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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평점 :
”오늘날은, 오래전부터 영혼 없는 아름다움에 길들여진 저 대도시의 공허 속보다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더 나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114쪽
그래서였을까? 카뮈는 사색을 멈추고 그저 살아있음의 ‘순진성’을 느끼러, 오랑에 닿았던 모양이다. 그가 이르는 곳곳은 사막보다 더 성글고 거친 돌들이 그를 맞을 뿐이다. ”바다는 푸르른 군청색이고, 길은 응고된 피처럼 검붉고, 해안은 노랗다. 이 모든 것이 태양의 녹색광선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110쪽. 나눠 가질 수 없는 느낌은 오로지 체험으로만 알게 된다며 그곳에서 느낀 고독과 위대함으로 오랑의 얼굴을 부여했다. 다만 그것이 좋았다는 것만을 기억하는 일. 지금-여기의 현존을 즐긴 것으로 충분하다. 온통 그러하다. 까뮈는 이르는 곳곳을 그저 날 것 그대로 기억하고 기술한다. 수도원에서 더 이상 고독과 사색의 단초를 찾을 이유가 없고 권태로워질 때까지 머무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고 보니 여름휴가라고 이름 지은 삶의 이벤트를 더 이상 하지 않은 지 여러 해 되었다. 도시와 결별하고 내려와 산 이유도 있을 것이고, 마음의 경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삶과 일, 일과 여가가 혼재 통합된 채, 시간의 구속을 따로 둘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거주 공간에서도 온통 푸르름을 만나고 집을 나서기만 해도 하늘의 푸르름을, 투명한 물소리를, 무시로 느끼는 바람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까뮈가 만난 하늘과 바다와 바람은 아니었으되 순진한 자연과 교감하고 지도를 그려간 마음은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사막’으로 표현한 까뮈의 사막일지는 온통 매력으로 그득하다. 어떻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지 그의 언어 미노타우로스 마궁에 흠씬 빠져든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일부러 놓치고 싶다.
”세계의 이러한 영속성엔 늘 인간과는 상반되는 위엄이 있다. 영속성은 인간을 절망시키고, 또한 흥분시킨다. 세계는 절대로 단 한 가지만을 말하지 않는다. 세계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가, 지루해진다. 하지만 끝끝내 고집스럽게 우리를 이기고 만다, 세계는 늘 옳다,“ - 108쪽
삶을 통째로 끌어안은 카뮈는 세상은 ‘관능의 풍요와 극도의 궁핍’은 일치한다는 것을 안다. 씁쓸함이 수반되지 않는 진실이란 없으며, 장수하고 싶은 욕망과 죽을 운명에 대한 이중의 자각의 조화를 이해한다. 그래서도 아무 것도 기대지 말아야 하며, 오직 현재만을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유일한 진실로서 간주하고 있다. 그가 오른 피렌체의 언덕, 피에솔레에서 만난 빨간 꽃. 한 존재와 삶 사이의 일치로 행복을 말한다. 양평에 들어와서 근 일 년을 가만히 지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카뮈는 아몬드나무들이 매년 열매를 맺을 준비에 딱 필요한 만큼씩 견뎌내 2월의 어느 날 하룻밤만에 하얀 꽃을 피워내던 순리에서 강한 의지력을 잊지 말아 무거움의 정신이라는 악을 이기자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면서 부단히 발전해왔으며 우리의 조건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고. 카뮈가 생각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란 뭘까? 어쩌면 자유로운 영혼들이 수시로 빠지는 불안의 늪에서 헤어 나올 몇 가지 처방을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삶에의 긍정성. 그 자신이 건너온 삶의 여정, 무지와 냉대의 늪에서 손을 내밀었던 친절한 눈과 손에의 기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게 하고 수용하게 한 것이리라. L.제르망, 장 그르니에, 피에르 갈랭도 등 그를 따듯이 비추었던 인간 태양광들. 자신이 머문 곳에 대한 단상을 한 편 한 편 완성하고 나눔으로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 느낌이다.
내가 브런치스토리를 쓴 지 55일 째.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읽으며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봐주는 벗이 있다. 내 글의 완성은 그가 보는 순간에 종결된다. 신산한 삶이 좀 묽어진 이유이다. 고등학교 때 장 그르니에의 <섬>을 만나 마냥 좋아서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무한정으로 선물했었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전해진 마음이 한 호흡으로 나눠졌던 적은 없어서 늘 허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까뮈와 장 그르니에의 사제 관계를 넘어선 문우로서의 사랑이 특히 아름답다 여겼다. 그 둘은 서로에게 배어나고 물들고 스며들어 있었다. 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의 교분은 감성을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꿈꾼다. 행간을 더듬고 만져줄 벗을.
