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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평점 :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한 작가의 삶을 받아들이는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주옥같은 말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콩닥콩닥 거리게 한다.
얼마만일까. 이렇게 진지하고 솔직하게 삶을 받아들이는 말들이.
속삭이듯 혼자말하듯 말하지만
나를 기쁘게도 했다가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도 했다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더불어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평이긴 하지만
하루키의 가치관을 닮은 또다른 삶을 사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일단 시작하면 다른것은 보지 않고 전력질주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하여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하루키가 '러너'의 자세로서, '작가'의 삶을 생각한 최초이자 (어쩌면 마지막) 회고록.
사람들의 평처럼 그의 책을 읽고 싶은 동시에 달리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결코 잘 달리는 사람도 아니고 러너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리는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달리기에 관해서 나만의 특별한 기억, 이라고 할만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때의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려고 했던 일종의 모티베이션으로서 작용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문득 달리고 싶게 되었다.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고 하면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 "무척 의지가 강하시군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을 받으면 물론 기쁘다. 욕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런데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처럼 단순하게 되어있지는 않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 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같은 것도 조금은 관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런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몸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루키는 결코 노력하면 다 되는것- 이라고 뻔한 스토리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달리기를 찾았듯, 누군가에게 맞는 무언가가 있어야
-그리고 삶은 우리의 인생을 맞는 쪽으로 맞게 흘러가게 되있고- 그때 의지가 작용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것이라면. 20년 이상 달려왔던 그로서는 달린다는 것이 즐거움이자, 삶의 의지가 되고 과정이 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인생의 한 분기점 같은 서른세 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나이다.
그런 나이에 나는 장거리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은 출발점이 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과 함께 시작한 달리기. 그리고 또 시작된 인생의 두번째 막.
결코 부유하거나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삶의 모양새를 갖추어갈 때 그는 송두리째 벗어버리고 소설쓰기를 시작했다.
어느날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대로' 쓰기 위해서라면 한가지 일을 할 때에만 전력질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운 인생의 한 분기를 만들어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고 해야하나. 씁쓸해졌다고 해야하나.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한 곳을 보고 전력질주할 수 있는 힘의 여분을 다른 곳에 조금 남겨두고
지쳐 쓰러질때까지, 라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인생의 한 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하나의 가지를 둘로 나누어 어느한 쪽을 선택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로 새로운 인생의 한 분기를 원한다면
다른 쪽에 대한 욕심과 미련은 과감히 버려야 하지 않을까.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공정함'에 굳이 희구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어떤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재량이다.
결코 재능있는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도 아니고 -적어도 회고록에서는-
불공평한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는 최대로 공정함을 위해 노력해왔다.
불공평한 것은 당연한 거겠지. 재능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다소 운도 따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일단 레이스 스타트 점에 있으면 그 때만큼은 공정함을 희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달리는 동안만큼은 모든것을 공평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공평함을 희구하기 위해 쉽지는 않지만 걷는 것이 아니라 늘 달리기 위해 하루키는 노력한다.
내가 내 인생에 있어 늘 달리고자 애써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무 지쳤어, 너무 달려왔으니까 쉴틈이 필요해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의 페이스를 놓쳐 다시 달리기까지 방황하고 더 많은 힘과 노력을 필요로 했었던 것 같다.
달리기 위해, 소설을 쓰기 위해,
아니, 그 두가지를 통해 내 삶을 주도적으로 컨트롤 하기 위해
그만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다시한번 귀감이 된다.
회고록 같은거, 정말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꽉 찬, 느낌이 든다. 오랜만에 별 다섯개를 주고 싶은 책.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삶이 그대로 나타나는 어록.
-생각한것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재능이다 ㅎㅎ-
잊지 말아야지. 나는 죽으면 내 묘비명에 무얼 기록하고 싶은지도 생각해보아야겠다.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기 위한 휴식은 착실하게 취했다.
그러나 걷지는 않는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위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 -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일본의 북녘 끝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