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김용만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사람에게 고구려는 늘 아쉬움과 선망의 대상이다. 한반도 역사는 5000년의 유구함을 지녔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단점이 있다.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는 대체적으로 직간접적인 중원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타율성이 많은 역사를 가졌기에 우리는 그나마 우리 역사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했던 고구려에 대해 선망과 동경을 가졌다. 특히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은 한반도 국가가 요동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한 흔치않은 사례였기에 오늘날 광개토태왕은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긴다. 이런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에 멸망당했기에, 몇몇은 강성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고구려라는 나라는 이렇듯 우리에게 있어 자부심과 아쉬움으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뜬금없는 의문을 제기해보자면 단지 고구려가 영토가 넓었기에 오늘날 우리 민족이 동경하는 것일까? 고구려를 지탱하던 자율성은 순진한 정복욕의 산물일 것인가? 고구려의 영토는 과거 한반도에 위치했던 국가 중 가장 드넓은 영토를 가진 대국이었다. 그들은 왜 이런 정복전쟁을 추구했던 것일까? 중국의 역사에서 막강한 대국을 일궜던 군주들의 공통점을 하나 꼽자면 바로 '중화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무제, 당태종, 명의 영락제, 청의 강희제 등등의 명군들은 중원의 내부를 다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화의 범위를 중원 밖으로 확장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을 움직인 이데올로기 '중화사상'은 중원의 천자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서 지배하는 것을 유학적으로 정리한 사상이다. 중원으로부터 멀리 있는 오랑캐는 예의와 문화로 교화시키되 중원에 위치한 천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군대로 토벌하여 중화 문화권의 이데올로기를 받들도록 권했다. 단순하게 표현해보면 '내가 짱인데 날 받들지 않으면 토벌해버린다.'라는 뜻이다. 중원의 야심찬 군주들은 자신들의 정복욕을 고상한 중화의 철학을 빌려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야심이 먼저인지 중화사상 때문에 정복전쟁을 시행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중요한 사실은 중원 패권국의 팽창정책은 근본적으로 중화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놀랍게도 고구려에도 중원에서 유행했던 '중화사상'과 같은 관념이 존재했다. 바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손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떠받드는 속주 국가들을 설정했다. 이러한 속주 국가들의 범위는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말갈과 거란과 같은 여러 유목민들이 포함됐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제국이 추구했던 '중화사상'과 비슷한 '천하관'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고구려는 한반도 국가에 존재했었던 제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한반도에 제국은 고구려 밖에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고구려 이전에 제국의 풍모를 갖춘 것은 백제였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자신을 맹주로 하여 왜와 가야를 포섭한 연합 세력을 구축하였다. 근초고왕은 이런 연합 제후국의 맹주였으며, 이러한 연합군을 통해 신라와 고구려를 견제했었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만들어 놓은 백제 중심의 연합 시스템은 광개토태왕의 천하관에 의해 박살 나고, 백제와 신라 가야는 한동안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광개토태왕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이유는 단순히 영토를 넓혔다는 것을 넘어 고구려가 주체가 되어 천하를 경영한다는 정신을 구현했다는 점이 클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인 고구려의 사상은 일제 치하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에게도 커다란 영감을 줬다.

  그러나 고구려의 천하관은 중국의 중화사상과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중국의 중화사상과는 다르게, 자신의 영향을 벗어난 지역의 제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즉 내 주변국들 사이에서는 내가 실력자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역의 실력자는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중원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중화사상은 이러한 다원적 제국의 존재를 부정했다. 천하는 유일한 중원의 천자의 것이다. 자신들 이외에 다른 제국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사소한 철학의 충돌은 결국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표출됐다. 수나라 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침공, 그리고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공이다.

