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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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악평에 비해 생각보다 읽을만했고 가독성도 필력도 좋아서 술술 읽힘. 내 인생의 급류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법은 비극의 가장 밑바닥까지 잠수해 직면해야만 빠져나올수 있다 인생에서 깨진것따윈 없으니, 조금많이 헝클어져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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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과 하강, 침잠과 부상. 아직 부력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도담은 부력이 있으면 다 물에 떠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가라앉는 거냐고 창석에게 물었다. 부력에는 가만히 있으면 뜨려고 하는 성질의 양성 부력, 밑으로 가라앉는 음성 부력이 있다고 설명하면서창석은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상태인 중성 부력이 스쿠버 다이빙의 기본이라고 했다.
"중성 부력에서는 무중력 상태처럼 자유롭지. 아빠는 도담이가 중성 부력에서처럼 평온하고 자유롭게 살면 좋겠다." - P13

"너 소용돌이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도담이 해솔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데?"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 P32

"벌을 주자."
도담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어떤 말은 혀를 통해 입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의식을 붙들어 매고 돌이킬 수 없는 힘을 가진다. 자욱해진 물안개 너머로 가파른 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고 댐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도담은 기이한 압력에 짓눌리는 기분이었고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고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물안개가 두사람을 집어삼켰다. 가까이 서 있는데도 서로가 보이지 않을정도 였다. - P39

"도담아, 다 지나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미래만 생각하자.
미래만." - P85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책
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 P99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도담은 그들과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누군가에게 쉽게 빠졌고 쉽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도담은 고백해 오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00

젊음으로 가득한 캠퍼스에서 해솔은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이미 아주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강의하는 노교수보다도 더 죽음을 망각하고 영원히 살것처럼 구는 게 젊은이들의 특권이라면 해솔은 젊음을 잃어 버렸다. - P107

해솔은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언제 갑자기 땡하고 터져 버릴까 봐 아슬아슬하고 벅찬 기분이었다. 그간 겪은 큰 불행에 익숙해져서 담을 수 있는 행복의 크기가 쪼그라든 것 같았다.  - P128

"나는 모든 가능성을 살 거야. 여행처럼 신나게 살 거고, 모든 걸 경험해 볼 거야." - P131

도담은 해솔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해솔이 외로우면 안 되는데, 해솔은 듬뿍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부정적인 나는 어떻게 해솔에게 사랑을 주나. 도담은 다시 슬퍼졌다. 예지가 말한 것처럼 나는 해솔과 어울리지 않나? 해솔에 비해 한심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해솔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해솔이 자신처럼 같이 비틀거리고 엉망이 되었으면 했다. - P137

분노는 그 분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더욱 쉽게 뿜어져 나온다. 상처도 아무도 모르는 상처보다 그 상처의 존재를 아는 사람 앞에서 더 아프다. - P159

외로웠지만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도담은 승주의 다정함에 끌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서로를 의지한다는 건 함께 가라앉는 것 같았기에. 도담은 더 이상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 P192

"도담 씨,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7년인가 지나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교체된대. 10년이면 도담씨 온몸의 세포가 교체된 거야. 그러면 이제 도담 씨도 그 사람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 P227

"한 번 깨진 관계는 다시 붙일 수 없다고 하는 건 비유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해 봐. 우리는 깨진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게 헝클어진 거야. 헝클어진 건 다시 풀 수 있어." - P252

"불에 휩싸인 네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꼭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처럼 느껴졌어, 구조 신호를 보내는 사람처럼." - P255

"두려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해솔과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도담이 말했다. 도담의 머릿속엔 급류에 휩쓸려 버리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나쁜 쪽으로 삶이 반복되리라는 불안과 공포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다른 방도는 없었다. 불안에 맞서 서로를 안아야 했다.
"지금 너는 행복이 두려운 거야."
해솔이 도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도담의 눈을 바라봤다.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 P256

왜 아픔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지못했을까.  - P268

도담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내게는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구나. 나는 불행한 사람인데, 내가 감히분에 넘치게 행복하려고 했구나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도담은 표독스럽게 하늘을 노려봤다. 마치 다시 행복해지려는 희망을 품기만 하면 짓밟으려고 벼르고 있던 것 같은 하늘을.
얼마만큼 더 할 예정이냐고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붓고 싶었다.
해솔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시간들이 도담의 몸과 마음을 전부 적실듯,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 P273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
그때 깨달았어. 사랑한다는 말은 과거형은 힘이 없고 언제나 현재형이어야 한다는 걸. - P290

