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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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역사서와 평전, 철학서만 줄곧 읽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왔었다. 특히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1 독한 뒤로 멘탈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문학으로의 도피를 생각했고, 추천받은 도서가 <몰락하는 자>와 <인간실격> 이였다. 오늘의 리뷰는 <몰락하는 자>에 대해서 써내려가볼까 한다.

 

 일단 이 책은 2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 번째로 배경적인 상황은 디스토피아 사상(부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술상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서사적 흐름이 아닌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내겐 이 책은 쉽게 읽혔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는 저자의 생각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읽기 시작하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배경과 여러 음울한 분위기 역시도 책을 몰입시키는데, 공헌했었다. 쉽게 읽히지 않는 법 역시도 이 소설 내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있었다. 일단 나의 경험으로는, 주말에 즐겁게 책을 일독했었는데, 개인 사정상, 토, 일요일을 친구와 약속으로 인해서, 책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월요일 책을 다시 보는데, 책에 몰두하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었고, 특히 이 책의 서술상 특징이,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한 번 집중력이 끊어지면, 다시 몰두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는 점도 있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나'와 인간의 절대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글렌 굴드' ,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메인인 인물 몰락하는 자를 상징하는 '베르트하이머' 이 셋의 이야기다. 다른 외국 소설들과 다르게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이 3명의 인물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스토리는 진행된다. 나와, 글렌, 그리고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당시의 부유층 출신이며 재산이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 설정되어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음악에 미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집안으로부터 도피적인 선택과 반항적인 선택으로 음악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은 잘츠부르크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 수업을 하는 모차르테움에서 거장 호로비츠의 수업을 같이 듣게 된다.

 

 셋 모두, 공통적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굉장한 재능을 보여줬었으나, 글렌 굴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으며, 천재적인 모습에,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경외감과 상실감이란 애증의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두 주인공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나는 철학의 길로 도피를 결심했으며, 베르트하이머 역시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 뒤, 베르트하이머는 점점 몰락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의존하던 여동생에게 버림받고, 글렌 굴드의 죽음을 접하고, 자결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베르트하이머의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사적인 소설의 구성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지만, 책의 서술은 내가 베르트하이머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현재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회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부분들을 나타내고 있다.  

 

 글렌 굴드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글렌 굴드를 작가는 적절한 허구를 뒤섞어서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극한의 노력과 완벽주의로 인해, 높은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다. 전지적인 인간으로 그리는 그였으나, 작가는 나를 통해서 글렌을 '피 나는 노력을 통해 이룩된' 재능이라며(물론 천재성 역시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타고난 인간의 절대적 완벽성을 부정해버린다. 극 중에서 그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연주를 하다 뇌졸중으로 죽는데, 포기하지 않는, 극단적인 완벽을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대비되는 베르트하이머 역시 천재적이고,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글렌을 만난 뒤로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는 인물로 묘사한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글렌의 포스가 상당함) 점점 책장을 넘길수록 존재감을 발휘하는데, 특히 극한의 의존적인 성격과 줏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팡질팡 고뇌하며, 합리화를 찾는 어쩌면, 강한 멘탈을 가지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 역시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물론 글렌보단 떨어진다), 충분히 부유한데도 전혀 만족을 못하고 모든 것에 불평을 한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연주에 충격을 먹고 진로를 바꾸는 '나'를 보고서야 자기도 따라서 정신과학으로 도피를 감행한다. 그 뒤 여동생에 광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글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지탱하는 글렌과 여동생의 상실 후에, 의존적인 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체적인 결심을 하는데, 극단적인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걷는다.

 

 작품의 나 역시도, 베르트하이머와 비슷한 부류인데, 베르트하이머가 극한의 공황과 방황, 의존으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면, 나는 체념적인 긍정을 통한 합리화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 자신은 베르트하이머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글렌의 천재성을 빨리 알아차리고 단념했다는 자위를 하며, 베르트하이머를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글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으며, 그 글 역시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도 체념적 긍정을 통해서 글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 스스로 글을 많이 남겼지만 죽기 전 모두 불태워버렸고, 나 역시 글렌에 대한 글을 예전부터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 했다. 대상만 달랐을 뿐 도피한 진로에서 그 둘은 뭐 하나 이룬 것 없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 책의 구성은 대립과 대립의 축으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축은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이며, 여기서 나아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대립적인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서 베르트하이머와 내연 관계였던 여인숙의 주인(하류층 계급)과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상류층 계급(베르트하이머를 포함한 나와 글렌 굴드까지)의 대립을 통한 계층적인 대립도 선보인다.

 

 특히 암울한 배경 묘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조국(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과감하고 파괴적인 언어로,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직설적인 돌직구를, 작품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통해 내던진다.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 스위스 등 더불어 모차르테움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여러 배경 묘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있다. 뒷부분에 베르트하이머와 관계를 나눴던 여인숙의 주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작가는 퇴폐한 오스트리아의 법제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설 자체가 인물의 행동도 그렇지만 배경의 비판을 통해서 상징하는 것들이 유난히 많았다.

 

 음울한 분위기, 인간의 고질적인 모습인 질투와 경외를 적절하게 섞어서 다룬 이 소설을 보며, 나 역시도 지난날의 뛰어났던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느꼈던 박탈감과 상실감, 그리고 경외심을 떠올리게 만들었었다. 작가의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얼마나 조국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느낌이 왔으며, 음울한 배경 묘사 속에서 던진 돌직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어쨌든, 책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시점과 서술 방식, 그리고 대립되는 상징으로 전혀 간단하지 않게 만든 작가의 표현력에도 대단한 경외심을 느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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