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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반항아 - 출생 순서, 가족 관계, 그리고 창조성 ㅣ 사이언스 클래식 12
프랭크 설로웨이 지음, 정병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5월
평점 :
분과학문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을 허물자는 취지에서 이뤄졌던 그간의 학제간 연구 바람 자체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배경으로는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치로 내건 문화연구의 발흥이 있었고, 최근의 이른바 ‘실용주의’ 학풍과도 다소 기이하게 맞물리고 있는 추세이다. 윌슨의 『통섭』이 출간된 이후 ‘통합학문’을 지향하는 목소리는 각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담론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최근 출간된 『타고난 반항아』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들이다. 키워드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심리학과 사회과학의 만남
진화심리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타고난 반항아』는 사상사와 정치사적 맥락에서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급진적 혁명들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미지의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지” 이 책은 묻고 있다. 나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경쟁 개념, 재산과 사회적 지위 중 그 어느 것도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설명해줄 수는 없다고 프랭크 설로웨이는 말한다. 대신 저자는 그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 “인간 행동에 대한 단순하지만 놀라운 관찰” 하나를 발견한다. ‘출생 순서’와 ‘가족관계 역학’이 그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상 자신의 족적을 남긴, 무려 6천566명의 방대한 전기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주역들이 ‘첫째’가 아니라 ‘후순위 출생자들’임을 밝혀낸다. 이전 세기에 부모들은 후순위 출생자식보다는 첫째에게 더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그에 따라 가족 내에서 형제들은 ‘가족 내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의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돼 있었다. 이는 문헌학적으로도 성경에서 증명된다. ‘성경 최초의 살인’이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형제 살해 아니었던가.
프랭크 설로웨이는 사회변화의 동인으로 ‘가정’에 주목한다. 이제 더 이상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경쟁’이 자행되는 곳이 된다. 그런데 역사 변화의 주원인을 찾으려 한 칼 마르크스의 오류는, 그것을 ‘가족들 사이’에서 찾으려 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해당 가족 ‘외부’에서 탐색하려 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생활에서 ‘대인 갈등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성적 충동과 오이디푸스적 갈등에 1차적 중요성’을 둔 결과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강조한 ‘부모-자식 갈등’의 근저에는 “부모의 자원을 놓고 형제들이 벌이는 갈등의 산물”이 존재함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혁명적 성격의 토대’는 결국 ‘출생 순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가정 내에서 부모에게 받는 불공평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동인은 없다. 이는 저자가 보기에 “출생 순서의 심리적 효과로 인한 가정환경에 불가항력적인 역학”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형제간 출생 순서의 차이에 따라 형제간 ‘분화’의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다윈은 “분화형 천재의 으뜸가는 사례”이다. 여섯 자녀 중 다섯째였던 다윈 자신이야말로 형제간 경쟁에서 비롯되는 혁명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본보기’인 동시에, ‘한 인간의 사유 과정에서 발생한 지속적인 혁명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통합론적 시각의 의미와 한계
통합 학문적 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당하다. 다만 한 가지 우려는 ‘문화’로 일컬어지곤 하는 인간 역사와 사유의 결과를 혹여나 단순히 생물학적 지평으로만 재단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현재 실제로 『통섭』의 저자인 윌슨에게 가해지는 일각의 비판이기도 하다. 질리언 비어는 『다윈의 플롯』에서 무엇보다 ‘문화적 기억’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역시 그 책의 한 장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현재 ‘밈’, 즉 ‘문화적’ 유전자가 점점 중요성을 띠게 되는 현상과도 괘를 같이 한다. 이 모든 노력이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받지 못하는 ‘통합’의 함정에 혹여나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