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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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태종을 생각할 때, 태종의 잠저 시절(왕이 되기 전)을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집권 시절 태종의 모습은 대강 이해하고, 잠저 시절의 왕자의 난만을 크게 부각한다. 그래서일까 두 번의 왕자의 난은 태종 이방원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태종이라는 인물을 고찰하려면, 잠저 시절도 중요하지만, 집권 시절의 모습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그런 집권 시절의 첫 단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재위 1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재위 1년 때 태종은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정권을 잡았다고 막 나가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즉위는 정통성을 확보하지도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마이웨이를 갔다간 자신을 도와줬던 공신들이 언제 배신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태종의 모습은 《한비자》의 21편 <유로>에서 초 장왕의 이야기를 연상한다. 초나라 장왕은 즉위한 지 3년이 되도록 명령을 내린 적도, 정무를 처리한 적도 없었다. 우사마가 곁에 모시고 왕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새 한 마리가 남쪽 언덕에 멈추어서는 3년 동안 날갯짓도 하지 않고 날지도 않으며 울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있습니다 이 새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장왕은 이렇게 답했다. '3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비상하기 위함이요, 날지 않고 울지도 않은 것은 백성을 살피려는 것이요, 지금은 비록 날지 않아도 한번 날면 반드시 하늘을 가를 것이며 비록 울지 않아도 한 번 울면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 그대는 그만두시오. 나는 이것을 알고 있소.' 반년이 지난 뒤 왕은 정사를 돌봤고, 나라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병사를 일으켜 전쟁에서 승리했고, 천하의 패자가 됐다. 이로 인해 이런 말이 나왔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음성은 잘 들리지 않는다.'

태종의 재위 1년도 이와 같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하지만, 그렇다고 태종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공신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수집하고 있었다. 비록 이때에는 크게 공신들과 다툼이 없었고 침착했지만 군주의 세를 신하가 범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태종이 《한비자》가 주장하는 법, 술, 세에 관한 현실 정치론을 몸소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태종의 정치는 보편적으로 유학을 추구했다. 하지만 태종은 유학적인 내용으로만 정치를 해석하지 않았다. 재위 1년 동안 그가 주로 본 책은 《대학연의》다. 《대학연의》는 유학의 제왕학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리공담으로만 구성된 책은 아니다. 《대학연의》를 이루는 두 가지는 역사와 철학이다. 유학 철학은 이상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역사는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태종은 《대학연의》를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철저하게 현실적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대학연의》에서는 외척에 의해 나라가 전복되는 사례를 두루 고찰하여 '제가의 요체'에 담아 놨었다. 태종은 분명 이를 주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재위 1년 실록에서는 외척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권세를 등에 업고 방자하다는 내용이 1월 1일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태종의 생각을 의미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결국 태종이 훗날 외척을 배척하게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태종이 성급하게 처리했던 변남룡 부자의 사형 에피소드도 《정관정요》 권 8 민생론에 나오는 '장온고 사건'을 연상한다. 《정관정요》에 따르면 당 태종 이세민은 장온고를 성급하게 사형한 뒤 후회하며, 사형을 처리할 때 다섯 차례에 걸쳐 거듭 심리하고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태종의 사례도 거의 비슷하다. 변남룡 부자를 성급하게 죽인 태종은 언관의 상소를 받는데 상소의 내용은 사형을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태종은 깊이 있게 반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태종은 매사에 신중에 신중을 가하며 국사를 이끌어갔다.
 
결과적으로 재위 1년의 태종은 자신의 힘을 주기적으로 과시하며 신하들을 억누르는 폭군의 이미지가 아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해 볼 때, 이때의 태종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과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는 태종이 풀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명과의 대외 외교, 시국의 안정, 새로운 정치 구상, 공신들 파악, 아버지와의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 등등 이러한 일을 한꺼번에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지 않고 침착하게 국정에 임한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드라마 '용의 눈물'을 봤다. 재위를 이어받은 태종은 상왕인 정종에게도, 태상왕인 태조에게도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유동근 특유의 울림 화법은 태종을 강경하게 묘사하는데 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드라마의 허구였다. 앞서 고찰했듯 실제 재위 1년의 태종은 이렇게 '막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신중하고 공경을 다해 태상왕과 상왕을 모셨다. 태상왕에게 무시를 당해도, 그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오늘날 태종의 폭군 이미지는 드라마 '용의 눈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역사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정통 사극도 역사적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고찰하려면 내려오는 역사적 문헌을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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