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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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제2의 난쏘공이 될 작품.. 코로나 시대의 불황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써의 내가 훼손되는걸 막지 못하는 현실, 모든게 계급과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 그래도 마지막엔 ‘살아라‘ 고, 아주 단순한 말 한마디가 빗물과같이 모여 네 이웃을 위로하고 살린다는 교훈이 슬프고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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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연은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상대에게 직접 가하는 힘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력이라 할까, 오랜 시간 ‘판단‘과 ‘선택‘이 몸에밴 이들이 뿜어내는 단단하고 날렵한 기운이었다.  - P23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경험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응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 P38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 P40

이연은이 밤이, 그리고 또 이 계절이 낯선 듯 익숙해 마치 보이체크가 마리를 죽이기 전 한 말처럼 ‘몸이 차가우면 더이상 얼어붙지 않으므로 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처럼 느껴졌다. - P42

그런데도 가슴 한쪽에선 왜 자꾸 차가운 감정이 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는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인사와 미소가눈빛과 호의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 P67

그런데도 마치 그때 우리에게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년 봄,
이곳을 떠나 이사할 생각을 하니 더 그랬다. 근 일 년간 부동산 기사에는 집값이 안정되길 바라는 무주택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댓글이 난무했다. 시기 질투니 하는 말도 모욕적이었지만, 무지니 게으름이니 하는 말도 부당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쩌면 잘못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 P120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 P140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 P141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그 낯선 당혹 앞에서 나는 손에 쥔 책을 다시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불 꺼진 현관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2021년 어느 가을밤이었다. - P142

가장 과학적인 기기가 아름다운 방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알려줬던, ‘우리‘가 정말 불가능한 장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준 어느 한낮이. - P172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베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 P176

그러나 보다 인상적인 건 차대표의 안색과 표정이었다. 그건 기태가 거래처의 고위 간부나 임원을 접대하며 종좀 봐온 낯빛이었다.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자 ‘내장의 관상‘
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 - P179

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맨정신에 취기 없이. - P214

나는 뭐라 더 말을 못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마나한 말‘을 최대한 진심어리게 하는 것도 어른의 화법일 텐데, 누군가의 부고와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가진 표현의 한계와 상투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니던가. - P231

그런데 그날 코스타리카 여성이 브라질 남성에게 "나도 포르투갈어 좀 할 줄 알아"라고 말하자 남자의 눈이 새삼 깊어졌다. 섹스와 육체의 향연장에 문득 진지한 공기가 맴도는 순간 이었다. 어쩌면 그 짧은 순간 오직 두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중미와 남미의 역사, 이주와 노동, 모어와 영어, 소외와 공감 등이 엉기며 파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인지 몰랐다. - P238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 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 - P249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사람들처럼. - P250

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P253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 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 P254

그래서 어느 날 지부장이 식당에서 티브이 뉴스를 보다 "바보같이 저런 걸 왜 당하지"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지수를 가장 괴롭힌 말도,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게 만든 말도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누구든 당할 수 있고, 정말 많은 사람이 당한 일인데도 그랬다. 실제로 지수가 아는 피해자 중에는 사회생활 경험이 풍부한 오십대 직장인도 있었다. - P279

나는 저걸대체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 나는 왜 계속 기다려야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단순한 낙숫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름 혹은 눈물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에게 어떤 요구 혹은 회유를 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는데 그 요구를 계속 듣다보니 어느새 설득당한 기분이었다. - P280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이가 건넨 정중한 문장이라 한국의 그 어떤 행정 언어나 법률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말.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 답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하지만 대답 따위 아무도 들려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지수가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러 흘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얘기하는 물소리가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뚝뚝 흘러내렸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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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사는 10대고, 모든 인간을 통틀어 가장 멋지다. 근거는 매우 간단하다. 꼬맹이들은 10대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고, 10대들도 10대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대를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계층은 어른이다. 어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들이 모든 인간을 통틀어 최악이기 때문이다. - P13

그리고 그녀는 특히 돈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사들이는 것에 분노한다. 돈 많은 사람들은 모든 인간을 통틀어 최악이고, 예술을 훼손하는 최악의 방법은 거기에 빌어먹을 가격을 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어른들이 루이사가 건물 담벼락에 그리는, 그런 유형의 그림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담벼락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공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싫기 때문이다. - P15

어른들은 위험한 데 가지 못하게 하면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10대라면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시도인지 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우리안에 있다. 여린 심성은 궁전에서든 어두컴컴한 골목에서든 똑같이무너진다. - P21

하지만 루이사는 진실을 안다. 피스켄은 현실에 살해당했다. 그녀는 이 행성에 갇혀 있다는 폐소공포증으로 숨 막혀 했고 끊일 줄 모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죽었다. - P22

