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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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에 너무나 당연시 스며들어 눈치채지 못하는 폭력들. 서로가 서로를 수단과 개체로써만 이용한다. 그렇기에 영혜는 자아가없고 비폭력적인 식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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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 P43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 P53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적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P61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 P83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 P84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 P86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P101

"힘들지 않았어?"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시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 P104

전화가 끊겼다.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 P119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물론이전에도 색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돼 나오는 것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결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었다.
나는 어두웠다.라고 그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다웠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잠잠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그는 영원히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견디기에만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 P122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같은 이 점을 나눠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 - P142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 P142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 P143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 P146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P175

고개를 외틀어 그녀를 외면하며, 영혜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찌르는 거지 - P190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 P192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P197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 P200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P201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 - P202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 P204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 P205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 P214

넋이 풀린 그들의 간절한 시선은 마치 창 너머로 걸어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렇듯이. 영혜가 그랬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6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 P218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P220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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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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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 좋고 불쾌하며 찝찝한 추리소설. 사실 범인이 누구일것같단걸 대충은 예상했는데 모두가 자신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감추기위해 개개인의 세상을 구축해 이야기를 써나간단걸 미스터리식으로 정말 잘 풀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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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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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순수한 도련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서 조롱받고 놀림받는 도련님이지만 나는 그런 순수하고 착한 도련님이 좋아. 풍자적이고 웃기게 느껴지는 얘기속에 느껴지는 서글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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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열 배로 갚으려고 해도 갚을 길이 없다.
기요는 꼭 아버지나 형이 집에 없을 때만 나에게 뭔가를 주었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 눈을 속여가며 나만 덕을 보는 일이다.

기요는 가끔 부엌에서 아무도 없을 때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 하며 나를 칭찬해주곤 했다. 

돌아가는 길에 산미치광이가 번화가에서 빙수를 한 그릇 사주었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는 꽤나 으스대고 무례한 작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러모로 도와주는 것을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나와 마찬가지로 성급하고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인 모양이다.
나중에 들으니 이 사람이 학생들에게 가장 인망이 있는 선생이라고한다. - P38

다만 지혜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 난처할 뿐이다. 난처하다고 굴복할 수는 없다. 정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정직한 것이 이기지 못하고 달리 이기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라. 오늘 밤 안에 이기지 못하면 내일 이기면 된다. 내일 이기지 못하면 모레 이기면 된다. 모레도 이기지 못하면 하숙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오게 해서 이길 때까지 이곳에서 버틸 것이다. - P60

대체로 낚시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정한 인간들뿐이다. 비정하지 않다면 살생을 하며 즐거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고기든 새든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즐거울 게 뻔하다. 낚시나 사냥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면 별개의 문제지만, 아무 어려움 없이 살면서 생명을죽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니 정말 분에 넘치는 소리다.  - P64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요를 생각했다. 돈이 있어 기요를 데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놀러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알랑쇠 같은 인간과 함께오면 재미없다. 기요는 쭈글쭈글한 할멈이지만 어디를 데려가든 부끄렵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알랑쇠 같은 인간은 마차를 타든 배를 타든 료운카쿠에 오르든 도무지 가까이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교감이고 빨간셔츠가 나라면 역시 나에게 알랑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빨간 셔츠를 조롱했을 것이다. - P71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나빠지는 일을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둥 애송이라는 등트집을 잡아 경멸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 등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빨간 셔츠가 호호호호 하고 웃은 것은 나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단순함이나 진솔함이 비웃음을 사는세상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기요는 이럴 때 절대 웃는 법이 없다.
무척 감동하며 들어준다. 기요가 빨간 셔츠보다 훨씬 훌륭하다. - P76

비록 빙수든 감로차든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를 어엿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후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몫을내면 그뿐인 것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보답이다. 아무런 지위가 없다 해도 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립된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백만 냥보다 소중한 감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 P80

세상은 온통 사기꾼들뿐으로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싫어졌다.
세상이 이런 곳이라면 나도 지지 않고 남들처럼 속이지 않으면 살아나갈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소매치기한 돈까지 가로채야 세 끼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다고 팔팔하게 건강한 몸으로 목을 맨다면 조상님 볼 면목이 없는 데다 소문이라도 나면 난처하다. 생각해보니 물리학교 같은 데를 들어가 수학 같은 쓸모없는 재주를 배우기보다 그 6백 엔을 밑천으로 우유보급소라도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기요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나도 먼 데서 할멈 걱정을 하지 않고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있을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시골로 와서 보니 기요는 역시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씨 좋은 여자는일본 전역을 돌아다녀도 좀처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P98

그 후로 나는 빨간 셔츠가 수상한 놈이라는결론을 내렸다. 수상한 놈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사람은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대나무처럼 곧지 않으면 미덥지 못하다. 올곧은 사람과는 싸움을 해도 기분이 좋다.  - P113

빨간셔츠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고 고상하며 호박 파이프를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사람은 방심할 수도 없고, 좀처럼 싸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해도 에코인의 스모‘와 같은 기분 좋은 싸움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1전 5리를 받네 안 받네 하며 교무실 전체를 놀라게 한 실랑이의 상대인 산미치광이 쪽이 훨씬 인간답다. - P114

언변이 좋은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할 수 없다. 끽소리 못하는 사람이 꼭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표면적으로는 빨간 셔츠의 말이 아주 타당하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마음속까지 끌리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사나 대학교수가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사야 한다. 중학교 교감 정도의 논법에 어떻게 내마음이 움직인단 말인가.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이다. - P125

그런데 실제로는 큰 착각이었다. 하숙집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정말 착각 대장이다. 학생들이 용서를 빈것은 진심으로 뉘우쳐서가 아니었다. 단지 교장의 명령을 받고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였을 뿐이다. 머리만 조아리고 교활한 짓을 계속하는장사꾼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용서는 빌지만 결코 장난을 그만두지않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라고 할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도 가짜로 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가짜로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 만약 정말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144

하지만 가엾게도 기요는올 2월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죽기 전날, 기요는 나를 불러 말했다.
"도련님, 제가 죽거든 제발 도련님네 묘가 있는 절에 묻어주세요무덤 속에서 도련님이 오시는 걸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래서 기요는 지금 고비나타의 요겐지라는 절에 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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