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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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빈곤

 

헨리 조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환 선원,식자공으로 가난을 살다가 글솜씨가 인정되어 기자가 되었다. <진보와 빈곤>의 발간으로 시국연설가가 되었고 정치가를 꿈꾸며 연합노동당 후보로 뉴욕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 두 번째 선거 재도전을 며칠 앞두고 사망했다. 토지 공유제를 통한 가난 퇴치를 실행해보려고 시장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평생 가난한 입장에 있었던 그는 당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토지 사유제를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인간의 모든 불평등은 토지 사유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토지에 대한 평등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생산자들은 모두 노예에 불과하다고 했다.

 

 

생산성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데도 빈곤과 불평등이 더욱 촉발되는 이유로 토지소유자들의 지대를 꼽았다. 이 지대를 정부가 보유세로 환수하고 세금은 토지단일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배경에는 당시에도 이미 부가 한 쪽으로 편향되고 있어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위험을 예견하였던 바다. 지주들의 불로소득이 사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젊은이들의 예술적 감각으로 소호 가게나 창업을 하여 지역 전체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나면 어김없이 건물주들의 갑질이 시작되어 숱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선례를 낳았다. 우리나라처럼 국토가 작은데 인구가 많은 나라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될 수 있음은 누구라도 안다. 이제는 기본권인 주거권에 있어서도 주거비에 소요되는 비용이 수입의 1/3을 차지하는 일은 서울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자조와 탄식은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조차 '건물주'로 한정시키는 사태로 비약이 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한 비유를 볼 수 있을까?

 

 

생산력이 증가하는 데도 불가하고 임금은 최저 생계 수준으로 꾸준히 하락해 왔다. 이렇게 된 이유는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지대가 전보다 더 큰 폭으로 올라갔고 그 결과 꾸준히 임금을 인하시켜 왔기 때문이다 -296

 

 

노동의 소득이 클수록 노동이 그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해준 기회(토지)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더 커져가기에 실제 노동자들은 발전하는 문명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유효하다. 쿠바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설탕 가격 인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아이러니. 일부 지각있는 인사들에 의해 우리는 '공정무역'이라는 최소한의 양심 발휘를 통해 커피 원두를 생산하는 지역의 노동력에 정당한 값을 치루려는 노력들을 해오기도 했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지대에 의한 빈부격차는 더욱 커져가고 최저 계급 노동자의 야만성은 더욱 짙어진다. 최저 계급 노동자는 부의 한가운데에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야만인의 모든 박탈을 그대로 겪는데다 그나마 야만인들은 마음껏 취하는 개인적 자유조차 누릴 수 없어 실제로 야만인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다. 영화 기생충에서 이미 우리는 그 기시감을 충분히 맛봤다.

 

"그 어느 때든 토지를 소유한 자에게 그 땅에서 난 과실이 돌아간다. 하얀 양산들과 뻐기듯이 걸어가는 코끼리들은 토지 소유권의 정수이다." 라 한 브라민(인도의 최상계층)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나면 공장건설, 연수원 부지 확보 등의 명목으로 땅부터 확보해두지 않았나? 그들은 애궂은 나무만 심었다 허물다 하면서 도시가 재정비되고 땅가치만 오르기만 기다렸다. 그 뒤는 정보를 제공하는 정가의 검은 손들이 어김없이 뒷배로 버텨주었고.

 

 

