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유다의 밀약 -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지음 / National Geographic(YBM시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종교계에서는 교리를 흔들 정도로 강력하고 충격적이었던 책이지만, 사실 비종교인인 내가 봤을 때는 '아 이런 관점의 교리'도 있구나, 정도에서 스친 책이다. 어쨌든 정경으로 채택된 <신약성경>에서 유다는 그야말로 배신의 아이콘으로 낙인찍혔으며, 2000년이 넘게 인류로부터 외면당해왔었던 존재였다.

나는 <신약성경>을 보면서 가장 의아스러웠던 점이 유다에 대한 결말이 달랐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의 첫 장인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예수를 밀고했지만, 결국 자책감에 자살을 하게 됐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아예 유다가 악행의 응보를 받아 피투성이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다. 정경으로 선택된 복음서들의 공통점은 유다를 악인으로 규정하는데,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복음서 별로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용이 달랐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 걸까? 

이 <유다복음>은 예수와 유다의 비밀스러운 언약을 다룬 기록으로, 여기서의 예수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 복음서의 주요 내용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간결하게 설명해본다면,


1. 기존 교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

2. 예수는 창조주의 아들이 아니다. 창조주는 하위 신의 개념이며 부정적인 신으로 묘사된다. 그런 부정적인 신이 만든 이 세상이라서, 지금의 현세는 타락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예수는 그 이상의 상위 신들의 영역(바르 벨로의 불멸 세계)에서 온 초월적인 존재다.

3. 다른 제자들은 이런 예수의 정체를 모르고 있지만 '유다'는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다.
'당신은 베르벨로의 불멸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4. 예수는 그런 유다에게만 올바른 '지식'을 비밀스럽게 전수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자신은 상위 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 방법은 오로지 육신을 포기하는 것 밖에 없으니, 이 모든 것을 이해한 유다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너는 열세 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들에 의해 저주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을 저주할 것이다.' - 47

'그러나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옷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 남자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 56


5. 결국 유다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고 하늘 위에 자신의 별을 보게 된다. (이 부분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어느 하나의 별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예수는 유다에게 이렇게 명명한다.

'보아라 너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너의 눈을 들어 구름과 그 안에 있는 빛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별들을 보아라. 길을 인도하는 별이 너의 별이다.' - 57


6. 유다는 결국 예수를 배신했다. 그렇게 하여, 약간의 보수를 받았다. 복음은 이로써 마쳐진다.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다른 복음서들과 다르게, 예수의 부활이 언급되지 않는 점이다. 이 유다복음에 의해서는 예수는 절대 부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야말로, 그가 원래 왔던 상위 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진정한 구원), 그가 현세에서 부활한다는 것은 더럽고 타락한 곳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을 보며 생각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스도교 역시도, 여러 종파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다복음은 '영지주의' 복음서로 분류를 하는데, 영지주의는 자아와 신의 합일을 위해 '신비스러운 지식'을 강조한다. 결국 신은 내적인 영이고 빛이기 때문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고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

예수가 유다에게 전해 준 지식 그것이 바로, 자아와 신의 합일을 위한 신비스러운 지식에 한 예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죽음으로 이뤄질 수 있으며, 소수의 영을 가진 자들만이 상위 신의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복잡하지만 그들의 인식 자체는 올바른 지식을 강조하는 것 같다. 세상이 타락한 원인으로는 지혜의 여신인 소피아가 타락하였다. 그 결과 네브로(반역자라는 뜻)라는 뒤틀린 신이 태어났으며 그와 사클라스(바보 멍청이라는 뜻)는 이 세상을 창조한다. 반역자와 바보가 만든 세상이 바로 현세라는 것인데, 세상이 이렇게 타락한 근본 원인에는 '타락한 지식'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나는 책을 보며 든 생각인데, 과연 이 타락한 지식이라는 것을 문자적인 것에만 국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아마도 이들 종파에서는 다른 교리의 종파들을 공격할 때 '타락한 지식'이란 잣대를 그대로 쓰지 않았을까라고 추측을 해 봤다. 특히나 지식을 최고의 교리로 생각하는 그들이니, 자신들은 올바른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도 용의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다.

