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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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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오래전부터 영혼 없는 아름다움에 길들여진 저 대도시의 공허 속보다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더 나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114

 

그래서였을까? 카뮈는 사색을 멈추고 그저 살아있음의 순진성을 느끼러, 오랑에 닿았던 모양이다. 그가 이르는 곳곳은 사막보다 더 성글고 거친 돌들이 그를 맞을 뿐이다. ”바다는 푸르른 군청색이고, 길은 응고된 피처럼 검붉고, 해안은 노랗다. 이 모든 것이 태양의 녹색광선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110. 나눠 가질 수 없는 느낌은 오로지 체험으로만 알게 된다며 그곳에서 느낀 고독과 위대함으로 오랑의 얼굴을 부여했다. 다만 그것이 좋았다는 것만을 기억하는 일. 지금-여기의 현존을 즐긴 것으로 충분하다. 온통 그러하다. 까뮈는 이르는 곳곳을 그저 날 것 그대로 기억하고 기술한다. 수도원에서 더 이상 고독과 사색의 단초를 찾을 이유가 없고 권태로워질 때까지 머무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여름휴가라고 이름 지은 삶의 이벤트를 더 이상 하지 않은 지 여러 해 되었다. 도시와 결별하고 내려와 산 이유도 있을 것이고, 마음의 경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삶과 일, 일과 여가가 혼재 통합된 채, 시간의 구속을 따로 둘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거주 공간에서도 온통 푸르름을 만나고 집을 나서기만 해도 하늘의 푸르름을, 투명한 물소리를, 무시로 느끼는 바람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까뮈가 만난 하늘과 바다와 바람은 아니었으되 순진한 자연과 교감하고 지도를 그려간 마음은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사막으로 표현한 까뮈의 사막일지는 온통 매력으로 그득하다. 어떻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지 그의 언어 미노타우로스 마궁에 흠씬 빠져든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일부러 놓치고 싶다.

 

세계의 이러한 영속성엔 늘 인간과는 상반되는 위엄이 있다. 영속성은 인간을 절망시키고, 또한 흥분시킨다. 세계는 절대로 단 한 가지만을 말하지 않는다. 세계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가, 지루해진다. 하지만 끝끝내 고집스럽게 우리를 이기고 만다, 세계는 늘 옳다,“ - 108

 

삶을 통째로 끌어안은 카뮈는 세상은 관능의 풍요와 극도의 궁핍은 일치한다는 것을 안다. 씁쓸함이 수반되지 않는 진실이란 없으며, 장수하고 싶은 욕망과 죽을 운명에 대한 이중의 자각의 조화를 이해한다. 그래서도 아무 것도 기대지 말아야 하며, 오직 현재만을 우리에게 덤으로주어진 유일한 진실로서 간주하고 있다. 그가 오른 피렌체의 언덕, 피에솔레에서 만난 빨간 꽃. 한 존재와 삶 사이의 일치로 행복을 말한다. 양평에 들어와서 근 일 년을 가만히 지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카뮈는 아몬드나무들이 매년 열매를 맺을 준비에 딱 필요한 만큼씩 견뎌내 2월의 어느 날 하룻밤만에 하얀 꽃을 피워내던 순리에서 강한 의지력을 잊지 말아 무거움의 정신이라는 악을 이기자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면서 부단히 발전해왔으며 우리의 조건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고. 카뮈가 생각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란 뭘까? 어쩌면 자유로운 영혼들이 수시로 빠지는 불안의 늪에서 헤어 나올 몇 가지 처방을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삶에의 긍정성. 그 자신이 건너온 삶의 여정, 무지와 냉대의 늪에서 손을 내밀었던 친절한 눈과 손에의 기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게 하고 수용하게 한 것이리라. L.제르망, 장 그르니에, 피에르 갈랭도 등 그를 따듯이 비추었던 인간 태양광들. 자신이 머문 곳에 대한 단상을 한 편 한 편 완성하고 나눔으로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 느낌이다.