흑사병이 돌던 14세기는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둔화되어 지대를 감소시키고 임금이 상승하는 일이 있었다. 반대로 헨리 8세 시대에 토지 독점화 시행과 동시에 토지를 불하받은 일부 귀족 가문들이 사유화하다시피 하여 지대 상승을 가져왔고 임금은 하락했다. 결국 부랑자와 거지들을 대거 양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때는 주인없는 땅에서 사금 노천광이 발견된 때문이었다. 조지는 역사 속에서 토지 소유가 노동력 임금에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 유래를 살핌으로써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인류가 인구 증가의 억제가 빈곤 퇴치의 주요 수단이라고 믿었던 바도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현대 사회가 말해주고 있다. 저출산 시대는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고 실업을 더욱 공고하게 하고 있다.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조지는 6가지 조치를 내어 놓았다. 1. 정부 비용의 절감 2. 노동자 계급의 교육 강화와 근검절약 습관의 촉진 3. 임금 상승을 위한 노동자들의 단결(노동조합) 4. 노동과 자본의 협동 5. 정부의지시와 간섭 6. 좀 더 광범위한 토지의 분배로 사회적 고통의 구제 수단을 삼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해결책들 역시 비효율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면서 결국은 토지 공유제로 가야 한다고 한다. 기득권들의 반발을 예상하는 바, 정의에 부합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으며 사회 발전의 경향과 부합하면서 다른 개혁안들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증명해 보이겠다고 한다.

 

 

그는 자연은 과연 사유제를 허락할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묻는다. 자연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속성인 것을 토지 소유권은 모두 강제적 권력이 집행한 바로 무력에 의해 취득된 것이므로 정의에도 어긋난다. 원주민을 내쫓은 역사를 수없이 봐왔던 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변형들이 지금도 대규모 재개발 단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토지를 기반으로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은 없고 서류 상의 명의만 중요한 세상. 재산권이 생존 기본권을 상회하는 비인간적 구도를 곳곳에서 만나고 있지 않은지. 조지이스트를 만들만큼 그의 사상은 확실히 급진적이었다. 사회주의자나 이상주의자들이 추앙할 이유가 충분하다. 토지 사유제는 토지의 선용도 방해할 것이라 했으나 토지를 빌려서 자신의 목적대로 바꿔서 사용하는 사례들은 이제는 흔한 일이다. 지하철 역을 짓고 203050년 후 상환을 하는 식으로 역사 개발을 한다든지, 민자도로의 예들이 숱하다. 중국은 개방정책을 펴면서 70년 임대 제도를 통해 국가 기반 사업조차 개인이나 조직에게 맡겨 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조지의 주장이 가깝게 구현되어 있는 꼴이다.




 

내가 요즘 주요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더함플러스협동조합은 건강한 주거공동체 커뮤니티를 확산시키려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이유의 고립은 말할 것도 없고 단절화되어 이기심으로 인간 고유의 선한 의지들이 자꾸 사라져가는 세태에 인간에 대한 따로 또 같이 존중문화를 만들려 한다. 함께 공동체주택을 꿈꾼다는 것은 토지에 기반한 재산권을 일 순위로 둔 게 아니다. 관계,이야기,삶의 목적이 살아있는 사람만의 고유성, 선한 미덕을 함께 나누는 데 가장 목적을 둔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의 재산권마저 공동으로 하겠다는 원칙을 수용하는 상태다. 조지가 제도적으로 사회문제를 변혁하고자 하던 꿈은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상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방향성조차 잃었다. 결국 각자도생의 국면에서 약한 이들은 연대해서라도 스스로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 필요가 절대적이다. 안전지대에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행복의 기준을 다시 써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주공동체를 꿈꾸는 일들은 탐욕을 버리겠다는 작은 선언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로서가 아닌 인간성 회복이 주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위한 다양한 노력과 대안들이 필요하다.

 

 

614쪽에 이르는 이 책을 읽어내리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결국 뒷부분을 다 읽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기록으로라도 남긴다. 끊임없이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면서 도전과 응전의 양상도 달라져야 하는데 130 년 전 시국을 반영한 저술이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많다. 인간은 늘 진보하고 있다고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진보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진보 속의 빈곤은 더욱 처참하다. "오늘날 우리의 번성하는 문명 한 가운데서 여자들이 과도한 노동으로 기절을 하고, 어린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신음을 하고 있으므로 그 고통에서 구제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조지는 그 어떤 곤란한 상황도 회피하지 않으려 했고 또 어떤 결론에도 위축되지 않고 진실이 자신을 이끄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따라갈 생각이라며 진보와 빈곤의 어깨동무를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내야 할 책임을 잊지 않았다. 그의 긍휼감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절실한 정신임이 아프다. 우리 인류는 그때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진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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