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 제자백가사상의 집대성
순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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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철학을 다른 말로 '공맹'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공은 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를 뜻하고, 맹은 전국시대에 활약한 맹자를 뜻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활약한 철학자고 맹자는 전국시대에 활약한 철학자다. 즉 맹자는 공자의 유학을 계승했다는 평을 받았는데 이렇게 형성된 학문적 도통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우리가 흔히 유학이라는 철학을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고루하고 따분하며 지나치게 예의 예법을 강조하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실제로 유가는 온고지신, 즉 옛것을 바탕으로 신분에 맞게 학문과 예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도교와 불교와는 다르게 현실지향적, 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정리해 보자면 유학은 과거의 올바른 제도를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를 도덕적으로 교화하며 현실의 부패한 모순점을 개선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옛것을 본받는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개혁하겠다는 점에서는 진보와 맥을 같이한다.

 

 하나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할 때, 전대보다는 후대의 사상이 훨씬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당연한 이치다. 전대에 비해 후대의 사상은 새로운 이론과 합쳐지며 발전하는데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가 하면 내용이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원시유가라고 할 수 있는 공자의 유학과 이를 계승한 맹자의 유가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이질적인 부분도 무척 많다. 공자의 시대인 춘추시대보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의 시대상이 훨씬 각박하고 잔혹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맹자는 공자의 철학을 자신이 처한 각박한 현실에 대입하여, 자기만의 시각으로 유학을 해석했다. 약육강식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유학를 부르짖었으니, 맹자는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가 인과 예를 강조할 때 맹자는 그보다 훨씬 강도가 강한 의를 내세웠다. 또한 공자보다 언어적 수사학도 훨씬 현란했으며 유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단(인-측은지심,의-수오지심, 예-사양지심, 지-시비지심)으로 정의하고 성선설을 적극 주장했다.

 

 여기서 잠깐,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짧게나마 배웠던 한 토막 지식을 떠올려보자. '맹자의 성선설 VS 순자의 성악설'.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이더라도 맹자는 익숙한 반면 순자는 무척 생소하다. 맹자는 인싸 느낌이 가득하고 순자는 비주류 아싸같다. 그래서일까 윤리를 배운 사람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혹은 수능 때문에 순자의 성악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유학의 발전사, 혹은 중국의 철학사에 있어서 순자는 맹자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아니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했던 유학자로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이다. 대부분의 제자백가 서적들이 그렇듯 순자의 저술이라고 전해지는 《순자》는 그의 사상을 제자들이 집대성하고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맹자》와 《순자》의 차이점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을 성선과 선악으로 바라보는 시각차만 존재하는 것일까? 왜 후대의 사람들은 순자가 아닌 맹자를 공자의 적통으로 인정한 것일까?

 

 두 책을 면밀하게 읽어보니 의문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먼저 《맹자》와 《순자》의 공통점은 공자의 유학을 계승했다는 점이다. 순자 역시 맹자와 마찬가지로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당대에 학자로 널리 명성을 쌓고 있었으며 한비와 이사 같은 거물급 인사들의 스승이었다.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지만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같은 철학을 계승했지만 두 사람의 방향은 무척 상이했다. 맹자는 정치적으로 왕도를 고집했고 집착했다. 당대 전국시대에는 약육강식의 패도가 성행하였는데, 맹자는 이런 금수만도 못한 상황을 무척 비판했다. 그래서 왕도 외에 다른 정치제도는 인정하지 않고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맹자》의 어조는 좋게 표현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나쁘게 표현하면 '답정너'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반면 순자는 어떨까? 순자 역시 왕도를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왕도만이 답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패도를 용인할 수 있다는 일말의 여지를 열어놨다. 순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말기는 중원의 기운이 하나로 통일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원을 통일하려는 진(秦)나라와 나머지 나라들의 합종연횡이 지속됐는데, 종횡가와 병가를 배운 인재들이 주군을 위해 모략과 군략을 짜던 시대였다. 맹자는 눈앞에 드러난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굽히지 않았다 이를 좋게 표현하면 '소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나를 세상으로부터 왕따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순자는 유학을 고집했지만, 맹자처럼 막히지 않았다. 돌아가는 사회의 흐름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현실과 유학의 타협점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철학자였다.

 

 《맹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가득하다면, 《순자》는 여러 학파들의 장점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훗날 유자들은 《순자》를 두고 '잡스럽다. 이단이다.'라고 공격했다. 정리해 보자면 맹자는 왕도를 지향하며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명분과 대의를 극도로 강조한다. 반면 순자는 왕도를 지향하되 패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둔다. 최선이 되면 좋겠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맹자와 비교해 볼 때 형이하학적인 성격을 가지며, 명분과 대의도 좋지만 그 이상으로 현실의 가치를 쫓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순자의 현실주의 사상은 제자인 한비와 이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는데, 한비는 순자의 사상을 참고하여 《한비자》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겨서 법가의 사상을 집대성했고, 이사는 진시황에게 등용되어 진나라를 통일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다. (이후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만...)

 

 흔히 유가와 법가는 가장 상반된 철학이라고 생각하는데, 《순자》는 기본적으로 유가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법가가 가진 현실적인 시각과 견해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듯 순자의 노선이 모호하기 때문에 명분론에 입각하여 유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을 정립한 송나라의 주희는 순자보단 맹자를 공자의 적통으로 선택하였다. 주희로 인해 《맹자》는 유학의 교과서인 사서에 편입되었고 공자의 《논어》와 더불어 서책 가운데에 가장 권위가 높은 경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순자》를 등외시한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고려와 조선에서 유행했던 성리학의 영향 덕분에, 조선에서는 현실주의 철학이 꽃 피지 못했는데, 《순자》를 비롯하여 《관자》, 《한비자》, 《상군서》 등등의 양서들이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맹자》가 아닌 《순자》가 널리 보급되었다면, 동아시아의 여러 왕조들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빠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도 《맹자》의 깐깐함보단 《순자》의 융통성이 훨씬 필요하지 않을까. 명분을 지나치게 내세운 성리학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기준으로 맹자와 순자를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인싸가 되진 못하더라도 아싸의 모습은 탈출한 《순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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