 

 

내가 브런치스토리를 쓴 지 55일 째.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읽으며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봐주는 벗이 있다. 내 글의 완성은 그가 보는 순간에 종결된다. 신산한 삶이 좀 묽어진 이유이다. 고등학교 때 장 그르니에의 <>을 만나 마냥 좋아서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무한정으로 선물했었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전해진 마음이 한 호흡으로 나눠졌던 적은 없어서 늘 허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까뮈와 장 그르니에의 사제 관계를 넘어선 문우로서의 사랑이 특히 아름답다 여겼다. 그 둘은 서로에게 배어나고 물들고 스며들어 있었다. 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의 교분은 감성을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꿈꾼다. 행간을 더듬고 만져줄 벗을.

 

 

프로메테우스가 천형을 지고 인간에게 가져다준 불과 자유’, ‘기술과 예술을 우리는 그 쓰임을 지키고 있는가? 카뮈는 양 차 대전 후 도처에 널린 절규와 고통 위협의 역사 앞에 무력한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를 배반했다고 단언했다. 비단 그때뿐이 아님을, 지금 내가 발붙인 이곳에서도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필요하다. 권력에 중독된 이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다정한 인사를 잃은 서로는 물고 할퀸다. 죽음의 극단에서야 사람이 소리 없는 외침을 하고 있었음을 안다.

 

 

카뮈는 <결혼>편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알제리의 티파사, 제밀라와 알제 등의 지역에서 자신이 사랑한 것들을 소개한다. 또 추억과 예술 작품, 희귀한 유물로 넘쳐나는 과거를 간직한 이탈리아의 피렌체 수도원들을 돌면서 만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결혼한 신부를 바라보듯 은밀하고도 깊게 만난다. <여름> 편에서는 과거가 없이 권태의 시간만이 가득한 알제리의 오랑, 콩스탕틴 같은 곳에서 만난 사유들을 풀어낸다. 머뭇대는 사람들을 붙잡아 마비시켜 모든 질문을 차단한 채, 매일의 삶 속에서 잠들어버리게 하는 곳에서 인간의 의지력에 대해 다시 삶을 긍정하는 태도에 대해, 생을 살아가는 마음들에 대해 기꺼이 돌아본다. 정신보다는 마음이 우선하기를 바라면서. 그의 시선을 쫓자니 알제리의 모순적인 여름을 끌어안고 싶어진다. 이런 치명적인 유혹이라니......

 

 

다만 긍정과 부정, 정오와 자정, 반항과 사랑 사이에서 찢기는 고통을 아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바닷가의 모닥불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그곳엔 그들을 기다리는 불꽃이 있으니.“-137

 

 

헬레네의 추방편은 그리스와 유럽의 철학적 원류를 비교하며 사유를 풀어냈다. 유럽이 이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전제주의적 제국주의를 꿈꾸는 발상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무지의 불인정, 광신,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기형을 부르고 있음을 통찰한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고요한 하늘과 이치를 인간의 광기에 대립시키며 균형을 이루려 한다. 유럽 제국의 광폭한 폭력성이 역사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의 세계, 헬레네 아름다움을 몰살시킨다. 이성에 의한 힘의 군림이 아닌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의 복원을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자본 물질주의의 노예가 된 너와 나도 헬레나의 추방에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특히 자연의 무심함이나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에너지를 보충하는데 이 두 요소를 걷어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게는 심폐소생술이나 다름없다. 부디 예술가들이여, 삶이 곤궁하고 노할 일 가득하더라도 그대의 창작 의지를 꺽지 말라.

 

 




공간과 침묵은 똑같은 무게로 가슴을 누른다. 갑작스러운 사랑, 위대한 작품, 결정적인 행동, 빛나는 사상은 어느 순간 저항할 수 없는 매혹과 함께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준다. 존재의 달콤한 번민,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위험의 감미로운 임박, 그렇다면 사는 것은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다시 한번, 쉼 없이.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188

 

나는 늘 먼 바다에서 위협받으며, 고귀한 행복 한가운데서 사는 기분이었다.“ -188쪽 마지막 문장

 

 

실컷 자연을, 생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던 그가 항해일지 안에서는 두려움과 불안과 마주하고 있다 싶어 더불어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는 불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자체도 수용하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감이 곧 고귀한 행복임을 알려주는 역설이다. 카뮈다운 결론이다. 부조리에 대한 인식과 저항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 껴안고 자기 창조로 새로운 극복을 보여준다.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삶의 수수께끼로서 다만 판독하기 어려워서 유예하고 견디는 것이지 회피하지 않는다. 삶에 던져진 그 어떤 것도 배제시키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는 삶에의 굳건한 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카뮈는 소녀시절의 나와, 청년기의 나와, 중년기의 나와, 장년기의 나와 내내 함께 한다. 나는 누구보다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며 빛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기에. 주말이 모처럼만에 향기롭다.