나이를 먹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있다는 것을. 어느 10대의 심장을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르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 있다는 것을, 영혼이 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감당할 수 없게 벅차오르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그림을 보고 평생 단 한 순간, 정말이지 숨을딱 한 번 쉬는 동안 두려움을 잊을 수도 있다.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게어떤 느낌인지 안다. 경험하지 못한 경우라면 설명할 도리가 없을지 모르지만,
왜냐하면 그건 바다를 그린 작품이 아니다. 빌어먹을 어른들이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 P22

그 집을 거쳐 갔고 이후에 오는 아이들에게 밖에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사람. 예술은 공감이다. - P29

어느 누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어느 누가 방파제 위에 대롱대롱 앉아 있는 세 명의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게 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짠 내를 맡게 하고 다른 사람의 어린 시절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을까?
만난 적 없어도, 루이사에게 그들이야말로 지구상에 남겨진 유일한 그녀의 사람들이다. 그림상으로는 아마도 열네 살 아니면 열다섯살에 가까워 보인다. 더는 어린애가 아니지만 아직은 어른도 아니다.
작가가 그들을 워낙 뚫어져라 보았고 워낙 아름답게 꿈을 꾸어서 색으로 속삭일 줄 알게 된 것처럼 그려져 있다. 안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이 그린 그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붓을 저렇게 조심스럽게 쥘 수없고, 어렸을 때 완벽한 고독을 먼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우정을 이런 식으로 그릴 수 없다. 완벽한 여름의 어느 날이고 셋이 어찌나 바짝 붙어 앉아 있는지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중 하나가 방금 정말, 정말 시원하게 방귀를 뀌기라도 한 듯 온몸을 들썩이며 웃고 있다.
그들은, 저 오래된 교회 안에 있는 무식하고 천하에 쓸모없는 부자들은 그런 걸 전혀 모른다. 아픔을 덜 겪어서 그렇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흡족해하며 행복하고 즐겁게 저 안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걸 바다그림이라고 생각한다. - P36

그림 25년 전 여름에는 어땠을까? 그들은 그 몇 주 동안 죽음을 목격했고, 쫓기고, 폭행을 당했다. 25년 뒤 그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이 평생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폭력을 경험했다. 그런 식으로 성장한 사람에게는 어떤 미래도 없어야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될일은 절대 없어야 하는데, 그 10대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훗날 그렇게 됐다. 주변 환경은 추악했지만 타고난 내면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마치 반항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대형 해머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의 그림은 전쟁 선포였다. - P39

우리 가운데 일부는 엉뚱한 곳에서 태어나 무인도에 난파당한 것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향이 뭔지 아직 모르면서 가슴 절절한 향수병을 앓는다. 어린 시절 친구가 바로 그런 존재다. 같은 섬에 유배당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나면거의 모든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 - P60

삶은 그게 전부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그 삶이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걸 의식하면 너무 많이 사랑하지도 않고 너무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지도 않으며 겁쟁이처럼 살게 된다. 화가는 그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침노을과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과 물풍선과 내 목에 닿는 타인의 숨결. 인간이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용감한 행동이 그것이다. - P64

가장 만만찮은 평론가들조차, 그 화가의 작품에 대해 좋은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한 적 없는 평론가들조차 내일 아침 일찍 소식을 들으면 전화기에 대고 "아, 이럴 수가"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그리고 테드는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도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적으로 지낼지라도 죽음에 직면하면 진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한종족이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뿐이며, 네가 가는 곳에 나도 따라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 P83

그녀의 품에 안긴 그 그림의 무게가 이제는 1000톤은 되는 것처럼보이지만 테드는 그것이 새털처럼 가볍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감정으로 인해 그녀의 무릎이 후들거리는지 이해한다. 이 세상에 자신을향한 누군가의 믿음보다 더 무거운 건 없다.  - P99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신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천하무적으로 태어난다. 그들이 배워야 하는 건 자기 회의다. 아, 이세상은 남들과 다른 아이의 숨통에 구멍을 내는 기술을 수천 년 동안 연마했으니 화가는 그걸 얼마나 철저하게 배웠던가. 유치원 시절에 어른들은 화가가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깨달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한눈에 알아차리고 살금살금 다가와 그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가끔 겁에질린 그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진정하지 못하면 그날 오후에 부모님을 호출해 선생과 상담을 진행했다. 그는 다섯 살 때 이미 그들이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는 눈빛을 알아차렸다. - P117

"들짐승처럼 몰려다닌다"라고 표현했던 친구들과 함께 지냈던, 가난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 화가는 어린 시절 내내 더러는 폭력이나 침묵으로, 때로는 주먹으로, 항상 빈 술병으로 주변을 파괴하는 어른들을 보았다. 아이들에게는 주어진 세상과 꿈꾸는 세상, 이렇게 두개의 세상이 있지만 화가조차 그림으로 그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라고 상상한 적은 없었다. 정말, 정말 어마어마한 바보라야 그렇게엄청난 꿈을 꿀 수 있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그런 바보가 있었다. - P135

