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 / 창비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동양 문화권에서 <삼국지>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남자들 간에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삼국지> 영웅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사를 몰라도 어떻게 보면 아주 스쳐 지나가는 중국의 이 시대 영웅들의 이름은 다들 빠삭하게 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전쟁소설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대의 대망 등등의 가치와 더불어 여러 영웅들이 보여주는 모습, 지략 싸움 등등 그런 부분들을 <삼국지>는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 덕후들도 꽤나 있으며, 웬만한 사람들은 줄거리 정도는 거의 파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 역시 그랬다. 책의 즐거움을 느낀 것은 <삼국지> 때문이었다. 어린 내가 그 당시 일주일 동안 잠도 안 자고 책만 봤었다. 방학 때였는데, 아버지께서 <삼국지> 한 질을 사다 주셨다. 1권을 대충 끄적여 보다가 시간을 보니 저녁이었다. 그리고 3권까지 연달아서 봤던 것 같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책을 보는 등, 계속해서 책만 봤던 것 같다. 그만큼 너무 재미있었던 소설이고, 많이 읽었던 소설이었다.

 

다시 본 <삼국지>는 역시 재미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예전처럼의 그 설레는 마음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읽었던 <삼국지>는 내용적인 재미에 치중한 독서였고 성인이 되어 본 <삼국지>는 비판의 대상의 독서였다.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고 불리는 책은 원래는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를 뜻한다. 기전체 역사서로, 위지, 오지, 촉지로 나뉘는 책인데 배송지가 주석을 대거 붙인 것으로 보완을 했다. 국내에서는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원본만 번역이 되어 나온 상태고, 배송지의 주까지 포함된 책은 출시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여느 삼국지 사이트 카페에 가면 소상히 번역해 놓은 곳이 있다.) 그럼 세간에 <삼국지>라고 불리는 소설책은 뭐란 말인가? 바로 원-명 전환기에 나관중이라는 작가가 쓴 <삼국지연의>가 그것이다. 줄여서 우리나라에는 <삼국지>라고 하는데 정식 이름은 <삼국지연의> 가 맞다.

 

즉 실제 역사 책과 역사 소설책 두 권이 있으며, 대체로 우리가 보는 책은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의 번역을 가지고 여러 담론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대체적으로 판매량이 가장 높은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지금 리뷰하고 있는 황석영의 <삼국지>의 대립이 그것이다. 시중에는 삼국지 번역본이 2가지가 있다. 평역과 완역. 이문열의 책은 평역이고, 황석영의 책은 완역이다. 두 책의 우열론이 인터넷을 달구는데, 내 생각은 그렇다. 두 책은 서로 간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는 점이다.

 

이문열의 책은 사실 <삼국지연의> 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은 소설이다. 작가의 과도한 개입이 들어간 책이고 평설이 들어간 책이라 나관중이 쓴 원문의 맛 <삼국지연의>의 본연의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이라는 것은, 결국 그 원본 자체도 중요하지만 현대의 가치로 재해석을 할 수도 있는 텍스트다. 이문열의 <삼국지>가 그렇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여러 타 삼국지와는 다른 부분이 바로 조조에 대한 재평가와 긍정성이 내포되어 있는 소설이다. 이런 경향은 일본의 시각이 많이 드러가 있는데, 일본인들이 조조의 실용주의와 실력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확실히 요즘의 학계는 촉한 정통론의 주인공 유비보단 조조를 더 긍정하는 분위기인데, 그런 중심에는 이문열의 <삼국지>가 기여한 부분이 있다.

 

즉 이문열의 책이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여서 소설 원문은 탁색 한 것, 그 원문을 훼손한 부분에서는 건덕지를 잡을 이유가 있겠지만, <삼국지연의>를 재해석한 부분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 더불어, 나는 지금까지 시판된 <삼국지>들을 거의 다 봤는데, 재미로 따지자면 이문열의 소설이 가장 재미있었다. 소설의 재미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도 이문열의 <삼국지>가 좋았었다. 이와 같이 현대적 가치로 해석된 삼국지는 이문열본을 비롯하여 장정일본, 김경한본 등이 있다.

 

