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부를 축적한 계급은 성안에 살고, 그렇지 못한 계급은 성 밖에서 살았다. 성안에 사는 신흥 상공업 계층을 프랑스어로 ‘성(城)을 의미하는 부르그(bourg)에서 착안해 부르주아(bourjeois)라고 일컫게 된다. 현재 부유 계층을 가리키는 부르주아라는 말은 ‘성안에 사는 돈밖에 모르는 쓰레기들‘에서 유래된 것이다. - P25

정리해 보면 중농주의자들은 농업이라는 생산을 통해서이윤을 창출하고 국가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중상주의자들은 화폐의 유통을 통해서 이윤이 창출될우리아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론은 경제학의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와 인구론을 주장한 맬서스까지 이어져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 고전경제학의 근거가 된다 - P27

케인즈와 폴크루그먼이 인정했듯이, 세계 대공황에서 미국을 구한 것은 뉴딜정책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물론 케인즈는 정부 재정지출의 확대라는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과잉생산 없이 모두 정부에 의해서 재화가 소비된다는 측면을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는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일관되게 흘러오는 전통이었으니 말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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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리아스의 뒤를 이은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는 이러한 절실한 마음을 담아 AD 754년 피핀에게 기름을 한 번 더 부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양동이째 퍼부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피핀은 정성 어린 기름을기쁘게 뒤집어쓴 뒤 확실한 대가를 지불했다. AD 755 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교황을 지켜준 데 이어 동로마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윈-윈Win-Win이었다. 이때부터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 일대를독자적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교황령Papal State의 시초이다. 성스러운 왕이 세속의 왕과 점점 차이가 없어지는 과정이다. - P486

봉토를 받은 봉신들은 그 땅의 생산물로 먹고살며 기병을 육성해야 했다. 즉 자급자족하며 힘도 기르는 독립적인 권력자였던 것이다. 칼 마르텔은 이 독립적인 권력자들에게 각각 게르만식의 충성서약을 하게 만들었다.
개별적인 계약을 한 것이다. 봉토는 마르텔에 대한 군사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데 대한 대가였다. 봉신들은 토지를 받으면 봉사를 해야 했고 봉사를하지 않으면 토지는 몰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 봉건제가 만들어지는과정이다. 마르텔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봉신들이 많아야 대규모의 기병을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기병을 늘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토지가 필요했고, 토지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전쟁이 곧 비즈니스였던 것이다. - P492

황소의 난은 당을 멸망으로 이끈 사건이다. 이는 안사의 난과 곧잘 비교되는데 안사의 난이 당의 정치제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황소의 난은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사의 난이 절도사라는 지배 세력의 반란이라면 황소는 농민이라는 민중 세력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당의 전반과 후반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은 이렇듯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 P546

분열 시대와 통일왕조 시대의 가장 큰 차이는 갈등의 형태라고 할 수 있PET다. 전자의 갈등은 국가 간의 경쟁, 즉 전쟁을 말하고 후자의 갈등은 내부자들 간의 경쟁, 즉 권력 투쟁을 말한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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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표현 자체가 애초부터 세계사를 서유럽 중심으로보려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AD 5세기부터 천 년 동안의 암흑은 서유럽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므로, 중세라는 말의 앞에는 반드시 서유럽이라는지역명이 붙는 것이 옳다. 이 시대의 동유럽만 하더라도 동로마 제국, 즉비잔티움 제국이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그 전통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유럽과 접한 서아시아, 과거 로마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는 아라비아인들이 또 다른 화려한 문명을 건설하였으며, 중국은 눈부시도록 찬란한문화를 꽃피웠다. 암흑은 개뿔. 서유럽을 제외한 모든 대륙은 이때야말로성기를 누리며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강대하게 성장했다. 서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서유럽과 한 덩어리로 같이 묶일 이유가 없었다. - P324

시기적으로 게르만족에 의한 서로마의 멸망과 이슬람의 유럽 침입은250년 정도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의 붕괴는 유럽 사회를 바꾸지 않았으나, 이슬람의 침입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명의 진입이자 충돌이었다는 것이다. - P329