 

 

: 녹색광선 출판사의 안목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표지가 주는 기쁨을 함께 누린다. 그에 더해 번역가 장소미님은 무조건 믿고 본다.

 

봄에 티파사엔 신들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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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분홍 스캔들
최소진 / 디지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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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스캔들이라니? 황홀한 고백, 작가의 위트 속에 비치는 생에 대한 가만한 기쁨을 느끼게 되는 디카시 모음, 느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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超뷰카 시대 지속가능성의 실험실 - atomy(애터미)
윤정구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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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의 모 기관에서 직원 역량 강화를 위한 강의 요청이 왔다. 수강할 구성원들의 성격을 듣고 나는 세 개의 제목을 건넸는데 “초뷰카시대, 핫 잇템 ’나‘”라는 제목을 반겼다. 주제 의식은 차치하고 왼통 영어를 섞어놓아 스스로 썩 맘에 들진 않으나 그들은 아주 좋아했다. 뭔지 트렌드하고 신박하고 특별나 보이는 제목이라고. 엄(숙)근(면)진(지) 풍이라면, “혼돈의 시대, 나부터 챙기기”쯤 될까?



지금이 변화를 상수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유동성(volatility), 예측이 불가능한 불확실성(uncertainty), 여러 개념들이 얽히는 복잡성(complexity), 명료하지 않고 두루뭉실한 모호성(ambiguity)이 확대되는 초뷰카시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언제는 그러지 않았을까? 학자들의 연구에는 통계로 존재하지만 나 개인의 삶에서는 언제나 뷰카시대였던 듯하다. 몇 년 전쯤에서부터 나를 알아가기 위한 다양한 탐색들이 있었다. 여전히 방황 중이나 나를 들여다보고 보살피는 일이 이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방기 방치한 만큼 나 아닌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며 울고 웃고 화내고 달래고 얼르다가 지금에 와있다.



리더십, 인권, 사회복지, 코칭, 예술 교육, 철학 교육, 심리 교육 등을 파며 나를 알아가는 탐색으로 실험실을 가동 중이다.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제 VUCA적 자아(Ego)가 정체성을 정립하며 참나(True-Self)가 언뜻 비치기도 한다. 사람은 7년마다 세포마저 바뀐다고 하는 근거를 본 적이 있다. 그 사이 내 마음이나 정신, 영혼의 세포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나를 파고 파는 일이 재밌는 일과가 된 면도 있다. Strenth로서의 힘, 일치성으로의 진실 등을 화두로 붙들고 있다.



와중에 <초뷰카시대, 지속가능성의 실험실>을 읽으면서 개인과 조직의 ’자기조직화‘가 자기 인식과 자기 관리를 통해 ’나‘ 혹은 ’기업‘을 재디자인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저자는 IBM, 유니레버, 사우스웨스트 항공, 링크드인, 레고 그룹, 컨테이너 스토어, 파타고니아, 캠벨, 펩시, 3M, 매리케이, 다논, 홀푸드마켓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유수의 다국적기업과 한국의 에터미를 함께 배치하고 이들 기업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 초뷰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경영방식, 방향성, 존재이유에 대한 질문의 답이다. 이 기업들을 백년기업 혹은 백년기업이 될 후보군으로 꼽는 이유가 뭘까?



그들에겐 목적의식이 분명하지만 무겁지 않고, 그 목적을 따라 기업윤리를 세우고 나아가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자기네 회사 옷을 자꾸 삼으로써 지구 환경을 더욱 해치지 말고 고쳐 입으라고 권하는 파타고니아.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성을 견고하게 만드는 직업군들의 일상복이 되어 안정적 매출을 자랑한다. 3M은 매년 쏟아내는 1천개의 신제품들이 CO2배출을 얼마나 혁신적으로 줄였는지, 얼마나 에너지를 절약했고 일반인들의 교통 편의를 얼마나 개선했는지를 기준으로 설정한다. ’세상은 더 편리하고 혁신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세상이 된다는 것‘을 회사의 사명으로 선언했으니까.



