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과학문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을 허물자는 취지에서 이뤄졌던 그간의 학제간 연구 바람 자체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배경으로는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치로 내건 문화연구의 발흥이 있었고, 최근의 이른바 ‘실용주의’ 학풍과도 다소 기이하게 맞물리고 있는 추세이다. 윌슨의 『통섭』이 출간된 이후 ‘통합학문’을 지향하는 목소리는 각 분야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담론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최근 출간된 『다윈의 플롯』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들이다. 키워드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과 19세기 영문학의 관계 『다윈의 플롯』은 다윈의 진화론과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 두는 미국의 학풍과는 달리 영국의 영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사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방식을 병행한다.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권위자인데, 구체적으로 조지 엘리엇과 토머스 하디의 작품들을 파고든다. 그는 말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 소설을 연구하다 다윈의 진화론이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다윈이 쓰는 언어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사회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질리언 비어는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용어 자체의 흥미로운 모호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 용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형용모순이다. “자연이라면 부자연 또는 인위의 반대말이 아닌가? 또 선택이라면 누가 선택한다는 뜻일까?”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이 용어의 ‘긴장감’에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바로 여기서 과학자 다윈의 ‘문학적’ 혹은 ‘창조적’ 면모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로부터 왜 그토록 지적이고 정서적인 흥분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질리언 비어 스스로 이 책에서 자신의 논증의 중요한 전제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진화론이 소설의 이야기와 구성에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시간이나 변화의 개념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으므로 문학작품 속 이야기의 문제와 과정과도 ‘내재적인 친화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이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경계-자연이냐 선택이냐-의 문제’, 다시 말해 ‘범주화를 향한 열정’은 종국에는 ‘플롯의 불안정함’으로 귀결된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소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예견했듯이 오늘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심지어 모든 字句를 원본과 그대로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같은 책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물 복제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복제양 돌리와 같은 경우도 저자가 보기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이 ‘불안정함’이야말로 “현 시기의 심미적 감수성”이다. 이제 창조적인 작가들은 과학적인 재료를 자신의 ‘상상력’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질리언 비어는 흥미로운 언급을 남긴다. 민담설화학자 “프로프(Propp)가 형태론의 類比를 통해 정립한 불변의 민담 문법이 여전히 통용될까?” 통합론적 시각의 의미와 한계 통합 학문적 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정당하다. 다만 한 가지 우려는 ‘문화’로 일컬어지곤 하는 인간 역사와 사유의 결과를 혹여나 단순히 생물학적 지평으로만 재단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현재 실제로 『통섭』의 저자인 윌슨에게 가해지는 일각의 비판이기도 하다. 질리언 비어는 『다윈의 플롯』에서 무엇보다 ‘문화적 기억’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역시 그 책의 한 장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현재 ‘밈’, 즉 ‘문화적’ 유전자가 점점 중요성을 띠게 되는 현상과도 괘를 같이 한다. 이 모든 노력이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받지 못하는 ‘통합’의 함정에 혹여나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