로 일가를 청소하고 황위에 올랐는데, 이런 강력한 황권으로 거대 선박을 동원해 아프리카까지 대항해를 감행하기도 했고, 베트남의 새로운 왕조 국가를 80만 대군으로 복속시키기도 했다. 이런 강력한 명나라 앞에서 태종은 일단 지성으로 사대를 하자는 입장이었으며, 내부적으로 성곽 수리를 명령했다. 즉 지성을 드려보고 안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전쟁은 함부로 해선 안된다. 군주의 쓸데없는 자만심과 자부심으로 전쟁을 해선 안된다. 전쟁보단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보고 마지막에 써야 하는 정책이 바로 전쟁이다. 정도전이 주장한 주전론 때는 명나라 황실이 혼란기였다. 그러나 태종이 집권하던 당시는 강력한 군주인 성조가 버티고 있었고, 옆 나라 신생국가가 몰락한 전례가 있었다. 따라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서울의 남아있는 성곽은 태종 시대에 만든 것이라고 책에는 나왔다.

 

사실 책을 보며, 이성계에게도 참 공감은 갔다. 이성계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무력으로 알렸다. 화려한 신궁 솜씨와 더불어, 병법에도 밝은 그였고, 연전연승한 그였으나, 아들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특히나 복수의 칼날을 세운 조사위의 난이 그렇게 터무니없이 제압당했으니... 민심의 행보를 신경 쓰는 그 역시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싶다.

 

그러나 동정은 동정. 태조는 잘못된 태자 때문에, 역사적인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왕 씨들의 무차별적인 탄압 역시도 그런 것 같았다. 정도전과 이방원이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란 생각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이방원이 왕이 됐다 하더라도 재상 중심주의를 펼치는 정도전을 가만 놔둘 리가 없다. 이덕일은 양립이 가능한 시각으로 해석하지만 내가 볼 땐 둘은 권력에 대한 철학 자체가 다르다. 양립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옳다고도 할 수 없다. 태종은 태종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했고, 정도전도 그랬다.

 

세간에는 세조와 태종이 같은 철학을 가졌다고 같은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절대 아니다. 성향은 같을지 몰라도 철학은 다르다. 태종의 철학 속에는 백성이 있었다. 그는 조선이 내세운 민본을 왕권으로 실행했다. 세조는 그러지 않았다. 세조는 태종이 다 쳐낸 공신들의 나라를 부활시켰다. 자신의 정적들의 아내를 갈취했고 자식들은 찢어발겨 죽였다. 태종은 정도전의 아들들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벼슬하는데 제약을 두지 않았다.

 

태종과 같은 군주는 많다. 역대 이래로 고려의 광종, 그리고 중국으로 보면 이세민과 명나라의 영락제, 위나라의 조조, 조선의 세조, 진나라의 시황제 등등 전제적 군주 스타일은 많다. 그러나 그런 군주들 속에서 태종이 돋보이는 것은, 찬탈한 왕위지만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던 군주다.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까 말했듯 세종보다도 더 뜨거웠다. 사대부들은 고하를 막론하고 비리를 척결하는데 신중을 가했고, 국가의 법제를 완비하여 공신이더라도 법 앞에선 평등했다. 그는 완벽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군주였다.

 

그런 그였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괴감과, 처가 식구들을 몰살시키고, 심지어 장인마저 죽이고, 의형제인 이숙번을 내친 비정함에 그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조선의 입장에서는 좋은 군주였지만, 개인의 삶으로 볼 땐 외로웠으리라, 그리고 그런 그의 인생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그의 괴로웠던 인생. 외로웠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야 했던 길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얼마 있으면 5월 10일 태종이 서거한 날이 다가온다. 이 맘 때쯤 내리는 비는 태종우라고 하니, 이 날은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 태종우는 어떤 의미일 것인가? 아버지에게 끝내 인정받지 못한 자식의 눈물인가? 친한 친구와 형제조차 내쳐야만 했던 외로움의 파편인가? 가뭄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그의 몸부림인가? 현재 대한민국 시국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선조의 눈물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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