저자가 한국의 공의기업으로 조심스레 내세운 애터미는 어떤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견되는 기업환경에서 유전자복권을 타서 세속적 성공을 얻어낸 골리앗 기득권 세력들과는 다른 행보를 간다. 세칭 피라미드로 분류되기도 했던 네트워크 마케팅 사업자로서 불명예스러운 명명을 끊임없이 자기조직화를 이뤄 공의를 향한 질서를 이뤄가고 있다. “유전자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엘리베이터를 제공해 성공에 대한 체엄을 나누고 편편한 운동장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애터미는 성공에 대한 체험을 민주화한 회사이다.” - P 383



책에서는 애터미가 어떻게 자기 회사의 종업원들에게 열의를 북돋워야 할까를 종업원체험을 통해서 국면마다 온전한 사람으로 일으켜 세우는 성장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들은 존재목적, 긍휼, 혁신, 신뢰잔고라는 선명한 계기판으로 고공비행 중이다. 세계적 네트워크 마케팅 회사 암웨이를 앞지른지 이미 몇 년이 되었다. 본질에 충실한 기업들과 합작으로 소비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적정선을 찾아 고품질의 것을 적정하게 책정한다. 1품종 1기업의 기본 신의를 지키고 거래사들과는 현금 결제는 기본이고 선결제도 감행한다. 직원들의 4일제 근무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자발적인 사회 공헌으로 기부의 새역사를 써가고 있다. 2021년 말 기준 글로벌 포함 매출 2조 2,000억 원, 회원 수 1,600만 명, 23개의 국외법인을 거느린 회사가 되었다.



공의기업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분리되지 않고, 나선형의 구조를 이루며 나아가고 의미를 창출한다. 현재에 서서 미래를 선택하여 초깃값으로 자기 조직화한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에 불과했던 일렁임이 전 세계를 흔드는 태풍이 된다. 에터미는 미래의 주인인 아이와 그를 양육하는 일하는 여성과 협력업체를 자신들의 미래이자 주된 관심 공동체로 설정했다. 100년 기업을 꿈꾸며 긍휼감으로 돌보고 함께 할 미래로 생각했다. BTR(미국 내 200개 대기업) 연합체가 ’목적 경영‘에 기반한 ESG 가치를 선언한 지 1년 후였던 2020년, 이사회의 승인을 거친 후 서명한 기업이 1개뿐이라는 씁쓸한 기사를 봤다. 말로만 전 세계의 이슈를 일으켰을 뿐, 실천하는 목적 경영 기업이 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지구와 사회 공동체, 종업원을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ESG 운동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돕는다고는 하고 전 세계가 ESG 경영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관 어디에서고 다 ESG를 끌어다 쓴다. ESG는 방법론적으로 떠들 무언가가 아니다. 실천의 삶으로 기업의 문화가 되어야 할 절대성을 지닌 기준이다. 세계 최대 투자회사인 핑크 래리가 매년 연초에 자신들의 투자회사들에게 서한을 보낸 내용에서도 확실하고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ESG에 기반한 기업의 존재이유, 목적 경영을 지향성으로 갖지 않는 기업들에게는 투자할 수없음을 분명히 고지한다.



비단 기업 환경만이 아니다. 개인 경영에 있어서도 자기조직화는 필수적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의미를 두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가야 혼선도 줄이고 지속가능한 삶을 설계할 수있다. 책은 사회 전반의 시대상, 자각적 자기로 살아가는 일, 공의기업의 방향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스스로 플랫폼이 되어 자원을 연결하고 운동장을 다지고 춤판을 벌여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도 오로지 집중할 것은 어떻게 거인의 어깨에 기댈 것인가가 아니라 거인을 물리고 내 내면의 탐색과 탐구로 나를 아는 일이 가장 귀하다. 나는 왜 존재하는지? 나는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어떨 때 가장 행복해지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방향성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곳곳에서 싱크홀을 만나고, 사막의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에서 망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속가능한 일들은 오로지 ’진실‘했을 때 가능성의 문이 열리고 끝까지 집념으로 불들 수 있게 된다. 자기자비로 나를 긍휼함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나는 좀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나면서 내 앞에 있는 타인도 그렇게 짠하고 애쓰는 존재임을 인식한다. 비로소 나를 지탱하던 애도가 그에게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너에 대한 애도가 시작된다는 것은 관계 맺음이고 긍휼감으로 상대의 고통을 헤아리는 행위이다. 나도 조직도 나의 존재 이유 안에서 자기로의 삶에 살게 되기를......



