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8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8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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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태종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왕좌에 오른 뒤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 바로 재위 18년이었기 때문이다. 양녕의 일탈 문제로도 머리가 아픈데, 여기에 정점을 찍은 것이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은 태종과 민씨의 막내아들로 유독 부모의 사랑을 극진하게 받은 자식이었다. 성녕의 죽음 앞에 태종은 절규하고 마음과 멘탈의 안정을 위해 개경으로 떠났다.

 

 태종이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때에도 세자인 양녕은 바뀌지 않았다. 성녕이 죽었을 때에는 활쏘기를 하였고, 어리와 관계는 계속되어 아이까지 가졌다. 장인인 김한로는 세자를 위해 어리를 궁으로 보내줬고, 이들의 밀애는 이어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태종은 또다시 격노했다. 세자를 바르게 이끌어야 할 사돈인 김한로가 오히려 세자의 일탈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신하들과 외척에게는 가혹한 태종이었지만 세자 양녕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일탈하는 아들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주변을 내치고 회유하고 타이르는 등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자의 반성은 이어졌고 태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또다시 믿었다. 그러나 세자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어리를 찾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태종은 분노했고, 세자는 어리가 아닌 숙빈을 뵈려고 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태종은 또다시 양녕을 믿었다. 그러나 분노한 양녕은 태종에게 항의성 서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세자 교체의 도화선이 됐다. 양녕의 서신을 압축하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아버지는 숱한 여자를 거느리면서 왜 나 보고만 그러냐, 또 하나는 어리를 잃게 된다면 훗날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미래의 왕은 자신이니 잘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태종은 진노했다. 저를 위해 온갖 악역을 다 맡았건만 돌아온 것은 아들의 협박이었다. 중전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종의 마음은 이미 싸늘했다. '저런 놈을 왕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 기틀을 잡은 조선인데.'

 

 태종은 심복인 박은과 측근들과 모의 끝에 세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양녕을 폐한 뒤 끝내 신료들 앞에서 진심 어린 눈물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앞날은 밝아야 한다. 태종은 충녕을 왕세자에 올린 뒤 얼마 되지 않아 은퇴 선언을 한다. 신료들과 세자는 영문을 모르고 궐 앞에서 양위 불가를 외쳤지만 태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그렇게 그는 18년간 탔던 호랑이 등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흔히 태종을 두고 권력의 화신이라고 이야기한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와 형제에게도 칼을 겨누고 피를 보는 폭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태종은 권력의 화신이었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처단했다. 공신은 물론이요 처가, 사돈까지도 박살 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태종이 왜 그렇게 권력에 집착을 했느냐이다. 사람들은 권력욕이 있다는 것을 사리사욕과 결부 지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권력을 탐한 지도층은 사리사욕과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럼 태종은 어떨까?

 

 그는 권력만을 쫓지 않았다. 권력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강대한 조선이었다. 아버지 이성계가 이룩한 신생국가 조선의 기틀을 다잡기 위해서는 강한 권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랬기에 태종은 옥좌에 오른 이후 이후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사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가 단순하게 권력을 집착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양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은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뒤 재빠르게 양위를 한다. 이 시기 태종의 권력은 막강했다. 나라의 기틀도 다잡았고 신하들도 충성을 다했다. 바꿔 말하면 그가 은퇴를 선언한 시기는 그의 권력이 정점을 향하던 시기였다. 한참 잘나가는 시대에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세간에서 말하듯 태종이 권력만을 탐한 지도자라면 권력의 정점에 퇴임을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태종의 양위는 조선 역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케이스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이름난 조선의 명군들도 양위를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왕에게 있어 세자는 권력의 측면에서 해석했을 때 후계자이기도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조는 공을 이룬 광해군을 질투하여 왕위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뿐일까? 조선 후기의 명군이었던 숙종과 영조도 권력욕을 포기하지 못하고 몸이 상할 때까지 장기집권을 고집했다. 그러나 태종은 가장 강력한 시기에 권력을 아들에게 양도했으며, 스스로 아들의 후견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런 양위 사례는 조선을 통틀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계의 어느 왕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실로 이미 충분하다."

이 말 한마디에 은퇴를 선언한 태종의 진심이 모두 들어 있었다.

 

태종이 왕좌에 오른 것은 조선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태종이 양위를 한 것 역시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양녕을 폐함과 동시에 새로운 국왕인 세종을 뒤에서 후원하려는 의도였다. 충녕은 무척 똑똑하지만 정치는 똑똑하다고 잘하는 것이 아님을 태종은 잘 알고 있었다. 정치는 경험이었고 어린 세종은 노회한 신료들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기에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아들에게 정치를 직접 가르치고자 하였다. 물론 조선의 왕들이 일상적으로 행했던 대리청정 시스템으로 훈육할 수도 있었지만 태종은 실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기에 최고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새로운 조선과 성군 세종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태종의 발 빠른 결정 덕분에 한민족은 세종대왕이라는 귀중한 유산을 가지게 됐다.

 

 태종 이방원. 그의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18년이라는 집권기 내내 그를 관통한 것은 '부강한 조선'이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 왕이 되었으며, 조선을 위해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는 조선을 위해 살았고 조선을 위해 죽었다. 조선을 위해 사사로움을 끊어냈고, 가족, 아들과도 등을 져야 했다. 그가 걸었던 길은 오해도 많고 고단했으며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소명을 잊지 않고 묵묵하게 시대의 악역을 감당했다. 공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 큰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진정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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