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을 고백하다 백제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의 재발견 1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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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료라고 불리는 텍스트와 그 사료를 검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다. 그렇기에 고대사는 늘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해오는 것들이 적은 데다 전해지는 것들 역시도 매우 부분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인 고려와 근세인 조선의 경우 전해지는 유물과 기록이 많은 반면, 그전의 고대 시대는 유물도 적고 기록 역시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삼국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은 신라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통일 왕조로 한동안 있었기에 다른 두 국가에 비해 전해져오는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전해져 오는 것들도 드물고 사료도 매우 파편적이다. 백제와 고구려 중 그래도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고구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라는 불굴의 영웅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국가 중 광개토태왕만큼 영토를 넓힌 나라는 없었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늘 대륙 중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은 이런 중국이 분열된 시기를 틈타 북방으로 영토를 개척했다. 그랬기에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정복을 통하여 '을로써 지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아픔'을 삭히곤 했다. 광개토태왕은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 늘 선망의 영웅이었다.

삼국 중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적은 국가는 백제다. 물론 백제는 문화가 뛰어나서 지식인들 중에는 백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반 대중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백제는 확실히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시험 문제에 단골로 나오는 삼국의 전성기 -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6세기 신라의 진흥왕 -를 빼고는 도통 가깝게 와닿지 않는다. 책은 이렇게 생소한 백제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 책은 백제의 역사를 통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업적을 이룬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다. 다루고 있는 인물은 두 사람, 첫 번째는 백제의 영향력을 최대로 높였다는 정복군주 근초고왕과, 두 번째로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성왕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근초고왕을 고백하다'이지만 근초고왕의 파트보다 성왕의 파트가 분량이 좀 더 많았다.

백제는 가야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 있어 수수께끼와도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워낙 전해지는 사료가 미약하고, 그나마 전해지는 사료 역시도 백제에 대해 매우 불리한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백제의 진면목을 오늘날 밝히기에는 매우 어렵다. 현전해는 사료 중 백제에 대한 사료로 취급하는 것은 바로 두 가지 텍스트인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다. 《삼국사기》야 그렇다 쳐도 《일본서기》는 왜곡투성이의 일본 기록인데 이게 과연 백제의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따지면 《삼국사기》 역시도 매우 편향적인 역사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대표적인 신라계 인물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친신라적인 사관을 《삼국사기》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잘 읽어보면 신라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고, 고구려, 백제 순으로 점점 기록이 미비해진다. 《삼국사기》 역시 백제사를 왜곡과 폄하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므로 양 사서에 편향된 기록을 걷어내고 비판적인 눈으로 독해해야지 온전한 백제에 다가갈 수 있다.

근초고왕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제의 주적인 고구려에 대항하여, 남방 세력을 평정했다는 점이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방 경략에 힘을 썼는데, 마한 세력을 제압하고, 가야 연맹을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으며, 왜 역시 이런 연합 세력에 편입시켰다. 백제는 왜를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했고, 왜는 가야 연맹에 임나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활동 영역을 보장받았다. 백제는 임나를 통하여 가야 세력과 왜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즉 백제를 중심으로 한 남방 연합군이 형성됐다. 근초고왕이 이룬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이 바로 이 연합 세력의 구축이었다. 근초고왕이 이룩한 이 남방 연합은 결국 광개토태왕의 남방 정벌로 인해 무산된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구원함과 동시에 남방 연맹의 핵심 거점인 가야 즉 임나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임나의 중심이었던 금관가야는 패권을 잃고 만다.

백제의 성왕은 근초고왕이 이룩했던 남방의 맹주 자리를 다시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군주다.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성왕은 잔존한 가야 세력과 왜 그리고 신라까지 연결한 거대 연맹국을 창설해 백제가 조종하려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 왜나라는 백제의 이런 움직임을 불편하게 여겼다. 설상가상으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하자 백제는 강압적인 정책으로 나머지 가야 세력과 왜국을 독촉했고 결국 백제 중심의 남방 연합군을 다시 설립했다. 이러한 전략으로 백제는 한강 탈환을 감행했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성왕은 전사했고, 백제는 어렵게 이룩한 남방 연합군의 맹주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은 연합 맹주를 주도하던 백제의 모습이다. 백제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먹기 전까지 한반도 남방의 외교와 정치를 주도했던 강대국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 앞에서 백제의 지도자들은 매우 탄력적인 모습으로 외교를 감행했다. 오늘날 생각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민족적 개념으로 이 시기를 해석해버리면 당시의 시대를 정확하게 조망할 수 없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이였다. 백제의 최대 주적은 신라도 아니고 가야도 아닌 고구려였다. 고구려 역시 남쪽에서 사사건건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제를 곱게 보지 않았다. 양국은 서로의 군주를 참살했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던 사이다. 백제는 이런 고구려에 맞서 가야와 왜를 이용한 연합 세력을 구축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자면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일본인에게 도움을 청한 백제가 매국노처럼 보이겠지만 당시 백제에 있어 고구려는 그저 물리쳐야 할 적일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신라가 통일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이런 관념 역시도 근현대 시대에 형성된 민족관에서 비롯했다. 당시 신라에게 고구려나 백제는 같은 민족이 아닌 적국일 뿐이었다.

