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6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6
이한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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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집권기 16년을 요약하자면 '다음 왕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겠다. 태종은 15년까지 수도 이전과 8도 행정 정비, 군사 정비, 노비 문제 등등의 굵직한 사건을 해결하면서 신생 국가의 제도를 탄탄하게 다졌다. 이후 사냥을 수시로 즐기고 술자리를 자주 베푸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과시하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그런 태종이 16년에 집중한 것은 신구세대의 교체를 통해 권신들을 물갈이하고 지난 시대에서 부득이하게 피해를 본 가문들에게 화해를 청한 일이었다.

 

 신구세대의 교체에서 주목할 점은 하륜과 이숙번의 은퇴다. 재위 15년 태종은 자신의 처남이자 외척세력인 민무휼과 민무회를 유배 보내는데 성공한다. 그가 외척을 경계한 이유는 단 하나. 권력의 사유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16년의 시작은 그런 민무휼과 민무회를 자진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 태종의 칼날은 공신들을 향했는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하륜과 이숙번이었다.

 

 눈치 없이 토사구팽 당한 거물급 공신들과 외척들과는 다르게 하륜은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태종의 속내를 잘 읽고 적당하게 일탈을 즐겼다. 태종 입장에서도 하륜은 정권의 핵심 브레인이었고 능력이 탁월했기에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군신으로 맺어졌지만 태종과 하륜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륜은 태종 정권 전반에 걸쳐 권력의 실세인 좌의정을 오래도록 역임했다. 그러나 재위 16년 5월 25일 대대적인 인사 단행이 있었는데 좌의정에 하륜을 물리고 박은을 등용했다. 하륜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태종이 권력구도에 변화를 준다는 의미다. 일선에서 물러난 하륜은 태종에게 밀서를 보내 심온(세종대왕의 장인)과 황희는 소인이라고 등용하지 말 것을 권했다. 이를 본 태종은 하륜에게 실망한다.

 

 하륜은 태종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이점도 태종이 하륜을 경계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시간은 젊은 사람의 편이므로 태종 입장에서는 굳이 자기 손에 피를 묻혀서 내쫓을 필요는 없었다. 똑똑한 하륜도 자신의 영화는 태종 대에서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설사 다음 왕을 모신다 하더라도, 눈치가 백단이기에 서슬 퍼런 태종 앞에서 다음 왕을 뒤흔들려는 경솔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하륜은 11월 6일 눈을 감고 태종 역시도 최고의 예우로 저승길을 배웅해 준다.

 

 그럼 이숙번은 어떨까? 태종 정권의 위기의 순간 이숙번은 늘 태종을 위해 칼을 잡고 앞장섰다. 1,2차 왕자의 난, 그리고 조사의의 난 등등 굵직한 전장에서 빠지지 않았고 그랬기에 태종의 총애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하륜은 문관 출신이었고 유학을 배웠다. 그랬기에 권력의 중심에서도 적당하게 빠지는 법을 알았지만 이숙번은 달랐다. 그는 무관에 가까웠고 유학을 배웠지만 자신의 성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실록에 나오는 그의 행태를 보면 광포하고 무례하다는 말이 대다수다. 그만큼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재위 16년에도 이숙번의 선 넘은 행동은 여전했다. 태종이 신하들과 토의 끝에 내린 결론을 두고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세자에게 이야기한 것은 세자를 위시하여 태종을 무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에도 태종은 이숙번의 행동을 눈감아줬다.

 

이후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두고도 불만을 표출했다. 하륜을 물리고 박은을 좌의정에 임명했다는 소리에 '내 밑에 있던 사람이 정승이 됐구나.'라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이 당시 태종은 가뭄 때문에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가뭄을 두고 태종은 '1,2차 왕자의 난과 아버지 이성계와 싸운 조사의의 난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토로하며 괴로워한다. 아버지, 형제들과 싸워서 왕좌에 오른 심적인 괴로움을 가뭄에 빗대어 표출한 것이다. 이토록 심리적으로 위축된 시기에 공신인 이숙번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급기야 태종은 노골적으로 이숙번을 가리켜 '이런 신하가 있는데 하늘이 어떻게 비를 내리겠는가.'라고 불만을 표출한다. 이후 이숙번은 공신첩을 회수당하고 유배를 떠난다.