한달 후, 만나게 될 수강자들과 나눌 이야기들은 아마 이 책에서 많은 부분 영감을 얻게 될 것 같다. 여기에 영화 <작가 미상>,<더 디그>,<문신을 한 신부님> 쯤의 이야기가 덧대어진다면 제법 꼴을 갖추겠다. 초뷰카시대, 핫 잇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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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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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빈곤

 

헨리 조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환 선원,식자공으로 가난을 살다가 글솜씨가 인정되어 기자가 되었다. <진보와 빈곤>의 발간으로 시국연설가가 되었고 정치가를 꿈꾸며 연합노동당 후보로 뉴욕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 두 번째 선거 재도전을 며칠 앞두고 사망했다. 토지 공유제를 통한 가난 퇴치를 실행해보려고 시장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평생 가난한 입장에 있었던 그는 당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토지 사유제를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인간의 모든 불평등은 토지 사유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토지에 대한 평등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생산자들은 모두 노예에 불과하다고 했다.

 

 

생산성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데도 빈곤과 불평등이 더욱 촉발되는 이유로 토지소유자들의 지대를 꼽았다. 이 지대를 정부가 보유세로 환수하고 세금은 토지단일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배경에는 당시에도 이미 부가 한 쪽으로 편향되고 있어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위험을 예견하였던 바다. 지주들의 불로소득이 사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젊은이들의 예술적 감각으로 소호 가게나 창업을 하여 지역 전체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나면 어김없이 건물주들의 갑질이 시작되어 숱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선례를 낳았다. 우리나라처럼 국토가 작은데 인구가 많은 나라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될 수 있음은 누구라도 안다. 이제는 기본권인 주거권에 있어서도 주거비에 소요되는 비용이 수입의 1/3을 차지하는 일은 서울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자조와 탄식은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조차 '건물주'로 한정시키는 사태로 비약이 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한 비유를 볼 수 있을까?

 

 

생산력이 증가하는 데도 불가하고 임금은 최저 생계 수준으로 꾸준히 하락해 왔다. 이렇게 된 이유는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지대가 전보다 더 큰 폭으로 올라갔고 그 결과 꾸준히 임금을 인하시켜 왔기 때문이다 -296

 

 

노동의 소득이 클수록 노동이 그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해준 기회(토지)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더 커져가기에 실제 노동자들은 발전하는 문명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유효하다. 쿠바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설탕 가격 인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아이러니. 일부 지각있는 인사들에 의해 우리는 '공정무역'이라는 최소한의 양심 발휘를 통해 커피 원두를 생산하는 지역의 노동력에 정당한 값을 치루려는 노력들을 해오기도 했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지대에 의한 빈부격차는 더욱 커져가고 최저 계급 노동자의 야만성은 더욱 짙어진다. 최저 계급 노동자는 부의 한가운데에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야만인의 모든 박탈을 그대로 겪는데다 그나마 야만인들은 마음껏 취하는 개인적 자유조차 누릴 수 없어 실제로 야만인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다. 영화 기생충에서 이미 우리는 그 기시감을 충분히 맛봤다.

 

"그 어느 때든 토지를 소유한 자에게 그 땅에서 난 과실이 돌아간다. 하얀 양산들과 뻐기듯이 걸어가는 코끼리들은 토지 소유권의 정수이다." 라 한 브라민(인도의 최상계층)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나면 공장건설, 연수원 부지 확보 등의 명목으로 땅부터 확보해두지 않았나? 그들은 애궂은 나무만 심었다 허물다 하면서 도시가 재정비되고 땅가치만 오르기만 기다렸다. 그 뒤는 정보를 제공하는 정가의 검은 손들이 어김없이 뒷배로 버텨주었고.

