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표현 자체가 애초부터 세계사를 서유럽 중심으로보려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AD 5세기부터 천 년 동안의 암흑은 서유럽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므로, 중세라는 말의 앞에는 반드시 서유럽이라는지역명이 붙는 것이 옳다. 이 시대의 동유럽만 하더라도 동로마 제국, 즉비잔티움 제국이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그 전통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유럽과 접한 서아시아, 과거 로마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는 아라비아인들이 또 다른 화려한 문명을 건설하였으며, 중국은 눈부시도록 찬란한문화를 꽃피웠다. 암흑은 개뿔. 서유럽을 제외한 모든 대륙은 이때야말로성기를 누리며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강대하게 성장했다. 서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서유럽과 한 덩어리로 같이 묶일 이유가 없었다. - P324
시기적으로 게르만족에 의한 서로마의 멸망과 이슬람의 유럽 침입은250년 정도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의 붕괴는 유럽 사회를 바꾸지 않았으나, 이슬람의 침입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명의 진입이자 충돌이었다는 것이다. - P329
프랑크족의 전통 법인 살리카법을 따르면 어떠한 국가도 강대국이 되기어려웠다.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어느 정도 규모가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법 아래서는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크게 성장시킨다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떠날 때면 아들의 숫자만큼 나라가 쪼개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국력이 축소되는데, 분열된 나라들은 분쟁을 피할 수 없다. 운이 좋아 그나라들이 다시 통일되어 영토를 회복한다 해도 기능적으로 분열 전의 수준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무슨 낭비인가. - P367
양견의 수는 여러모로 진시황의 진출을 닮았다. 전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라는 오랜 분열을 마감한 것과 영토의 통일에 맞춰 여러 제도적인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는 점 등. 무엇보다 얼마 안가 멸망하였다는 것과 그 뒤를 이은 왕조가 혜택을 입어 번영하였다는 것도 닮은 점이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표현을 가져오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의 멸망은 한이라는 진정한 통일시대를, 의 멸망은 당이라는 국제화 시대를 열었다. 181 여러 이유로 수, 당은 전대의진, 한과 많은 비교가 된다. - P387
과거제는 이전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인재 등용방법으로 그 파장이 매우컸다. 이전의 구품중정제대표되는 추천 방식의 등용제는 수백로 년 동안 이어져 온 제도였다. 이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에서 전통적인 제도를 대신해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다는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계급제도 자체를 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후광이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한 이 제도는 기득권 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냈다. 이는 양견이 노렸던 효과이기도 하다. - P388
인류 역사시대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1만 년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의 시작부터 따져 5천 년으로 보았을 때 중동은 5천 년 중 4천년을 유럽과 같이 살았다. 진정한 동양과 접촉한 시간은 천 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중동과 중국이 한 덩이로 묶여 있는 것이다. 중동이 무슨깍두기인가. - P399
지도는 종교와 역사의 수많은 의미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시각 자료이다. 결국 유럽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이 차별 의식은 상대에게 어떠한행위도 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에서 행해진 납치와 학살, 인종 청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 신앙심이라는 자기변명이 더해지면 양심이라는 최후의 장치마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각국이 그토록 노력하지만 쉽게 개선되지 않는 인종차별 의식의 형성에 지도가 너무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만든 대륙의 구분과 그들이 만들어낸지도는 이렇게 인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도는 매우 조심스럽게 만들고 다루어야 할 물건인 것이다. 이는 지도를 이용한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다. - P402
황제의 행동은말로 내리는 어떠한 명령보다도 아랫사람에게 강하게 어필된다. 입만 나불거리는 썩은 위정자를 보는 백성의 시선은 고금이 다르지 않기에 군주의이 같은 노력은 재정 확충과 민생안정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났다. 역사는이러한 수문제의 치세를 ‘개황의 치‘라 부른다. - P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