반면 황석영과, 김구용, 그리고 <본삼국지> 등의 시각은 원문 <삼국지연의>를 그대로 번역하자는 입장인 것이다. 아무래도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한 고전이더라도 원문은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재해석을 지양하고 원전 중심의 번역서를 낸 것이다. 역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를 서로 비교하기 힘들 듯, 원전 <삼국지연의>와 현대적 가치로 재해석한 <삼국지>를 서로 비교하는 것 역시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둘은 삼국지라는 이름과 내용만 동일할 뿐, 관점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을 때, 나는 <삼국지연의>로 원문을 먼저 읽고 역사서인 <삼국지>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알아낸 뒤에, 현대적으로 재평가된 <삼국지>를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서의 삼국지를 먼저 읽으면 사실 좋긴 한데, 역사서 <삼국지>가 더럽게 재미없는 구성이라서, 흥미 유발로 <삼국지연의> 를 보고 심화하여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삼국지에서 나오는 여러 부분들은 후대 작가인 나관중의 이념이 고스란히 들어간 소설이다. 따라서 촉한 정통론 속에는 중화사상이 있으며, 유비와 그들의 무리는 한족을 상징하고, 절대 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조는 절대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여포는 포악한 항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 시대에 창작된 것으로, 명나라의 전환기에 써진 책이다. 즉 몽골인들에 능욕당한 한족의 자존심을 촉한 정통론으로 정신승리화 한 부분이 보이는 소설이다. 한족은 자기네들이 중국 대륙을 통치할 때 이런 중화사상 정신승리의 모습을 보이는데, 그 정신승리가 문학에서 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지>를 조금만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면, 유비에 대해서 새로운 조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는 사실 쪼다가 아니다. 삼국지에서 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유비는 당대의 영걸임엔 맞다. 그리고 선한 군주로 표현되고 있는데, 실제 역사가 아닌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평가하더라도, 유비의 행동엔 모순점이 굉장히 많은 위인이다. 그런 부분에서 한족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는 조조의 모습이 워낙 망나니로 나오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역사서의 조조는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소설은 결국 소설이다. 소설은 허구성을 가장 기초로 한 문학작품이다. 역사 소설이라도 혹자들은 삼국지를 7실 3허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 5실 5허 수준이다. 반은 거짓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 사서를 보면 <삼국지>가 얼마나 허구가 많은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를 읽을 때는 이것이 역사다고 읽으면 곤란하다. 그냥 문학작품이다.(허구다)라고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역사 소설이 아무리 사실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소설자가 붙으면 결국 허구의 속성이 가미가 됐다.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소설 삼국지와 역사 삼국지에 대해 쓸데없이 뭐가 옳으니 갑론을박을 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라고도 생각했다.  

 

더불어 이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많이 참고가 된 책은 <사기>가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사기>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꽤 많이 있었다. 유비는 유방이었고, 소하에 가까운 제갈량은 장량의 모습으로 나오고 있었다. 조운의 장판파 전투는 하우영이 유방의 아들을 구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표현 자체도 거의 흡사한 것으로 봐서 나관중이 이 소설을 묘사할 때 <사기>를 반드시 참고했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다.

 

내용적인 부분에서 더 비교를 해 보자면, 이문열본 비해 황석영본은 양이 적고, 제갈량 사후에 대한 내용은 황석영본이 더 풍부했다. 대체로 황석영본은 이문열본보다 전개가 빠르다. 반면 이문열본은 작가의 시각으로 분량의 재조정이 있었으며, 강조할 부분은 길게 늘렸고, 줄일 부분(제갈량 사후)은 대폭 줄인 편집이 눈에 들어왔다. 문체는 아무래도 이문열본이 더 수려했던 것 같다. 이문열 작가 자체가 글을 현학적이고 수려하게 쓰는 편인데 그런 습성이 삼국지에도 녹아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 소설의 결말은 굉장히 현실적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절대선으로 칭송되는 촉한은 결국 절대 악인 위나라에 멸망당한다. 이 부분은 인간의 지고지순한 노력(제갈량의 북벌)만으로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그런 관점도 보였다. 보통 고전 소설의 주제는 권선징악이 모토다. 그러나 이 책은 결말로 보면, 선은 결국 악을 이기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황석영은 서문에 이 부분을 가지고 촉한의 부흥(한족의 부흥)을 꿈꾼 민초들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그거야 한족의 입장이고, 그들에게 이민족인 내가 볼 때에는 그들만의 혈통주의가 느껴져서 굉장히 거북스러웠던 부분이었다. 애당초 촉한 정통론에 다른 민족은 논의되지 않는다. 동탁과 여포를 보라. 출신이 서량 쪽 (선비족 계열)이라고 얼마나 대놓고 까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한가지 부분은 이 책을 보다 보면, 생명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장수들이 몇만을 살인을 하고, 전쟁을 한다는 부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서 오히려 그런 부분을 즐거워하고 즐기는 감정도 생긴다. 전쟁의 무거움이나 인간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관점으로 봤을 때는 굉장히 위험한 소설이다. 전쟁은 작건 크건 일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다. 몇 십만의 대군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의 고통이 크다는 부분을 의미하는데, 저작에는 영웅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고통받는 백성의 입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 보면 전쟁을 가볍게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삼국지연의>의 안 좋은 점이 들어왔다.

 

그리고 누구나 느꼈겠지만, <삼국지연의>에서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군대는 5만 이상이다. 삼국이 형성됐을 때는 10만 이상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런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 비교를 하면 우리나라가 굉장히 스케일이 작아 보인다고 느낄 법도 하다. 중국은 중국이고 우리는 우리다. 애당초 비교를 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괜히 그들의 군세적인 것에 우리나라를 끼워 맞춰 약소국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비교는 상대적으로 해야 한다.

 

모쪼록 <삼국지연의>는 문제점도 많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 나관중의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고 상상력이 기발하기까지 하다. 주유와 제갈량의 모략 싸움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부분인데도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이 돋보였다. 이런 재미 덕분인가, 숱한 동양의 나라들이 이 <삼국지연의>에 영감을 받아왔고, 숱한 영웅들이 칭송을 한 책이기도 하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동남아 등 그리고 서구의 나라들까지 칭송하는 고전이다. 문학성이 굉장히 뛰어나고 저자 나관중 역시도 대단한 이야기꾼임에는 맞다. <삼국지연의> 가 끼친 문화적인 부분도 상당하다. 그런 소설인 만큼, 읽는 데에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닌 비판력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문제점이 많지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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