 

 태종은 왜 이숙번을 귀양보낸 것일까. 아마도 그가 자신보다 어리고 다혈질이며 광포한 성격이 걱정됐을 것이다. 만약 세자가 이숙번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정권의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륜은 문관이지만 이숙번은 군사를 다룰 수 있는 무인이었다. 게다가 하륜은 눈치가 빠르고 기민하지만 이숙번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붕당을 만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태종은 그런 이숙번을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정치를 모르는 세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계산을 끝낸 태종은 끝내 이숙번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끝낸다. 말이 유배지 사실상 고향에 내려가서 마음 편하게 즐기고 여생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문에는 하륜, 무에는 이숙번을 내친 뒤 차기 정권의 실세로 부각된 인물은 박은이다. 박은은 이전부터 태종의 총애를 입었는데, 태종 6년 명나라 사신이 방문했을 때 신하들의 대부분이 명나라 사신에게 아부를 했지만 박은은 규정에 맞게 접대를 하였다. 그래서 명의 사신은 태종에게 조선의 충신은 박은밖에 없다고 속삭였다. 이후 박은은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주요 행정직을 두루 겸임하고 좌의정에 내정됐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보다도 충성을 검증받은 신하를 실세인 좌의정에 배치한 것은 그만큼 다음 정권에 대한 기반을 탄탄하게 준비하고자 하는 태종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 주목할 부분은 연말에 이방간과 내통한 심종을 교하에 유배 보낸 일이다. 태종은 형인 이방간을 최대한 예우해 줬지만 정치적인 인물을 가까이하는 것은 극도로 예민하게 생각했다. 자신과 칼을 겨눈 형이기에 위험하기도 했고, 새로운 정권을 준비하는 시기에 민감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것을 간과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심종은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의 아우였다. 그렇기에 이들의 접촉은 보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심종을 유배보낸 뒤, 태종은 이방간의 녹권과 직첩을 회수하는데 이는 형에게 정치적인 행동은 보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이렇듯 태종은 여러 인사 조치를 통하여 다음 정권에 대한 준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또한 지난날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했던 정적 정도전의 자손들을 용서했고 금지된 벼슬길을 열어줬다. 나아가 정도전의 손자들에게는 직첩을 내려줬다. 지난날의 시대와 화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를 통하여 악업은 자신의 대에서 끝내겠다는 태종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신하들의 물갈이와 더불어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세자인 양녕과 충녕의 대권 경쟁이다. 16년을 기점으로 충녕의 행보는 한층 대담스러워졌는데 기존의 세종대왕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충녕은 세자에게 여러 가지로 충고를 했는데, 듣는 세자 입장에서도 화가 날 만했다. 옷보단 마음이 먼저라고 일갈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종의 부마인 이백강이 거느렸던 기생을 세자인 양녕이 데려가려고 하자 가족 간에 족보 꼬일 짓은 하지 말자고 말한다. 이때 세자는 무척 화가 나서 충녕을 엄청 미워했다고 하는데 태종 역시도 이런 행동들을 주도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태종은 잔치 때마다 충녕의 총명함을 칭찬하고 세자를 비판한다. 물론 태종이 세자를 눈외에 둔 것은 아니다. 이해 여름을 기점으로 세자는 본격적인 대리청정에 나서는데 이는 태종이 그만큼 양녕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이 시기 태종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자신은 세자를 위한 다음 정부의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는 이런 태종의 노력을 알지 못하고 건성으로 국사에 매진했으며 9월 24일에는 구종수와 이오방과 궁궐 담을 넘어 일탈한 것들이 탄로 난다. 황희의 적극적인 변호와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다. 결국 세자 양녕은 태종 정권의 최후의 걸림돌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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