 

 

흑사병이 돌던 14세기는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둔화되어 지대를 감소시키고 임금이 상승하는 일이 있었다. 반대로 헨리 8세 시대에 토지 독점화 시행과 동시에 토지를 불하받은 일부 귀족 가문들이 사유화하다시피 하여 지대 상승을 가져왔고 임금은 하락했다. 결국 부랑자와 거지들을 대거 양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때는 주인없는 땅에서 사금 노천광이 발견된 때문이었다. 조지는 역사 속에서 토지 소유가 노동력 임금에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 유래를 살핌으로써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인류가 인구 증가의 억제가 빈곤 퇴치의 주요 수단이라고 믿었던 바도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현대 사회가 말해주고 있다. 저출산 시대는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고 실업을 더욱 공고하게 하고 있다.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조지는 6가지 조치를 내어 놓았다. 1. 정부 비용의 절감 2. 노동자 계급의 교육 강화와 근검절약 습관의 촉진 3. 임금 상승을 위한 노동자들의 단결(노동조합) 4. 노동과 자본의 협동 5. 정부의지시와 간섭 6. 좀 더 광범위한 토지의 분배로 사회적 고통의 구제 수단을 삼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해결책들 역시 비효율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면서 결국은 토지 공유제로 가야 한다고 한다. 기득권들의 반발을 예상하는 바, 정의에 부합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으며 사회 발전의 경향과 부합하면서 다른 개혁안들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증명해 보이겠다고 한다.

 

 

그는 자연은 과연 사유제를 허락할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묻는다. 자연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속성인 것을 토지 소유권은 모두 강제적 권력이 집행한 바로 무력에 의해 취득된 것이므로 정의에도 어긋난다. 원주민을 내쫓은 역사를 수없이 봐왔던 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변형들이 지금도 대규모 재개발 단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토지를 기반으로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은 없고 서류 상의 명의만 중요한 세상. 재산권이 생존 기본권을 상회하는 비인간적 구도를 곳곳에서 만나고 있지 않은지. 조지이스트를 만들만큼 그의 사상은 확실히 급진적이었다. 사회주의자나 이상주의자들이 추앙할 이유가 충분하다. 토지 사유제는 토지의 선용도 방해할 것이라 했으나 토지를 빌려서 자신의 목적대로 바꿔서 사용하는 사례들은 이제는 흔한 일이다. 지하철 역을 짓고 203050년 후 상환을 하는 식으로 역사 개발을 한다든지, 민자도로의 예들이 숱하다. 중국은 개방정책을 펴면서 70년 임대 제도를 통해 국가 기반 사업조차 개인이나 조직에게 맡겨 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조지의 주장이 가깝게 구현되어 있는 꼴이다.




 

내가 요즘 주요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은 건강한 주거공동체 커뮤니티를 확산시키려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이유의 고립은 말할 것도 없고 단절화되어 이기심으로 인간 고유의 선한 의지들이 자꾸 사라져가는 세태에 인간에 대한 따로 또 같이 존중문화를 만들려 한다. 함께 공동체주택을 꿈꾼다는 것은 토지에 기반한 재산권을 일 순위로 둔 게 아니다. 관계,이야기,삶의 목적이 살아있는 사람만의 고유성, 선한 미덕을 함께 나누는 데 가장 목적을 둔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의 재산권마저 공동으로 하겠다는 원칙을 수용하는 상태다. 조지가 제도적으로 사회문제를 변혁하고자 하던 꿈은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상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방향성조차 잃었다. 결국 각자도생의 국면에서 약한 이들은 연대해서라도 스스로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 필요가 절대적이다. 안전지대에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행복의 기준을 다시 써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주공동체를 꿈꾸는 일들은 탐욕을 버리겠다는 작은 선언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로서가 아닌 인간성 회복이 주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위한 다양한 노력과 대안들이 필요하다.