  연개소문은 당태종 이세민의 침공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그는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이세민을 두 번이나 크게 이겼지만, 결국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사후 당나라에 멸망됐다. 그래서 전해오는 역사적 사료는 승자인 당나라의 기록이 대다수이기에 연개소문에 대해 매우 불리한 기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책은 그런 연개소문을 고찰한 역사서인데, 사실 연개소문에 집중한 평전이라기보다 고당 전쟁에 집중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반역 소식을 듣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결심했다. 당나라의 서쪽 토번을 정벌한 이세민은 기세를 몰아 수나라도 공략하지 못했던 동쪽의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역사서에서 그는 명군으로 칭송받는 군주지만,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사서에 자신의 이름과 공적을 남기기 위해 과도한 정복전쟁을 추구한 전쟁광이기도 하였다. 특히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중원의 정복군주는 중화사상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는데, 그렇기에 이세민에게 있어 고구려는 평생의 숙원을 이룩하고 자신의 공업을 드높이는 데 있어 가장 안성맞춤의 먹잇감이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자존감이 높은 국가이므로, 유일무이한 제국을 꿈꾸는 이세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높은 콧대가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서토를 개척했다는 자신감, 수나라도 정복하지 못했던 나라, 당나라가 주도하는 중화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자존심 높은 나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고구려의 정벌로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남기려는 허망된 야망. 그렇기에 이세민에게 있어 고구려의 정벌은 연개소문의 정변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예견된 사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연개소문은 그런 당태종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외교적으로 신흥 강국 당의 눈치를 보는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자주성, 고구려의 천하관을 고수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신흥 제국 당나라와 전통적인 동방의 제국 고구려는 그렇게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국가와 국가의 싸움을 넘어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며, 사상과 사상의 충돌이었다. 그렇게 독자적인 두 세계관을 지닌 문명은 서로 격돌했다.

 1,2차 전쟁의 흐름은 당의 공격과 고구려의 수비로 전개됐다. 당은 압도적인 군대를 동원하여 1차는 육로 중심으로 2차는 해로 중심으로 침공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적절한 전략으로 막았다. 전쟁의 최종 승자는 고구려였지만, 국력의 회복에 있어서는 고구려는 당나라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자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기에 물자와 생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전쟁 이후 복구에 있어서도 고구려보다 당이 훨씬 유리했다. 이는 국력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였다. 게다가 당은 1,2차 전쟁 직후 고구려의 동맹이라 할 수 있는 거란과 백제 세력을 제압하여 고구려를 고립시켰다. 고구려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뽐내던 연개소문이 있을 때에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가 죽자, 내분으로 인해 와해됐고 결국 3차 나당전쟁 때 신라와 당군의 연합군에 멸망당했다. 

 연개소문의 평가는 시대를 걸쳐 다양하게 나타났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유교적 사대주의 관념으로 연개소문을 군주를 죽여 반란을 일으킨 것에 입각하여 혹평했지만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구한말 일제 치하에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와 박은식은 연개소문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영웅으로 추앙하고, 그런 그의 기상을 본받아 독립을 이루자고 주장했다. 이렇듯 연개소문의 평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극과 극으로 평가됐다. 우리나라의 고대 영웅의 평가는 대체로 극과 극으로 치닫는데 연개소문 역시도 그렇다.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는 연개소문의 본모습을 알아가는 데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해 극단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무리하게 주장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나 의미를 과장, 확대해석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박은식과 신채호도 연개소문의 자주성을 과도하게 주장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무리하게 왜곡했다. 민족자존을 우선시하기 위해서 연개소문의 해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였고, 이러한 의미 부여는 오늘날 냉정하게 평가해볼 때 왜곡의 단초로 볼 수 있다. 고대의 영웅은 현전하는 사료가 부족하기에, 자의적인 견해를 곁들여 해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자의적 해석은 전하는 사료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책을 읽으며 연개소문의 장단점을 평해보자면, 일단 가장 큰 장점은 고구려의 천하관과 자존감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는 정권을 잡으면서 신생 대국 당나라의 중화사상으로부터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국력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당나라의 대군을 막아서 승리했다는 것 역시 큰 의의가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연개소문의 이미지는 호탕함인데, 책에 나온 연개소문의 행적으로 봐서, 아마 실제적인 연개소문의 성격 역시도 호탕하고 대범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그는 개인적 카리스마가 뛰어난 인물이었고, 그런 카리스마를 통하여 고구려의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지도력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점을 꼽아보자면 외교 능력, 그리고 첩보의 아쉬움, 후계자 선정, 전쟁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의 부재, 고구려의 행정 개혁의 필요성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가장 꼽고 싶은 부분은 거시적인 관점이다. 1,2차 고당 전쟁의 승자는 분명 고구려지만, 사실 이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었다. 당은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고 패전했지만, 패전 이후에도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외교적으로 군사적인 모략을 계속해서 감행했다. 