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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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상실의 시대> - 원제 <노르웨이의 숲>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 민음사

쪽수 : 495

 

*. <상실의 시대>라고 썼지만, 사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한국에선 <상실의 시대>가 익숙하여 올렸습니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나는 기숙사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밤마다 내 룸메이트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누워서 뭔가를 봤다. 궁금하던 차, 룸메가 보는 책을 보니 <상실의 시대>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그 친구에게 어떤 책이냐고 물어보자, 완전 광신도처럼, 청춘의 상징, 방황하는 영혼의 어쩌고 하며 추켜세웠다. 당시 내 좁은 안목으로는 그저 여자들이나 관심 가질 만한 시시한 연애 이야기로 치부하고 그 친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세월은 지나 20대 초반, 짝사랑하던 여자가 자취를 하기로 했고, 이사를 한다고 도와달라고 했었다. 어장관리 호갱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짝사랑을 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사를 도와줬다. 짐을 다 옮기고, 정리가 끝나고, 청소가 끝나고, 그 아이와 나는 점심을 중국집에서 시켰다. 그 배달 오는 시간 동안 초조하고 뭔가 말을 리드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안절부절 못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마침 <상실의 시대>가 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난 이때까지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고딩때와는 다르게,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인지하고, 대충 내용 정도는 알았다. 그 친구도 가장 좋아하는 책이 <상실의 시대>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식사가 올 때까지 계속됐고, 나의 어색한 초조함을 한 번에 제거했었다.

 

  두 번의 하루키와의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점도 있다. 아무래도 하루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뭔가 방황하는 청년이라면 하루키를 읽어야 할 것만 같은, 강요받는 압박이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참 싫었다. 뭔가 하루키를 들고 다니거나 알지 않으면, 방황하는 성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 거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그 당시 문학보단, 사회나 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나의 방황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은 철학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렵고 사변적인 철학책을 붙잡고 답을 갈구했었다.

 

  그런 하루키를 이제야, 만나게 됐다. 참으로 오래 끌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영화도 봤었기 때문에 대체적인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대체적으로 인물 간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다. 스토리는 정말 간단했다. 어느 누구나 겪을 법 했던 대학생들의 방황 이야기를 현실적인 시대적 묘사와, 조금은 과장적인 인간관계들의 조화, 두 가지 측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포커스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배경 묘사에 대해서 정말 공감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머무는 기숙사의 환경은 마치, 평범했던 남자아이들의 기숙사 생활을 떠올리게 했고, 심지어 자취했던 추억마저도 떠올렸다. 거기다 어느 대학에서나 있는 기득권과 운동권의 대립적인 이야기, 알코올에 취한 주말의 거리 등등..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기즈키라는 절친이 있다. 둘은 고등학교에서 만났으며,기즈키의 여자친구인 나오코와 셋이서 그렇게 추억을 쌓아왔다. 그러니 기즈키는 자살을 하게 되고,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도쿄로 대학을 가게 되고, 기숙사를 가게 되고, 그리고 나오코를 다시 만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을 확인할 무렵, 나오코는 병의 치료를 위해 와타나베를 떠난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라는 선배와 함께, 채워지지 않는 방황감을 여자들과의 미팅과 원나잇으로 풀고 다닌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와타나베에게는 미도리라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치료받는 곳으로 가서 나오코와 나오코의 지인인 레이코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와타나베는 갈등한다.연애의 밀당을 주고 받는 미도리와의 관계와 순애보적인 나오코와의 관계를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모호하지만 분명한 주제를 나타내며 마무리 짓는다.

 

  책을 읽으며 와타나베에 공감했던 부분이 있다. 첫 번째로, 외동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외로움에 대해, 어느 정도 내성을 지닌 그의 내면에서 나와 비슷한 면을 봤었다. 두 번째로, 스스로 평범하다는 설정과, 튀지 않고, 순응적인 부분, 그리고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그의 정신관을 보며 깊은 공감을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외골수적인 부분이다. 나도 그와 같이 한 곳에 빠지면 깊이 있게 알아나가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은 아예 신경을 꺼버린다. 이 부분은 와타나베가 사회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그가 좋아하는 취미마저도 닮았다. 수영, 독서, 음악 듣기...