프랑크족의 전통 법인 살리카법을 따르면 어떠한 국가도 강대국이 되기어려웠다.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어느 정도 규모가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법 아래서는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크게 성장시킨다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떠날 때면 아들의 숫자만큼 나라가 쪼개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국력이 축소되는데, 분열된 나라들은 분쟁을 피할 수 없다. 운이 좋아 그나라들이 다시 통일되어 영토를 회복한다 해도 기능적으로 분열 전의 수준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무슨 낭비인가. - P367

양견의 수는 여러모로 진시황의 진출을 닮았다. 전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라는 오랜 분열을 마감한 것과 영토의 통일에 맞춰 여러 제도적인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는 점 등. 무엇보다 얼마 안가 멸망하였다는 것과 그 뒤를 이은 왕조가 혜택을 입어 번영하였다는 것도 닮은 점이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표현을 가져오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의 멸망은 한이라는 진정한 통일시대를,
의 멸망은 당이라는 국제화 시대를 열었다. 181 여러 이유로 수, 당은 전대의진, 한과 많은 비교가 된다. - P387

과거제는 이전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인재 등용방법으로 그 파장이 매우컸다. 이전의 구품중정제대표되는 추천 방식의 등용제는 수백로
년 동안 이어져 온 제도였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에서 전통적인 제도를 대신해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다는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계급제도 자체를 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후광이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한 이 제도는 기득권 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는 양견이 노렸던 효과이기도 하다. - P388

인류 역사시대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1만 년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의 시작부터 따져 5천 년으로 보았을 때 중동은 5천 년 중 4천년을 유럽과 같이 살았다. 진정한 동양과 접촉한 시간은 천 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중동과 중국이 한 덩이로 묶여 있는 것이다. 중동이 무슨깍두기인가. - P399

지도는 종교와 역사의 수많은 의미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시각 자료이다.
결국 유럽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이 차별 의식은 상대에게 어떠한행위도 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에서 행해진 납치와 학살, 인종 청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 신앙심이라는 자기변명이 더해지면 양심이라는 최후의 장치마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각국이 그토록 노력하지만 쉽게 개선되지 않는 인종차별 의식의 형성에 지도가 너무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만든 대륙의 구분과 그들이 만들어낸지도는 이렇게 인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도는 매우 조심스럽게 만들고 다루어야 할 물건인 것이다. 이는 지도를 이용한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다. - P402

황제의 행동은말로 내리는 어떠한 명령보다도 아랫사람에게 강하게 어필된다. 입만 나불거리는 썩은 위정자를 보는 백성의 시선은 고금이 다르지 않기에 군주의이 같은 노력은 재정 확충과 민생안정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났다. 역사는이러한 수문제의 치세를 ‘개황의 치‘라 부른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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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의 단일 왕조 북위 영향력을 고려하였을 때 북위는 남북조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다. 130년 5호 16국 시대를 마감하고 AD 534년 동위·서위로 분단될 때까지 100년간 화북 전체를 다스렸던 북위는 중국 역사에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인 호한융합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호한융합은 북방의 유목민족이 중원의 농경민족으로 흡수되는 현상을 뜻한다. - P227

그 ‘차이‘를 만든 사람 중 하나가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첫째 아들 아르카디우스이다. 아르카디우스는 우수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재위또한 13년에 그쳐 28년 동안 서로마를 지배했던 동생 호노리우스에 비해짧았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가 취했던 하나의 조치가 후세에 높은 평가를받는다. 그것은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Yazdegerd I에게 자신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 P278

아무리 강한 군대도 배신이는 장사가 없다. 역사는 어떤 외적보다도 내부의 적이 더 치명적일 수 있음을수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 로마가 마주했던 마지막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 P299

위진남북조 시대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중국이 정치적으로 한족과 이민족, 즉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이 융합되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된 시기였고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궤도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유.불.선 사상이 혼재되어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유목문화가 섞이게 된 화북과, 화북의 한족이 내려와 섞인 강남에 각각 독특한 문화가 발달하는 등 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시기라 하겠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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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세계사 - 날마다 읽는 저항과 반란의 역사
워킹클래스히스토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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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지도자라 하는 인간들은 노동의 역사를 뒤로 돌리는 짓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스스로가 노동에 대해 잘 몰라서겠지요. 이 책이 노동에 대한 일깨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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