당은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고구려에 속한 이민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고구려의 우방인 백제를 단숨에 몰락시켜서 고구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물론 고구려는 자국의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졌기에, 국토 피해가 극심하여 복구하는데 모든 신경을 쏟아붓느라 외교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외교적인 대응은 아쉽다. 물론 고구려가 나름 거란의 지배권을 당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중원의 여러 외곽 민족들에게 사신을 보내 당과의 전쟁을 독촉했다지만, 이미 당시의 흐름은 당이 주도하는 중화 이데올로기가 대세였기에 적극적이지 않은 고구려의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당의 노력 때문에 전쟁에서는 이겼더라도, 시대의 대세는 고구려보단 당의 우위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아쉬웠던 점은 연개소문의 정권 초반에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를 견제해달라고 사신으로 왔을 때 강압적으로 나가고 백제와 동맹을 맺은 부분이다. 물론 연개소문의 계산에는 당시 백제가 신라보다 강하며, 무엇보다 백제는 왜국과 긴밀한 관계이기에 백제와 손을 잡으면 왜나라와 통할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하여 백제를 선택했겠지만, 차라리 백제와 신라 양국과 동맹을 맺어서, 남방에 싸움에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고 방관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신라가 당에 붙은 주요한 원인은 바로 고립이다. 동쪽의 왜, 서쪽의 백제 그리고 북쪽의 고구려로부터 고립된 신라는 어쩔 수 없이 대국인 당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시종일관 신라와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과도한 자만감에 사로잡혀 결국 나당 연합군에 허무하게 멸망당했다. 만약 백제를 선택할 것이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백제와 함께 신라를 압박하여 멸망시켜서 후방을 안정화시켰다면 고당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백제의 몰락은 결국 고구려의 몰락과도 직결된다. 사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백제가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고구려가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백제는 순식간에 몰락했으니 말이다. 고구려는 백제 부흥을 위해 왜에 도움을 요청하고 군사를 파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는데,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려는 것처럼 비친다. 애초에 백제와 신라 중 백제를 선택했으면 백제를 도와 신라를 멸하는데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게 아니면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각자 싸우도록 하고 고구려는 방관자의 입장으로 주시하되 주전력은 북쪽 당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백제는 신라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였기에 양국은 원수지간으로 돌변한 상황이니, 두 나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할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첩보가 뛰어난 국가다.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연개소문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바로 뛰어난 첩보 덕분이고, 당은 이런 고구려의 첩보를 의식해서 비밀 군령을 암호로 전달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첩보는 한계를 가지기도 했는데, 1차 나당전쟁 이후 연개소문은 요동과 요하 지역의 성곽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2차 나당전쟁 때 대규모 선박을 통하여 해상 상륙작전으로 평양 침공을 감행했다. 이를 고구려 첩자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더불어 당과 신라가 공통으로 백제를 멸하려는 계획을 고구려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고구려의 가장 직접적인 몰락의 원인은 바로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다. 연개소문과 달리 그 아들들은 연개소문과 같이 비범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으며 서로 반목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예견하지 않고 아들들에게 권력을 배분했고, 이러한 조치는 권력 독점을 위한 내전의 원인이 됐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능력 없는 아들들을 요직에 올린 연개소문의 인사 정책에서 비롯했다. 행정 정비의 개혁도 아쉬운 부분이다.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당과 대응한 연개소문은 군사적인 부분에 집중적으로 노력했다. 이에 반해 신생 제국인 당나라는 제도적인 체제 개혁과 내정 정비를 통해 정치 제도를 정비했다. 고구려의 행정 시스템은 신생국 당나라의 행정 시스템에 비해 역동적이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제도였다. 연개소문은 이런 근본적인 시스템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군사적인 침공에만 집중했으니, 이 역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쓰고 나니 연개소문의 단점이 두드러지는 것 같지만, 그가 지키려고 했던 고구려의 자존감은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한다. 고구려의 몰락은 허무하지 않았다. 물론 연개소문의 후계자들의 정쟁으로 무너졌지만 무너지는 순간에도 제국의 풍모를 고수했다. 백제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도 않았고, 신라처럼 줏대 없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고구려는 무너지더라도 고구려답게, 자존감 있게 무너졌다. 이는 연개소문의 분투 때문이다. 그는 사라져가는 제국 고구려의 자존을 마지막으로 불태운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영류왕을 시해하지 않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의 인식에 자랑스러운 고구려가 없을지도 모른다. 영류왕이 추구했던 고구려는 고구려만의 천하관을 강조한 제국이 아니라, 당의 세계에 타협하는 제후국이었으니까. 그렇게 역사가 흘러갔다면, 어쩌면 우리가 당에 붙은 신라를 두고두고 비판하는 것처럼 고구려 역시도 그런 비판의 도마에 올랐을 지도 모르겠다. 여러 한계와 비판의 요소가 있지만 어쨌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자존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적한 단점들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차보인다. 그래서 그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뤄져서 고독한 색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연개소문의 삶과 고구려의 몰락을 읽으며 느낀 점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주장할 수 있는 배경은 바로 국력에 있었다. 