그럼 현세의 이런 부정적이고 뒤틀린 부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종교적 교리로 해석한다면, 올바른 지식(자신들의 교리)를 영접하고, 이해한 뒤, 죽음을 통하여, 하위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넘어서 상위 신들의 영역으로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구원이라고 그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실, <유다복음> 속에서의 예수는 바른 지식을 알고 있으며, 그런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유다' 조차도,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들의 제자들을 제쳐두고 유다에게만 '비밀스러운 지식'을 전승하며, 자신이 온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석을 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잘못된 지식의 교리를 따르고 있으며, 배신의 아이콘인 유다는 예수를 구원하였던 구도자이며, 예수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유다복음>도 보면서 좀 의문이 드는 게, 그럼 과연, 죽음으로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면, 뭐 하러 굳이 번거롭게 유다의 손을 빌려서, 예수는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예수가 자결하면 모든 것이 해탈되는 것인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 복음서는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 실제 사실을 재해석하여, 의미 부여를 한 문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도 싶었다. (물론 나는 재해석하여 의미 부여를 하는 쪽이 맞다고 본다. 뭔가 너무 부자연스럽고 희극과 같은 억지스러운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어쨌든 이 <유다복음>은 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다른 사상과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2세기 이레네우스가 지적을 했을 정도로, 정통 그리스도교(정확히 말하면 사상적 승리를 거둔 종파)가 보기에 가장 위험한 교리를 담고 있는 불온한 사상으로 취급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사상적 승리를 통해 이단들을 배척하는데, 그 중 가장 불온한 사상으로 몰아간 것이 바로 이 <유다복음>이다.

그는 영지주의 자체를 배격했으며, 유다를 긍정한 영지주의 분파를 '가인파'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발견되지 않아서 확정하기 그렇지만 역사상 영지주의 어느 문헌에서도 스스로 '가인파'라고 명명한 종파는 없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승리한 지금의 종파가, 승자의 이름으로 '가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린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 실린 바트 D 에이먼의 논문에서 종파 전쟁에 대한 부분을 더 인용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교계 내부에서 서로 경쟁하던 종파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종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종파는 반대파들보다 더 많은 개종자들을 끌어들였고, 경쟁 종파들을 변두리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종파는 교회의 조직 구조를 결정했다. 이 종파는 신도들이 어떤 교리를 낭송할 것인지 결정했다. 그리고 이 종파는 어떤 책들을 경전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했다.
유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인물들과 이레네우스는 이 종파에 속했다. 이 종파는 '정통'이 되었고 모든 반대파들에 대한 승리를 굳히자 자신들의 투쟁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갔다. 즉, 자신들이 항상 그리스도교 여론의 다수파였으며, 자신들의 견해가 사도적 교회 및 사도들의 견해와 일치했고, 자신들이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직접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종파가 경전으로 받아들인 책들은 이러한 주장을 입증했다. 왜냐하면 마태와 마가,누가,요한은 모두 원시 정통파가 흔히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서술함으로써 원시 정통파의 경전에서 탈락된 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한 무서의 존재에 대한 소문이 계속 나돌았으나 보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보존하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문서들의 내용은 허위이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그런 문서들은 조악한 죽음을 맞도록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오래된 원본들이 낡았을 때 다시 필사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결국 이렇게 고립된 사본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역사란 것은 사실 승자의 기록이다. 사상의 승리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그대로 자행됐다. 제자백가의 철학의 전쟁터에서, 현실적으론 법가가 승리했지만, 결국 중국을 장악한 것은 유가였고, 그러한 유가는 유교로 진화하여서, 모든 제자백가들을 이단화하여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종교라고 해서 별반 다를 바 있겠는가? 사상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 인물로도, 기록이라는 텍스트는 승자의 입장인 것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방원은 칼을 쥐고 정도전에게 말한다.