책을 보며 새삼 느낀 것은 국제 관계의 본질은 역시 힘에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힘이 결여되면 관계 역시도 비틀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나라와 나라 간에 행하는 외교는 본질적으로, 자연계의 약육강식과 매우 닮았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백제 중심의 남방 연합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이를 힘으로 깨부쉈고, 공고할 것만 같았던 남방의 연합세력은 바로 와해됐다. 왜는 백제로부터 문화적인 유산을 제공받는 입장이라 꾸준하게 백제를 우대했지만, 가야는 광개토태왕의 정벌 이후 바로 백제와 연을 끊어버렸다. 고구려가 이토록 강대해지자, 고구려의 속국인 신라는 자주를 외치며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와 맞섰다. 굳건한 나제동맹이 이뤄졌지만 결국 성왕 때 가야 세력을 포섭하는 문제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문제에서 신라는 백제를 배신했다. 그러므로 고대왕국 시대에 나라와 나라의 외교관계는 본질적으로 의리나 명분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았다.

또한 흔히 우리는 고조선과 연맹왕국 시기를 거쳐 삼국시대로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편견인 듯싶다. 나는 이 시기를 오국시대로 정의해야 한다고 본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남북의 형세로 싸우고 있었으며, 신라와 가야가 자국의 이익에 맞게 눈치껏 고구려와 백제에 편을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라 왜 역시 한반도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왜는 본질적으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백제의 입장을 끝까지 지지하여서 신라와 가야처럼 가변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한반도 자체에 위치한 국가는 아니지만, 한반도 세력이 격돌할 때 왜군은 늘 파견되었고 백제군과 함께 싸웠다. 그러므로 왜 역시 우리의 고대사를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고대사도 한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는 이런 지원을 통해 문화적인 혜택을 백제로부터 누렸다. 이러한 한반도 도래 문화를 바탕으로 왜는 나라와 교토에서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양국의 고대사는 서로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다. 따라서 한국의 고대사와 일본의 고대사는 하나로 연결됐고, 하나라는 시각으로 바라봐야지 편협한 오류와 편견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천황을 노골적으로 높이는 목적 하에 저술된 책이지만, 한반도의 세력 판도와 한반도에서 파견됐던 왜국 군대의 동향 등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봤을 때 기록들을 모두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자문화 중심주의적 허구와 과장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인 독해를 한다면 허구 속의 진실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밝히는 것이 사학자 본연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근초고왕과 대륙 백제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책에서는 대륙 백제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대륙 백제란 백제가 중국의 동쪽 지역을 자국화하여 통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과연 대륙 백제는 존재했을까? 당시 근초고왕은 국가 팽창정책을 내세웠고 남방 경략을 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왕을 쓰러트리는 등의 활동을 보여줬으니 분명 바다에서도 왕성한 경제정책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치적으로도 중국 동쪽 지역을 장악했을까? 의문이 든다. 경제적인 영향력이 무조건 정치적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중국 대륙 안에 백제가 거점을 마련하고 영토화했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백제가 중국의 동쪽 영토를 자국화하고 유지할 수 있는 국력이 있었을까? 아무리 중국 대륙이 혼란스럽더라도 먼 바다 건너에 영토를 확장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자금과 비용, 힘이 있었을까? 당시 근초고왕 시대 백제의 가장 큰 사업은 대륙 백제의 확장이 아닌 한반도 세력 내에서 북방 고구려의 세력에 대비하여 남방 세력권의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가야와 왜를 연결하는 거대 연맹체를 만들고, 또 백제 내부에서도 전남 지역의 마한 세력들을 복속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 이런 시기에 과연 바다 건너 중국 본토에 영토를 마련할 여유가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너무 앞뒤가 안 맞는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정복이라는 것은 본토와 가까운 지역부터 정벌을 마친 뒤에야, 외부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 바로 밑에 마한 세력도 통합하지 않았는데, 바다 건너 대륙에 영토를 신경 쓴다?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따라서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근초고왕 시기에 분명 서해를 통해 중국 대륙과 경제적인 교류는 매우 활발했을 것이고, 서해의 장악력 역시 백제가 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서해와 중국 동쪽 지역에 있어서 경제적인 주도권은 백제가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영향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신선하고 비판적인 해석이 눈에 들어왔다. 잊었던 백제의 영웅들을 복원하는 것은 매우 한계가 있는 작업이지만, 그런 한계 속에서도 과거의 자취를 복원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소명이다. 저자는 복잡한 자신의 의견을 평이한 서술로 알기 쉽게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래서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백제 군주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의 후속작인 《의자왕을 고백하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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