세상은 너무 위협적이고 거칠고 폭력적이었고 두 소년은 너무 예민해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었다. - P153

알리는 실제로 요아르의 두 번째 삶이 되었다. 그 둘이 단짝으로 붙어 지낸 기간은 겨우 1년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 정말로 알게 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그런 적이 없었던 거다.
그 정도로 미치도록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타인의 숨결에 중독된 적이 없었던 거다. 요아르와 알리의 사랑은 80년 동안 이어졌대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이미 모든 것이었다. 눈부신 빛이었고 쾅 하는 소리였고 심장마비였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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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오늘의 젊은 작가 48
박대겸 지음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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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나서 생각보다 여운이 장난 아니다.. 가능공주 음모론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결말도 꽤나 참신하다 타협하는게 아닌 어떻게든 극복해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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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알아야 할 답은 주인공 소녀가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맞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이 야기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 소녀가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행했다는 점 바로 그 자체야.
그래, 여기서 중요한 건, 힘 없고 나이 어린 소녀가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를 해냈다는 점이야. 그리고 그것이 아주 값진 성과를 이뤄 냈다는 점이야.
물론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 본인의 삶은 해피하다고도 새드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긴 하지만, 근데인생이란 게 그런 나날의 연속 아닌가? 그건 중요하지 않은문제인 것 같아. - P83

오늘 아침엔 조만간 변화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혹은 앞으로 일어날 내 미래의 일을 점지해 주기라도 하듯,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에게 김연아의 영상을 띄워 줬어. 나는 홀린 듯 그 영상을 클릭했고, 퀸의 전언처럼, 영상 속에서 김연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고 나의 의지라고. - P103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갈수 있게 됐으니까. 나는 이제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난 지구가멸망하기 직전까지,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볼 거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거야. 한편으론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해. 지극히 개인적인 연애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가 과연 이 거대한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존재하기나 할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개 대학생이자 라멘집 아르바이트생인 내가? 나도 몰라. 모르겠어. 연애는 연애고 인류는 인류지. 어떤 일이든 해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떤 일이든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어. 이것저것 따지고 가능성을 계산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냥 무작정 하는 거야. - P115

그렇기 때문에 이틀 뒤 이 세계가 정말로 사라진다면,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나도 사라지는 거야. 가족과 친구들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나라고 할 수 없겠지. 그러니까 살아 보겠다고 나 혼자 다른 세계로 떠나거나 하는 일은 없어. 그것보다는 이 세계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이 세계가 사라지지 않을 방법을 찾으려 아등바등할 거야. 이것이 나의 의지고, 어쩌면 이것이 신의 의지라고도 생각해.  - P116

나는 이틀 뒤에 정말로 인류가 절멸하면 어쩌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심각하게 고심하고 고민하고 있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래.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인생이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해야지.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겠지. 행동으로 옮긴다고 한들 바뀐다는 보장도 없고, 바뀌지 않을 확률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아니, 바뀌지 않은 확률이압도적으로 크지만, 그래도 해 봐야지. 그래도 해 봐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 그래서 어른들이 사는 게 어렵다거나 인생은알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거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P123

좋은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행한다고 한들, 내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고, 그 결과가 나에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우니까. 어쨌거나 일단은 생각부터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인류의 멸망을 막기위해, 정말 티끌보다 보잘것없는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최소한 생각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 P124

제발 남아 있는 이틀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부딪치며 지내 봐! - P125

그래, 이제 나는 더 이상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고, 살고싶지도 않아. - P149

이제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는 세계에 살게 됐어. 가능하면 그런세계에 살고 싶어. 이미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오가와 루리코가 있고 지금 내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승아 언니도있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 주위뿐 아니라 전 세계에 수십 명, 수백 명, 아니 어쩌면 수천 명, 수만 명이 있을지도 몰라…………! - P150

비록 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끝맺었지만, 그들은 아직 인간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별다른 일 없이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모두 무병장수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하고 싶은일들 전부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가끔씩 나를 떠올려 주면 좋겠다. 그렇게 나를 떠올리며, 내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나와 함께 나눈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 짓기보다는 슬며시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좋겠다. - P218

점점 지구에서 멀어지기만 하는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일은 없었다. 인류의 미래는 앞으로 지구에 살아갈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 P225

아마 인류는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들이 파동-입자가 되어 자신들을 구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외계 생명체 소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이겠지.
상관없다. 우리가 훨씬 더 넓은 곳에서 훨씬 더 오래도록 살 테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전부 기억할 테니까.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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