당나라의 팽창 중화주의에 연개소문이 맞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있었지만, 이런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힘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의 결과였다. 이런 고구려의 입장은 삼국을 부분적으로 통일한 신라와 크게 비교된다. 신라는 스스로 저자세를 취하여 당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당나라의 중화주의 세계관에 편입하여 국가의 실리를 챙겨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런 신라의 통일을 비난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날 21세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은 자존감을 지키는 사람보다 실리적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질적 이득 앞에서는 나의 자존을 한 수 접고 이득을 취하는 것이 보편적인 오늘날의 모습이다. 이런 오늘날 고구려의 자존감 있는 몰락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싶다. 평범한 소시민들은 자존감보다 순간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특정한 위치에 있고, 자신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욕보다는 그보다 한층 더 나아간 가치를 고수하기 위하여 사익을 내려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신라는 스스로 중심이 되어 제후국을 거느리거나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와 의식 자체가 달랐다. 스스로를 제국으로 인식했고, 그렇기에 으스러지는 순간까지도 제국의 풍모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고구려는 신라보다 스스로 대국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대국이니까 대국의 걸맞게 자존감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후손인 우리는 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자존심으로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라와 고구려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일반 소시민이 아닌 좀 더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더 큰 꿈을 가진 사람들은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는 더 큰 가치, 그리고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대의를 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도, 집단에게도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물론 이러한 삶을 사회지도층에게 무조건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자발적인 인식을 통하여 행하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들에게도 인생에 있어 자유로울 권리고 있고, 사회지도층이라고 해서 밑의 계층들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이 있어야 한단 시각 자체도 나는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고구려의 멸망, 그리고 연개소문이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를 통해 읽은 교훈의 핵심이다. 그 외에 독자적인 자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직이든 개인이든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끊임없는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겠다. 구시대 체제를 고수하던 고구려의 행정은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기에 너무나도 뒤떨어졌다.

  책은 잘 읽히는 편이지만, 편집이 조금 조잡해 보이기도 했다. 전문적인 내용은 챕터의 뒤나 책의 말미에 배치하여서 본문 가독성을 높이려고 한 것 같은데, 내 개인적으로는 너무 산만했다. 그냥 서사적 흐름에 따라 전문적인 내용도 편집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본문 내용은 잘 읽히는 편이었으며, 사료에 대한 비판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일본서기》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해석한 부분이 신선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서기》를 왜나라 시각으로 집필한 사서라 폄하하는데, 물론 자문화 중심주의적인 내용이 많고 왜곡도 많지만 그러한 왜곡의 바탕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대사를 해석할 때 주교재로 참고해야 할 도서라고 생각한다. 연개소문 집권 당시 고구려는 왜와 굉장히 긴밀한 관계였고 우방이었으므로, 적국인 중국 측 사료보다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을 가능성도 높다.

  사실 우리나라의 고대사 기록은 미비하기 짝이 없고 기껏해야 《삼국사기》가 독보적인 사서로 권위를 인정받는데, 이런 《삼국사기》 역시 신라 중심적, 그리고 사대주의적 사고, 중국 측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기록한 내용이 많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역시 자의적인 해석과 왜곡으로부터 피할 수가 없다. 모든 역사란 기록은 기본적으로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 특히 고대의 관찬 사료는 자국이나 정치적 입장에 의해 왜곡하여 기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는 중국의 명저인 《사기》와 《자치통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일본서기》 역시도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고대사를 비교적 자세하게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검토해야 할 주요 텍스트로 여겨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고대사를 고찰하려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넘어 왜나라의 활동까지도 검토해야지 한반도의 고대사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앙숙의 관계지만, 그런 것을 떠나 한일 고대사는 서로 너무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있으므로 양국의 고대사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면 두 나라의 역사를 면밀하게 비교 분석해야만 한다. 왜는 백제나 가야에 의해 굵직한 사건 때마다  한반도에 파견됐고 활동했던 세력이다. 괜히 《일본서기》에 섬나라 역사 이외에 옆 나라 반도의 동태를 기록했겠는가. 아무튼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은 중국의 사료와 우리 측 사료 그리고 일본의 《일본서기》까지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해석하고 있는데, 전하는 사료가 워낙 소략하여 사료 간의 공백에 있어 저자의 주관성 깊이 들어있기에, 사람에 따라 저자의 해석에 딴죽을 걸 수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저자는 전해지는 사료를 해석 함에 있어 나름의 합리적인 면을 확보하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신화와 극단적 편견으로 가득한 연개소문의 역사적 모습을 책을 통해 탐구할 수 있었다는데 이번 독서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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