 

 

614쪽에 이르는 이 책을 읽어내리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결국 뒷부분을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기록으로라도 남긴다. 끊임없이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면서 도전과 응전의 양상도 달라져야 하는데 130 년 전 시국을 반영한 저술이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많다. 인간은 늘 진보하고 있다고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진보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진보 속의 빈곤은 더욱 처참하다. "오늘날 우리의 번성하는 문명 한 가운데서 여자들이 과도한 노동으로 기절을 하고, 어린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신음을 하고 있으므로 그 고통에서 구제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조지는 그 어떤 곤란한 상황도 회피하지 않으려 했고 또 어떤 결론에도 위축되지 않고 진실이 자신을 이끄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따라갈 생각이라며 진보와 빈곤의 어깨동무를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내야 할 책임을 잊지 않았다. 그의 긍휼감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절실한 정신임이 아프다. 우리 인류는 그때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진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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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마음에 남아 - 매일 그림 같은 순간이 옵니다
김수정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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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 그림같은 시간이 왔다.그림은 마음에 남아.'
저자 김수정의 말을 따라 해본다. 파스텔빛 그림 에세이집 <그림은 마음에 남아>가 지난 주말 고성 거진항 여행의 동반자가 되었다. #달리는도서관 이 장거리 출장을 떠난 셈이다.

일렁이는 바다가 요람이었던 듯,이틀 내내 출렁이고 철썩였다. 이리 통렬히 바다를 껴안아본 적이 있었던가?13 여년전 쯤 부산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빛에 취해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추억을 불러오듯 오롯하게 바다에 묻혔다. 한동안 주말이면 한걸음 줄달음쳐 가서 쥐죽은 듯 파도와 뒹굴대며 자다가만 왔다던 그녀를 이제야 이해할 듯했다. 깊은 수면으로 다시 다음 일주일을 살아내는 힘이었다고 했다. 설레임으로 미열을 앓듯 웅웅대며, 밤새 뒤척이는 파도와 함께 <그림은 마음에 남아>에 젖었다. 전전반측 잠못 드는 순간을 아끼고 아꼈다.

도시에 기생하여 바쁜 회로속에서 뿌리를 깊게 드리우지 못하고 허둥대는 나,관계 속에서 급속도로 피로도를 느끼며 지쳐가는 나,합리화와 효율성의 논리로 극심한 노동강도에 시달리는 나,관습과 편견의 벽에 가로막혀 말길을 내지 못하는 나. 그 외에도 많은 모습을 한 내가 내 안에서 복닥대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 모습은 다름아닌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나와 너가 김원숙 화가의 '외줄타기'(그림1)에서 아슬아슬 경계를 넘고 있었다. 슬픔마저 숨죽인 고요로 그 팽팽한 긴장을 맛보았다.

'슬픔은 거대한 것이다.감히 평가할 수없는 크기이며,감히 참견할 수 없는 깊이이며,감히 조언할 수 없는 복잡함이며,감히 직면하기 두려운 세상의 불합리함이다.누군가의 슬픔에 참견하지 않는 것,그 슬픔 곁에 그저 머무는 거,그의 슬픔을 존중하는 것만이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162쪽

그래서 저자는 윌터 랭글리의 '슬픔은 끝이 없고'(그림2)를 가만히 배치해뒀다. '아침 슬픔을 저녁까지 입지 말라 했건만 가슴은 쪼개지는구나'라고 자신이 해석한 느낌의 언어를 덧붙여서......공자는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忠과 恕로 정리했다. 자신에겐 흔들림없는 적중한 마음(중용)을 유지하길 요구하고(中心),타인에 대해선 내 마음 같게 하라고 한다(如心). 젊은 여자를 위로하는 노로의 여인의 온 태도가 내 마음처럼 여긴 측은지심을 담고 있다. 여명을 담은 바다는 냉정하리만치 부동심으로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을 가만 바라보며 나는 나대로 내가 오래도록 기대고 있었던 슬픔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내 슬픔이든 타인의 슬픔이든 섣부른 참견을 말아야 한다. 그저 그의 슬픔을 가만히 존중하고 하염없이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긴 슬픔끝에 깨어나는 내가 혹은 그들이 무색하지 않도록......

