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별책 - 태조·정종·세종실록에서 찾은 태종 이방원 이한우의 태종실록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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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실록》의 이방원 - 몸소 앞장서다.

 

이방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시기가 바로 《태조실록》 시절이다.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조선을 개창하고 이성계가 왕이 되는 굵직한 사건에는 항상 이방원이 있었다. 실록에 이방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시절 가족들을 대피시키면서부터다. 이때 이방원은 가족들을 스스로 호위하면서 "최영은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우리는 무탈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방원이 말한 대로 가족들은 무사했었다.

 

이후 정몽주를 격살하는 일,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문제 등등 굵직한 사건마다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태조실록》을 볼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은 《태조실록》이 이방원의 집권기에 저술됐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객관성을 확보한 기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객관성'을 가질 순 없다. 역사는 과학이 아니니까.

 

《태조실록》에서 가장 주관적으로 기록된 부분은 무인정사, 즉 1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은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을 급습하였고, 궁궐을 장악하여 쿠데타에 성공한다. 문헌에 나온 정도전의 모습은 무척 비굴하다. 그러나 정도전의 저서와 《태조실록》의 여러 부분들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이방원에게 목숨을 애걸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승자의 기록이다. 사관이 아무리 객관적인 기록을 쓴다 하더라도 왕의 치부를 함부로 드러낼 순 없다. 태종은 쿠데타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고, 사관들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지존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기록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무튼 이 시기의 이방원은 얌전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와 같았고, 그랬기에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스승과도 같은 정몽주, 정도전과 갈라섰고 이복형제들을 참살했으며 아버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권을 잡았다.

 

2. 《정종실록》의 세자 이방원 - 지존을 위한 준비 기간

 

 이방원은 치밀했다.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는 결국 왕위 서열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목표인 왕좌가 눈앞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표면적으로는 후퇴하는 것이지만 이보, 삼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종 역시 야심가인 동생의 요구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랬기에 세자 자리에 이방원을 책봉해 스스로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공표했다. 이 시기 조정은 이방원의 사람들로 채워졌고, 권력의 실세는 왕이 아닌 세자였다.

 

 정종시기의 큰 사건으로는 2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이방간의 난과 사병 혁파다. 사병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이방원이기에 군권의 분산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킨 것도 따지고 보면 사병을 혁파하지 않아서였다. 방간의 군사를 진압하면서 방원은 심적으로 많이 착잡했을 것이다. 1차 왕자의 난 때에 죽인 동생들은 배가 달랐지만, 방간은 자신의 동복형제였기 때문이다. 난을 진압한 뒤 방원은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고 사병을 혁파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이방원은 공부에 열중했다는 점이다. 세종이나 성종, 정조와는 다르게 태종은 취임 이후 경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 시기에는 경연에 열중했는데 최고의 제왕학 교제인 《대학연의》를 주로 읽었다. 실록에 나온 태종의 독서 스타일은 무척 독특하다. 세종의 경우 정독을 고집하는데 반해 태종은 핵심과 포인트 위주로 책을 접근했다. 무인 이미지가 강한 태종이지만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문사이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과거에 합격한 이력이 있는 왕은 태종뿐이다. 세종처럼 매일 책을 끼고 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서를 등외시 하진 않았다. 자기가 읽고 싶거나 필요한 책은 꾸준하게 봤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술 논쟁을 할 때에도 밀리지 않았다. 아무튼 공부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방원이 세자 시절에 경연에 열중이고 독서에 집중했다는 사실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3. 《세종실록》의 상왕 이방원 - 세종의 든든한 후견인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세종을 든든하게 후견한다. 이 시기 표면적으로는 세종이 왕이었지만, 실질적인 실권은 태종이 가지고 있었다. 태종은 권력의 핵심인 인사권과 군사권을 놓지 않았고, 세종 역시 모든 정치적 의견은 태종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 시기 중요한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종의 장인 심온의 처결이고 또 하나는 대마도 정벌이다. 어느 것 하나도 세종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일들인데 태종은 아들과 조선을 위해 다시 한번 악역을 자처했다.

 

 심온은 세종이 충녕대군으로 관심을 받을 때부터 교만하게 행동했다. 태종의 심복인 박은이 몇 번 눈치를 줬지만 무시하였다. 박은의 말은 사실상 태종의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심온은 미래권력에 가까운 충녕의 장인이라는 지위를 맹신했다. 이후 사위가 왕으로 책봉되고 교만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새로운 실세 심온에게 관료들은 빌붙기 시작했고 그런 움직임은 외척을 강하게 경계했던 태종의 불안을 사기에 충분했다. 온화한 세종의 성격으로 볼 때 장인인 심온을 강하게 처벌할 순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욕심 많은 장인에게 휘둘려 뜻대로 정사를 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기에 태종은 자신의 아들을 흔들 수 있는 조선 국왕의 권위를 흔들 수 있는 심온을 처결하기로 결심했다.

 

 대마도 정벌도 마찬가지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왜구를 소탕할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군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종이 정벌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마도 정벌의 결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한데 핵심은 이 정벌을 기점으로 왜구들의 소행이 100년 동안 잠잠해졌다는 점이다. 이렇듯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세종과 조선을 위해 힘썼다. 세종의 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했으며, 왜구를 정벌하여 대외적인 위협도 제거했다. 그랬기에 세종은 안정적이고 탄탄한 권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혁신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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