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 전면개정판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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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어》의 한자는 國語를 사용하는데 얼핏 보면 '나라의 문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國語라는 한자는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나라의 문자인 '국어'와 같은 한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어》에서 사용된  語는 문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렇기에 나라의 이야기 즉 나라의 역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럼 무슨 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책은 중국 춘추시대의 다양한 나라들을 나라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국어》의 제목을 풀어내보자면 '춘추시대 국가의 다양한 역사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춘추 시대를 다루고 있는 《춘추좌전》과 《국어》은 상호보완적 관계로 읽을 수 있는 역사서다. 두 사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편집이다. 《춘추좌전》은 노나라 역사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의 상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인데 반해, 《국어》는 특정한 국가의 시각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나라별로 나눠서 역사를 기록한 '국별체' 역사서다.또한 두 사서는 내용에서도 차이점이 두드러지는데, 《춘추좌전》은 사건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조리 있게 정리하여 평가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국어》의 서술은 역사적 인물과 인물 간의 대화체로 구성됐다. 그렇기에 《국어》의 서술은 《춘추좌전》에 비해 좀 더 가치중립을 확보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이며,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이 두드러진다.

그럼 이런 《국어》라는 고전의 주제는 무엇일까? 왜 저자는 춘추시대의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를 정리하여 《국어》라는 고전을 남겼던 것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는 데 《국어》의 저술 동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국사에서 춘추시대는 시기적으로 매우 과도기적인 시대다. 춘추시대의 전후를 살펴보자면 앞에는 서주시대가, 춘추시대의 뒤에는 전국시대가 위치한다. 서주시대의 특징은 바로 봉건제의 완성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황제와 인척 관계의 인물들을 주변 제후국으로 파견하여 황제의 나라를 보필하는 시스템이 바로 봉건제인데, 이러한 시스템을 주나라가 확립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황제 주변의 제후국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 패권국이 국제 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즉 명목상으로는 주나라 황실을 우대했지만 실제적인 실권은 힘 있는 제후국이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춘추시대에 들어 생기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제후국들의 패권주의는 극에 달하고, 주나라 황실은 아무런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봉건제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만 남은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다. 춘추시대는 이런 봉건제 시스템과 제후국들의 약육강식 패권주의가 공존한 과도기적 시대였다. 《국어》의 저자는 이런 시기에서 각 나라들의 동향을 국가별로 자세히 기록했고 그 기록한 문헌이 바로 《국어》라는 역사 고전이다.

그럼 《국어》의 핵심 주제인 중원의 패권은 누가 가졌고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흔히들 춘추시대에는 오패 즉 다섯 명의 패자가 군림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오패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손에 꼽는 인물은 총 8명이다. 먼저 제나라의 제환공, 송나라의 송양공, 진(晉)나라의 진문공, 진(秦)나라의 진목공, 초나라의 초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등이다.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은 송양공과 진목공이다. 송양공은 다른 패자들이 힘과 실력으로 나라를 이끌었을 때, 그는 인의와 예의를 내세워 주변국의 신망을 얻었다. 그의 드높은 인의는 많은 존경을 샀지만 반대로 너무 인의와 예의에 얽매여 전쟁과 현실 정치에서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런 송양공을 칭송하여 오패의 하나로 간주하기도 하였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송양공에게 패자의 칭호를 붙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실제로 《국어》에서도 송나라를 다룬 챕터는 없었다. 

 진목공은 진(秦)나라를 중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에 진나라는 두 국가가 있었는데 하나는 진문공의 진(晉)나라고 하나는 진목공의 진(秦)나라다. 진(晉)나라는 전국시대에 세 개의 나라로 쪼개지지만, 진(秦)나라는 결국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성장한다. 유명한 진시황도 진(秦)나라 출신이다. 아무튼 춘추시대 때 진(秦)나라는 서쪽 변방에 위치한 약소국이었다. 문공은 이런 진(秦)나라를 성장시켰고, 나름 중국의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정적인 전투에 패배한 뒤, 방향을 바꿔 서쪽의 융족들을 토벌하여 세력을 넓혔다. 패자라는 칭호는 당시 중국의 중앙 정치와 제후국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군주들이 칭했던 칭호다. 그러므로 진목공은 뛰어난 중흥 군주였지만 중국의 패자라고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국어》에도 진(秦)나라에 대한 챕터가 없다.