프로메테우스가 천형을 지고 인간에게 가져다준 ‘불과 자유’, ‘기술과 예술’을 우리는 그 쓰임을 지키고 있는가? 카뮈는 양 차 대전 후 도처에 널린 절규와 고통 위협의 역사 앞에 무력한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를 배반했다고 단언했다. 비단 그때뿐이 아님을, 지금 내가 발붙인 이곳에서도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필요하다. 권력에 중독된 이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다정한 인사를 잃은 서로는 물고 할퀸다. 죽음의 극단에서야 ‘사람’이 소리 없는 외침을 하고 있었음을 안다.
카뮈는 <결혼>편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알제리의 티파사, 제밀라와 알제 등의 지역에서 자신이 사랑한 것들을 소개한다. 또 추억과 예술 작품, 희귀한 유물로 넘쳐나는 과거를 간직한 이탈리아의 피렌체 수도원들을 돌면서 만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결혼한 신부를 바라보듯 은밀하고도 깊게 만난다. <여름> 편에서는 과거가 없이 권태의 시간만이 가득한 알제리의 오랑, 콩스탕틴 같은 곳에서 만난 사유들을 풀어낸다. 머뭇대는 사람들을 붙잡아 마비시켜 모든 질문을 차단한 채, 매일의 삶 속에서 잠들어버리게 하는 곳에서 인간의 의지력에 대해 다시 삶을 긍정하는 태도에 대해, 생을 살아가는 마음들에 대해 기꺼이 돌아본다. 정신보다는 마음이 우선하기를 바라면서. 그의 시선을 쫓자니 알제리의 모순적인 여름을 끌어안고 싶어진다. 이런 치명적인 유혹이라니......
”다만 긍정과 부정, 정오와 자정, 반항과 사랑 사이에서 찢기는 고통을 아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바닷가의 모닥불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그곳엔 그들을 기다리는 불꽃이 있으니.“-137쪽
‘헬레네의 추방’ 편은 그리스와 유럽의 철학적 원류를 비교하며 사유를 풀어냈다. 유럽이 이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전제주의적 제국주의를 꿈꾸는 발상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무지의 불인정, 광신,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기형을 부르고 있음을 통찰한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고요한 하늘과 이치를 인간의 광기에 대립시키며 균형을 이루려 한다. 유럽 제국의 광폭한 폭력성이 역사 이전에 존재했던 자연의 세계, 헬레네 아름다움을 몰살시킨다. 이성에 의한 힘의 군림이 아닌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의 복원을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자본 물질주의의 노예가 된 너와 나도 헬레나의 추방에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특히 자연의 무심함이나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에너지를 보충하는데 이 두 요소를 걷어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게는 심폐소생술이나 다름없다. 부디 예술가들이여, 삶이 곤궁하고 노할 일 가득하더라도 그대의 창작 의지를 꺽지 말라.
”공간과 침묵은 똑같은 무게로 가슴을 누른다. 갑작스러운 사랑, 위대한 작품, 결정적인 행동, 빛나는 사상은 어느 순간 저항할 수 없는 매혹과 함께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준다. 존재의 달콤한 번민,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위험의 감미로운 임박, 그렇다면 사는 것은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다시 한번, 쉼 없이.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188쪽
”나는 늘 먼 바다에서 위협받으며, 고귀한 행복 한가운데서 사는 기분이었다.“ -188쪽 마지막 문장
실컷 자연을, 생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던 그가 항해일지 안에서는 두려움과 불안과 마주하고 있다 싶어 더불어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는 불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자체도 수용하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감이 곧 고귀한 행복임을 알려주는 역설이다. 카뮈다운 결론이다. 부조리에 대한 인식과 저항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 껴안고 자기 창조로 새로운 극복을 보여준다.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빛’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삶의 수수께끼로서 다만 판독하기 어려워서 유예하고 견디는 것이지 회피하지 않는다. 삶에 던져진 그 어떤 것도 배제시키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는 삶에의 굳건한 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카뮈는 소녀시절의 나와, 청년기의 나와, 중년기의 나와, 장년기의 나와 내내 함께 한다. 나는 누구보다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긍정하며 빛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기에. 주말이 모처럼만에 향기롭다.
덧 : 녹색광선 출판사의 안목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표지가 주는 기쁨을 함께 누린다. 그에 더해 번역가 장소미님은 무조건 믿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