도담은 여유롭게 헤엄치며 웃었다. 자유롭다. 내가 얼마나 수영을 잘했던가. 수면에 나와 눈부신 햇살을 받으니 살아 숨쉬는 그 자체로 좋았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있을지모를 미래에 목매지도 않으면서 진정으로 살고 싶어졌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거센 물살을 헤엄치듯이.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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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메모리엄 - 2024 올해의 영국 도서상 데뷔 소설 부문 수상
앨리스 윈 지음, 이나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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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전선급의 리얼리티와 전쟁서사를 기대했지만 뭔가 많이많이 부족하고 아쉽다.. 초반부분이 많이 늘어지고 중반부분부터 몰입이 되는 소설. 호모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은 재밌게 읽을듯 한데 그외에는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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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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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제2의 난쏘공이 될 작품.. 코로나 시대의 불황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써의 내가 훼손되는걸 막지 못하는 현실, 모든게 계급과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 그래도 마지막엔 ‘살아라‘ 고, 아주 단순한 말 한마디가 빗물과같이 모여 네 이웃을 위로하고 살린다는 교훈이 슬프고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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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연은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상대에게 직접 가하는 힘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력이라 할까, 오랜 시간 ‘판단‘과 ‘선택‘이 몸에밴 이들이 뿜어내는 단단하고 날렵한 기운이었다.  - P23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경험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응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 P38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 P40

이연은이 밤이, 그리고 또 이 계절이 낯선 듯 익숙해 마치 보이체크가 마리를 죽이기 전 한 말처럼 ‘몸이 차가우면 더이상 얼어붙지 않으므로 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처럼 느껴졌다. - P42

그런데도 가슴 한쪽에선 왜 자꾸 차가운 감정이 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는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인사와 미소가눈빛과 호의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 P67

그런데도 마치 그때 우리에게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년 봄,
이곳을 떠나 이사할 생각을 하니 더 그랬다. 근 일 년간 부동산 기사에는 집값이 안정되길 바라는 무주택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댓글이 난무했다. 시기 질투니 하는 말도 모욕적이었지만, 무지니 게으름이니 하는 말도 부당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쩌면 잘못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 P120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 P140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 P141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그 낯선 당혹 앞에서 나는 손에 쥔 책을 다시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불 꺼진 현관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2021년 어느 가을밤이었다. - P142

가장 과학적인 기기가 아름다운 방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알려줬던, ‘우리‘가 정말 불가능한 장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준 어느 한낮이. - P172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베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 P176

그러나 보다 인상적인 건 차대표의 안색과 표정이었다. 그건 기태가 거래처의 고위 간부나 임원을 접대하며 종좀 봐온 낯빛이었다.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자 ‘내장의 관상‘
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 - P179

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맨정신에 취기 없이. - P214

나는 뭐라 더 말을 못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마나한 말‘을 최대한 진심어리게 하는 것도 어른의 화법일 텐데, 누군가의 부고와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가진 표현의 한계와 상투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니던가. - P231

그런데 그날 코스타리카 여성이 브라질 남성에게 "나도 포르투갈어 좀 할 줄 알아"라고 말하자 남자의 눈이 새삼 깊어졌다. 섹스와 육체의 향연장에 문득 진지한 공기가 맴도는 순간 이었다. 어쩌면 그 짧은 순간 오직 두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중미와 남미의 역사, 이주와 노동, 모어와 영어, 소외와 공감 등이 엉기며 파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인지 몰랐다. - P238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 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 - P249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사람들처럼. - P250

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P253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 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 P254

그래서 어느 날 지부장이 식당에서 티브이 뉴스를 보다 "바보같이 저런 걸 왜 당하지"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지수를 가장 괴롭힌 말도,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게 만든 말도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누구든 당할 수 있고, 정말 많은 사람이 당한 일인데도 그랬다. 실제로 지수가 아는 피해자 중에는 사회생활 경험이 풍부한 오십대 직장인도 있었다. - P279

나는 저걸대체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 나는 왜 계속 기다려야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단순한 낙숫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름 혹은 눈물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에게 어떤 요구 혹은 회유를 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는데 그 요구를 계속 듣다보니 어느새 설득당한 기분이었다. - P280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이가 건넨 정중한 문장이라 한국의 그 어떤 행정 언어나 법률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말.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 답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하지만 대답 따위 아무도 들려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지수가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러 흘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얘기하는 물소리가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뚝뚝 흘러내렸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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