그럼 《국어》의 내용을 바탕으로 춘추오패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나라의 제환공, 진(晉)나라의 진문공, 초나라의 초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여기서 오나라에는 두 부자인 합려와 부차를 거론했는데, 사실상 두 부자는 오나라의 패권주의를 달성하는데 있어 연장선에 있는 인물이므로 하나로 묶어도 될 듯하다. 이렇게 정하고 보면 중국의 패권이 이동하는 방향이 매우 이채롭다. 제나라와 진나라는 전형적인 북방 문화권, 화하 문화권인데 반해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남쪽 변방에 위치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춘추시대의 패권전쟁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전됐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북방에서 남방으로 패권이 이전되면서,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봉건제의 질서는 더더욱 무너져갔다. 단적인 예로 제나라와 진나라가 패자를 자처할 당시에는 군주들의 호칭이 공이었지만, 남방의 초나라를 필두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원래 군주들의 호칭은 천자인 주나라 황제만이 부여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나 초나라가 패자를 자처할 때부터 힘 있는 국가들은 자신들을 왕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봉건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자에 있던 시대에는 기존의 봉건질서를 무조건적으로 무시하지 않았다. 패권국은 힘이 있었지만 약소국과 외교를 할 때 공정한 입장에서 외교를 진행하는 등, 나름의 봉건질서와 규율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명분만 남은 주나라 황실을 우대하려고 나름 노력했었다. 그러나 패권이 남방으로 이전되면서, 이런 봉건적 질서와 규율은 급격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봉건질서가 무너진 전국시대가 도래한 배경에는 이런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춘추시대를 정리해보자면 봉건적 이상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적 패권주의에 입각한 정치활동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군주들은 이런 이상과 현실 속에서 정치를 했으며, 지식인층도 이런 이상과 현실을 대표하는 학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봉건제를 옹호하고 과거의 예의를 바로잡으며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학파는 유가 학파였고, 현실을 앞세우고 대표했던 학파는 병가와 법가 학파였다. 이렇듯 춘추시대에는 정치와 사회를 둘러싸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조화가 나타났던 시대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을 강조하던 유가 학파와 봉건주의 옹호자들보다 현실을 강조하던 병가, 법가 학파와 패권주의 옹호자들이 강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춘추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봉건주의 질서보다 패권주의가 점점 강해졌으며 이후 전국시대는 현실 중심적 철학이 대세를 이뤘고, 군주들 역시 패권주의로 국가를 다스려왔다.    

  《국어》를 읽으며 이 책의 저자는 분명 북방 문화권 출신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각 나라별로 역사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북방에 위치한 국가들의 내용이 남방에 위치한 국가들의 내용보다 훨씬 많다. 특히 진(晉)나라의 기록은 책의 1/3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이를 가지고 몇몇 사람들은 저자가 진나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너무 나간 주장 같다. 다만 저자는 분명 기존의 전통적인 중화 문화권의 영역인 북방 문화권 출신이라서 북방 출신의 국가 기록을 상세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나는 《국어》를 《춘추좌전》을 읽으며 부교재처럼 참고했다.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 디테일하고 자세한 부분이 있겠지만, 노나라의 정치사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기록하다 보니, 주변 국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뭐랄까 좀 산만한 전개라고 해야 하나. 반면 《국어》는 특정 국가의 입장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챕터를 나라 순으로 편집하고, 그에 맞춰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각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에는 훨씬 가독성이 뛰어났다. 

 또한 문체도 《국어》가 《춘추좌전》에 비해 훨씬 평이하고 가독성이 좋았다. 《춘추좌전》의 문체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학적인 부분도 있고, 이념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국어》는 《춘추좌전》에 비해 훨씬 명료하고 단순하게 서술됐다. 그래서 읽는데 부담도 없었다. 그렇기에 과거 사람들은 《국어》를 두고 《춘추좌전》의 보조자료인 《춘추외전》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는 크게 알려진 고전이 아니다. 《춘추좌전》과 전국시대를 다룬 역사서 《전국책》에 비해 《국어》는 아무래도 포스가 떨어지는 고전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춘추시대에 대해 가장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고전을 꼽으라면 《사기》도 아닌, 《춘추좌전》도 아닌, 《국어》를 꼽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이야기할 때 《사기》를 대표적인 역사서로 꼽는다. 물론 《사기》는 매우 뛰어난 고전이다. 그러나 《사기》는 춘추시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전한 시대에 기록된 문헌이다. 따라서 《사기》는 춘추시대를 다룬 1차 문헌이 아니라 2차 문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를 알아보려면 그 시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나온 1차 문헌을 확인해야 한다. 《국어》는 명실공히 춘추시대를 다루는 1차 문헌이며, 사마천 역시 《사기》를 저술할 때, 《국어》을 참고했다. 이런 중요성을 가진 고전인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홀대받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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