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평전 - 호랑이를 탄 군주
박현모 지음 / 흐름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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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KBS에서 명맥이 끊어진 대하사극을 부활시킨다고 했을 때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궁금했다. 이후 새로운 신작이 '태종 이방원'으로 확정됐을 때 소재의 식상함에 우려도 있었지만 이방원 카드를 꺼내 든 방송사의 입장도 충분히 공감됐다. 사극이라는 장르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시국에 KBS는 왜 이방원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야 했을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방원 외에도 매력적인 인물이 엄청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방원'을 소환해야만 했던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숱하게 다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조명하거나 재해석될 여지가 많은 인물이라서 선택한 것이라고. 태종 이방원의 인생은 그 자체로 무척 드라마틱 하다. 두 번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권좌를 탄탄하게 만드는 과정, 부강한 조선을 다지는 모습, 그 과정에서 동지였던 인물들의 잔인한 숙청, 아버지에 대한 이중적인 마음, 그리고 조선을 위해 큰아들을 포기하고 세종을 택군하는 모습까지... 그는 아들 세종과는 다르게 무척 입체적인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세종의 삶이 인정감을 바탕으로 초지일관 우상향하는 코스피 우량주식의 모습이라면, 태종의 삶은 코스닥 작전주와 같이 등락폭이 들쭉날쭉 엄청났다. 그래서일까, 제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봤을 때 세종의 인생은 교훈은 많을지언정 흥미는 떨어진다. 2030세대의 단어로 표현해 보자면 '노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태종은 세종의 업적을 넘어설 순 없지만 인생 자체로 비교해 보면 무척 흥미롭다. 그래서 세종을 다룬 책은 많지만 태종을 다룬 책은 거의 없다. 반대로 태종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많지만 세종이 주연인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KBS에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최종적으로 '태종 이방원'을 낙점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의문이 생긴다. 태종은 세종과 같이 배울 점이 없는 지도자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태종실록》을 완독하며 살펴봤는데 그는 배울 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배울 점이나 교훈보다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에만 집중한다. 야사와 흥미 위주의 썰, 극단적인 시각들이 난무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태종을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오해한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오늘날, 태종 이방원에게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독재와 특정 이념을 추종한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도 뜨거운 감자인 태종에 대한 연구를 멀리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학계의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은 대중적인 저술도 미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악순환이 가속화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태종에 대한 괴리감도 점점 높아질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태종은 미디어에서 다루는 흥미 위주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점이 무척 아쉬웠다. 태종과 같이 배울 점이 많은 지도자가 특정 이념에 의해 가려지고 진지한 연구가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드라마 영상매체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태종 이방원에 대한 대중의 시선을 모을 수 있으며 연구와 출판물도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검색해 보니 방송을 전후로 태종과 관련된 단행본이 여럿 나왔는데 이 책은 유독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이 다른 태종 저서들과 비교해 볼 때 무엇이 차별화된 것일까? 가장 주목할 점은 저자의 약력이다. 저자인 박현모 교수는 학계에서 조선의 국왕들을 조명한 연구와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세종과 관련된 강연과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즉 조선왕조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며 강연하는 '역사 전문가'가 쓴 평전이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태종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연구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전문가에 의해 출간된 평전이기에 의의가 있다는 뜻이다. 저자의 전문성은 책 말미에 있는 '태종연구현황'에서도 빛을 발휘한다. 여기서 저자는 태종과 관련된 논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본문에서도 특정 논문에 시각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단락을 찾을 수 있는데, 평전을 쓰기 위해 태종과 관련된 저서와 논문을 꼼꼼하게 두루 살핀 것 같아 신뢰가 갔다.

 

 책은 태종의 삶을 서사적으로 풀지 않고 테마별로 나눠서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숱하게 다룬 이방원이기에 그의 삶을 시간순으로 조명하는 방식은 독자에게 식상함을 선사했을 것이다. 《태종실록》을 완독했지만 책을 통해 간과했던 부분들도 체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왕비 민씨에 대한 해석인데, 저자는 왕비가 태종을 폐하고 세자인 양녕대군을 왕위로 올릴 역모를 꾸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생각해 보면 태종의 선위 파동 때, 민씨는 태종이 없는 틈을 타 민무질의 부인 한 씨를 불러들여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민씨가 어떤 사람인가? 태종을 왕위에 올리려고 집에 병장기를 몰래 숨겼던 이력도 있다. 실록에는 민씨가 모반했다는 직접적인 기사는 나오지 않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정황상 역모를 꾸몄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국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다. 이 중 특히 여진과의 전쟁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도움이 됐다. 《태종실록》을 읽어도 여진과의 관계는 단번에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책을 읽고 해당 날짜의 실록 기록을 보니 양국의 관계에 대한 흐름이 명료하게 정리됐다. 이 시기 우리는 여진보다 강국이기에 전쟁에서 많이 이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왜구와의 전쟁 분석도 흥미로운데, 조선군의 승률이 20%를 밑도는 것도 처음 알았다. 태종 시대의 국방을 이토록 구체적으로 분석한 사례는 처음이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세 번째 인간 이방원에 대한 고찰이다. 방송매체에서는 태종을 냉혹하고 차가운 모습, 그리고 무(武) 인에 이미지로 묘사한다. 그래서 태종을 생각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물상이 일반적으로 떠오른다. 실제 태종은 그랬을까? 책에서 분석한 태종은 이런 대중의 시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무인이 아닌 문(文)에 치우친 인물이다. 키도 작으며 감정 기복도 심했다. 궐 안에서 정치를 하는 것보다 사냥을 하는 것을 좋아했고 감수성도 풍부했했으며 눈물도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감정이 섬세했고 무척 예민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실록에서 살핀 태종도 저자의 분석과 비슷했다. 그는 무척 섬세하고 예민한 감정을 가졌지만 공적인 일 잎에서는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려고 노력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며 개인적 감정을 정사에 투영하지 않는 자세. 이런 모습도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태종 이방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통하여 새로운 해석과 기존의 책에서 고찰하지 못하던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전을 덮으면서 태종이 주는 교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우리는 태종에게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 내가 찾은 교훈의 핵심은 '일'이다. 태종은 일을 아는 리더였다. 그랬기에 일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제대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산재한 문제들을 명료하게 처리했다. 고려의 유습을 없애고, 기득권 세력을 잠재우며,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제도를 개혁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일'을 아는 지도자, '일'을 되게 만드는 지도자. 팔로워들을 적재적소에 포진시켜 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지도자. 그런 지도자가 태종 이방원이었다. 책은 그런 이방원의 진면목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편견을 거두고 책을 읽으면 태종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균형 잡힌 시각으로 태종의 전반을 잘 살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종의 장점과 단점을 두루 설명한 것도 좋은 평전의 기준을 만족하는 부분이었다. 한 가지 옥에 티를 꼬집자면 태종 시대의 신료들을 설명하는 챕터에 문관들만 집중적으로 조명한 부분이다. 책에는 조준과 하륜 그리고 권근을 소개하고 있는데, 무인인 조영무와 이숙번 이천우, 박은 등등도 소개하여 균형을 맞췄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들 무인들도 태종조에 커다란 기둥이었으며 정권을 안정시키는 부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문관과 문인들의 저서, 사상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연구하며 조명하는데 반해 행정가나 무인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학계의 문(文)에 편향된 시각이 이 책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무척 반갑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조선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태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학계에서 그치지 않고, 단행본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방송 매체에서 흥미 위주로 사골로 우려내는 '또방원'을 넘어서 '일을 아는 지도자 태종 이방원'에 대한 진면목이 대중화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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