 

  그러나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의 설정을,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끌 수 있는 인물로 설정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설정은 이 소설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대중이 깊이 빠져드는 이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범한 주인공이지만 역시 소설은 소설이다. 그의 인생은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평범하지 않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 그리고 첫사랑인 여자와의 떨어진 정신적인 사랑,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은 적극적이고 음란한 이야기를 하며, 대시를 하는 미도리와의 우연스러운 만남,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판타지적으로 열광할만한 매력을 지닌 나가사와 무려, 헌팅률 99%에 달하는!! 그의 능력(나도 이런 선배 좀 있었으면 했다.)... 주인공의 모습과 배경이 현실적이고 친숙하게 다가갔다면, 작가는 인물 간의 설정과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절묘하게 잘 섞어놨다. 이 절묘함이 한 쪽으로 지나치면 위화감이 조성되고 싸구려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루키는 적절하게, 그리고 아름다운 언어로 잘 조화시켰다.    

 

 기즈키와 나가사와는 주인공의 남자 인연의 두 축을 이룬다. 둘 다 뛰어난 인물이지만,

기즈키는 그 뛰어난 역량을 와타나베와 나오코와의 관계에서만 발산한다. 나가사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매력을 한 쪽으로 집중시키지 않고 확산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소 거만하고 무례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거기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의 기본적인 시각 차이도 나타나고 특히나 가장 돋보였던 부분은 나오코를 둘러싸고, 죽은 기즈키와 와타나베의 대립이 눈에 들어왔다. 대답 없는 기즈키에게 와타나베는 책임지지 못한 그를 원망하면서도 자신은 삶을 선택했고 나오코와 같이 살아가겠다는 책임을 역설하는 부분에서, 남자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여자들과의 인연도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가장 중심이 되는 나오코와 미도리, 둘은 성격도 다르고, 발산하는 매력도 다르다.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사랑은 죽음을 상징하듯, 어둡고 암울한 암시를 계속해서 나타나는 반면, 미도리와의 사랑은 생명을 상징하듯, 발랄하고 현세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나오코의 회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소설의 끝은 미도리의 전화로 끝이 난다. 이것은 결국 처음에는 슬프고 방황하는 인간이더라도, 삶을 선택한 자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인생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 만 같았다.

 

  인물들이 다양하고 개성 있게 나오는데 가장 큰 공통점은, 정상적인 인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등장인물이 다 부정확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보일 법한, 아무 부러움이 없을 것만 같은 엄친아 나가사와조차도, 그 자신의 무례함과 오만함, 뒤틀려버린 힘의 논리에 굴복한 모습, 광적인 일그러짐 등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상인이 아닌 나오코와 어울리는 정상적인(겉으로 보기엔) 와타나베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 역시 청춘의 시기에 들어서면 불완전한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청춘의 방황엔 어떠한 모습도 어떠한 해답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숙명론적인 관점도 보이는 듯했다.

 

  이 책의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음악인 노르웨이의 숲을 땄다. 극중 나오코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레이코가 기타로 치던 음악. 네이버 지식인에 알아보니 이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은 1960년대에 극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 부산물인 프리섹스, 마약, 알코올 등으로 점친 그 시대의 덧없는 사랑을 노르웨이의 쓸쓸한 겨울 숲에 비유해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처럼, 혼란스러운 학생 운동 시기와 더불어, 방황하는 청춘, 그리고 방황하는 사랑 관념 등의 부분들과 얼추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노래 가사에서도 나오듯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나는 혼자였어.')

 

 라는 이 대목은,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상실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굉장히 즐겁고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일본 소설 특유의 가벼움, 그러면서도 잔잔한 분위기, 거기다 평범한 주인공과 현실 속에서의 기묘한 만남이 주는 조화, 등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많았다. 특히 어떻게 묘사하면 굉장히 외설적이고 상스러운 부분까지도 하루키는 그 특유의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예전 모습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청춘의 모습은 , 미도리와 같은 그런 자극스러운 말을 하며 적극적이게!! 다가오는 여자도 없었고, 엄친아 나가사와와 같은 구세주(?) 도 없었지만... 아마 와타나베와 같이 방황하고 길을 잃은 모습만큼은 일치했었다. 그리고 이런 방황의 모습은 정도가 다르겠지만 어느 청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춘들은 이 소설에서 자신의 방황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 편의 수채화를 본 느낌이다.

가볍게, 하지만 즐겁게, 부담 없이,

그러면서도 회상에 잠길 수 있게,

 

다만, 작가가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죽음이라는 부분에서, 뭐랄까, 과한 부조화를 느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즐거웠던 독서인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숙사에서 동창이 생각난다.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틀며, 그 친구의 페이스북에 가서 오랜만에 글을 남겼다.

 

'이제야, 나도 <상실의 시대>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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