'그대가 만든 조선에서 그대는 영원히 배척될 것이오, 나는 그대의 존재를 또 다른 존재로 덮어버릴 것이오, 정몽주라는 해로 말이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충신을 조선 선비들은 추존할 것이오.' 대충 이런 말을 하며, 정도전을 죽인다. 그리고 실제로, 정도전은 이단으로 배척당했다. 허균은 정도전의 시를 특히 좋아했는데, 정부에서는 이런 허균을 보고 이단자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을 무기로 공격했다.
 
유다 역시도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물론 기존 복음서들의 말 대로, 유다는 배신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우리는 좀 더, 다양화된 사상을 만날 수 있으며, 유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해석론을 두고 다양한 견해를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그함마디 문서를 비롯해, 유다복음이 포함된 '차코스 사본'에서 우리는 기존의 성경과는 다른 복음서들을 만날 수 있다. (선택받지 못한 복음서, 외경이라고 명명되는) 나는 개인적으로 이 유다 복음보다는 도마복음이 더 매력적이다. 유다복음은 솔직히 파격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그냥 다양한 종파가 있구나, 교리가 여러 교리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에서만 그쳤는데 (물론 이 부분은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도마복음에서의 예수는 정말로 '인간적인' 내면이 돋보이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도마복음 서평 때 올리겠다.)

책에는 번역자들의 흥미로운 논문이 많이 있었다. 로돌프 카세르의 글 '차코스 사본과 유다복음의 이야기'라는 글을 읽으며, 인간의 경제적 욕망에 인류의 유산이 이렇게까지 곤욕을 치르는 행위를 보며, 정말이지 안타까웠다. 기존 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문서가 그대로 박살 나길 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인들이야말로 이런 문서들을 읽고, 기존 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상호보완적인 부분으로,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종교인들에게 외경의 포용성을 강력하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결국 전문가의 손에 들어간 복음서는 위태위태한 상태였었고, 그것은 패배한 사상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복원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문서를 잘 복원해내서 정말 다행이었다. 패배한 사상이라고 해서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은, 이 영지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지식'이라는 것에 플라톤의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나그함마디 문서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나왔는데, 이 <국가> 책 역시도 영지주의적 관점으로 각색한 책이었었다. 그리고 이 유다복음에서, 사람의 혼은 별과 상응한다는 이론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왔던 주장이었다.

이런 부분으로 볼 때, 이 <유다복음>을 중요시한 종파,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지식에는 '플라톤'의 철학을 긍정하고 있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영지주의는 여러 면에서 불교 철학과 비슷하지만, 궁극적으로 차이가 있다. 영지주의에서 신성시되고 비밀스럽게 여기는 것, 신에 인간의 내면이 근접하는 매개체는 '지식'이다. 그러나 불교철학에서는 자신이 부처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 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이런 부분에서 본다면 지식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에 대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영지주의 역시 깨달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지식'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전제가 있고, 지식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강조되는 경향을 받았다. 나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사실 이 책이 발견됐다 해서, 기존의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하는 책이라고 해서,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믿는 입장인 종교인의 관점으로는, 자신의 믿음이 독실하다면, 자신들의 종교에 더욱더 매진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겠고, 학자나 비종교인의 경우에는 다양한 기독교적 해석이 존재했었다는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어쨌든, 다소 분량이 적은 쪽수의 책이지만, 재미있었다.

유다복음의 신선한 시각과 유다복음의 해석뿐만 아니라, 수록된 논문들 역시도 아주 좋았다. '차코스 사본과 유다복음에 얽힌 이야기'에서 문서의 행적을 둘러싼 고고학의 노력을 볼 수 있었으며, '유다복음이 제시하는 또 다른 관점'이란 논문은 유다복음의 친절한 해설서였다. '성 이레네우스와 유다복음'이라는 논문은 사상계에서 이레네우스의 규정을 둘러싸고 유다복음과 그 종파들에 대한 상세한 검증이 돋보였었으며, 마지막 논문 '유다와 영지주의와의 관계' 역시도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었다. (사실 솔직히 유다복음 텍스트보다는, 논문들이 더 재미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헌들이 많이 발견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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