이스트먼 존슨의 '살짝 엿보기'(그림3)를 보다가 얼마 전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저 아가처럼 토닥토닥 나를 안아주며 위로를 아끼지 않던 울 아들 원정이.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태도도 여러 모습이 필요하다. 친밀도에 따라서 위로의 결도 달라야 마땅할 일이다. 어느새 훌쩍 자라 성인이 된 아들이 주던 위로는 위안으로 안착하기 충분했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기억되어야 하고,존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아야 하기에.' 그래서 우리는 봄만 되면 그 노래,벚꽃엔딩을 흥얼대고 추억을 소환하게 되나보다. 저자는 요제프 리플로너이의 '벚꽃 만개'(그림4) 작품 속 여인의 뒷 실루엣에서 첫사랑을 부른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음직했던 첫사랑의 열병을,그 깊은 슬픔을,다시 순수의 기억을......만개한 벚꽃 무너미에서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 가만히 안아주고프다.

'놀라운 화가의 그림을 보면 나의 눈과 그의 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재능과 노력은 다른 영역에 있고,세상에 재능만큼 잔인한 것이 없다. 현실의 내 재능은 부족해 슬프지만 한편으로 그의 눈을 빌려서라도 세상을 보고 싶다. 이 열망이 나를 지탱한다. 클로드 모네는 내게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245쪽

저자는 화가들의 재능을 시샘하고 있으나,난 그 화가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끌어가는 그녀의 눈밝음에 시샘한다. 매일 그림과 함께 무한한 상상력과 느낌을 물에 물감을 풀어,사람의 마음 속에고상하고 우아한 자신만의 그림을 물들이고 있다. 때로는 시어가 되고 때로는 상념이 되어 끝도 없는 천일야화를 직조하고 있다. <안목에 대하여>를 쓴 필리프 코스타마냐는 다양한 작품을 봐야 하며 직접 미술관에서 세밀하게 관찰하며 느낄 때 비로소 그림을 아는 것이라 했다. '발견된 작품은 복잡한 역사를 품고 있다'고 했다. 진품과 위작을 가려내는 일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테다. 저자의 눈에 띤 혹은 발견된, 더 나아가서는 교감한 작품들은 모두 일상성에서 비롯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품고 있다. 그녀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랄지,사람을 향한 그녀의 수줍은 애정이랄지 결국 그녀의 안목은 그녀가 살아내고 포개고 닿은 시선과 눈빛의 함량이 아닐지......

밤을 지새고 다시 움트는 신새벽 바다는 신비로운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생각을 비우고 도시의 소음과 환영들을 지우고 한껏 나태해져 책 한줄 읽다가 포말을 헤이다가 어느새 잠들었다가.....신비로운 푸른 빛을 따라 사유는 출렁이고. 후두두둑,드디어 창가에 빗금을 그어대는 물방울의 유희에 빙글빙글 어지럽다가 다시 뒹굴어진다. 존 화이트 알렉산더의 '휴식'(그림5)처럼 완전한 휴식.

청량한 빗소리가 파도와 결탁하여 연신 '나 잡아봐'를 한다. 포슬한 감자와 향긋한 과일을 배어 물며,나와 벗들은 삶을,일을,사람을,사랑을 논한다. 수용과 지지,연대를 오가며 서로 위무하고 토닥인다. 적어도 오늘 우리가 엮어낸 '관계'의 직조물은 어쩌면 안프랑수아루이 장모 작품 '영혼의 시-산에서'(그림6)를 닮아있었을지도 모른다. 발그레 물든 뺨으로 이끌고 따르며 '그 곳'을 향하는 길. 순간순간의 씨실과 날실이 그려내는 무늬는 어느새 자신만의 '만다라'를 그려내고 있다.

'당신의 인생 가운데 당신이 넣은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라.그런 당신이 아름답지 못할 리가 없다.맑고 투명한 그대여,그대에게 투명함이 주는 기쁨이 오늘도 내일도 또다른 내일까지.매일 더 새롭기를 구한다.'자,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우리가 서로에게 보낸 축원이 이러하지 않았을까?마음에서 마음으로 닿은 그림들에 빗대 더더욱 소중해진 그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향한 축원은 내 영혼마저 맑히는 순간이다. 또 어느새 단잠에 빠진 벗들을 위해 가만가만 까치발로 저자 Soo Jung Kim의 '그림마음방'(그림7)회랑을 돌아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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