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몸으로 부딪히며 습득하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회화책이라도 봐야겠지만, 정작 외국에 나가보면 회화책에 나오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없이 다양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살아 있는 언어는 회화책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문리는 회화책만으로 원어민 수준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아직도 한문을 백발이 성성한 한학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묻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고서는 노인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한문과 고서는 나이를 막론하고 고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가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학자의 시대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습니다.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문을 배운 한학자들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그들의 역할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학자 개개인의 한문 해석 능력은 탁월하지만, 지금은 전문 분야별로 특성화된 연구자들을 조직화한 연구자 집단에 대해 우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축적된 선행 연구와 방대한 DB로 무장한 연구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문헌을 발굴하고 다각도로 해석하여 문헌의 가치를 한껏 제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전의 가치를 되살리는 일은 순전히 젊은 연구자들의 몫입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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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관리들은 원시 시대를 살다가 왔나?

《관자》 <해왕海王> 편에 다음과 같은 환공과 관중의 대화가 있다.

"건물에 세금을 매기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럼 집을 헐게 됩니다."
"나무에 세금을 징수하면요?"
"나무를 베겠지요."
"가축들에 징수하면요?"
"새끼들을 죽일 겁니다."
"인두세를 징수하려는데 이는 어떨까요?"
"아이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나라를 위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재정을 확보할까요?)
"오직 산과 바다를 관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위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백성들은 뺏는 것을 싫어한다"는 관중의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관자학파는 백성들의 재산에 세금을 무는 것보다 차라리 국가가 자원을 개발하여 재정을 확보하자고 말한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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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조선광문회에서 『당의통략』을 간행할 때만 해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서 조선의 문화 정신을 전하겠다는 취지였다. 망국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에서 이러한 대본을 선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붕당 간 대립을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로 만드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식민사학자의 연구 서적은 충실한 해설서 기능을 했으며, 활자화된 당론서는 마치 이를 뒷받침하는 원자료처럼 이해되었다. 더욱이 18세기 당대사를 다룬 규장각 도서의 출입과 열람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에 야사와 식민사학은 근대적인 지식 전달이라는 미명하에 지식인은 물론 일반 대중이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조선시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지식인의 자성의 목소리를 식민사학에 교묘하게 접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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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이후 유행한 『당의통략』의 시각은 20세기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실 『당의통략』 역시 소론계 이건창이 19세기 말에 쓴 당론서에 불과한데도 이를 기반으로 한 역사상이 1차 사료인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정사보다 앞서는 실정이었다. 원사료는 엄격히 관리되어 접근하기 어려웠던 반면에 당론서는 도식적으로 잘 정리되어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의통략』에는 저자와 같은 당색인 소론에 대한 비판이 한 문장 들어 있다는 이유로 비교적 공정하다는 평이 붙었고,
당시 약간의 명망이 있던 조선광문회가 『당의통략』을 활자화하여 보급하면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에 편찬된 당론서는 일본 제국주의 관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재야에서 날카로운 잣대로 조정을 비판했던 내용은 그대로 식민사학자의 입으로 옮겨져 조선에 대한 부정적정치상으로 재구성되었다. 일본 제국 관학자들의 저작을 살펴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근대 사학의 범주로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조선의 당론서와 차이나는 질적인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문으로 된 책의 내용을 근대적인 일본어 논문으로 깔끔하게 재정리한 표절작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가장 큰 차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정치 혐오를 부추겨 식민지화를 필연적 결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 관학자의 주요 참고서로 야담집이나 야사野史가 대거 활용된 점도 반정부적인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에 유리한 자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총독부의 식민지정책과 전통적인 당론서의 영향, 그리고 야담집 혹은 야사 등에 기반한 식민사학자의 연구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당쟁사관이 형성되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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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漁箭이나 곽세藿稅, 선세船稅 등이 모두 중앙 재정으로 귀속되었다. 어염세는 그동안 궁방 등에서 폭리를 취해온 과중한 세금을 저율 과세로 바꾼다는 명목하에 수세권을 조정으로 귀속시켜서 만들어냈다. 이 역시 유형원이 소개하고 정약용이 보완책을 제시한 특수세 항목이다. - P259

셋째, 선무군관포를 정책화하였다. 부유한 양인 계층으로서 양반을 모칭하여 피역하고 있던 이들을 찾아내서 선무군관 선발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수세 대상에 편입시키는 정책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취재取才를 통해서 군관이 되면 자연히 중서층中庶層으로 인정받고 면세 혜택도 받았다. 조정은 설령 이들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양인으로 되돌리지 않았다. 세금도 본래 양인이 부담하던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이 조정은 시험 통과나 납세의 방법으로 새로이 성장한 사회적 신분을 인정해주었다. - P259

균역법이 타결되자 영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백성을 위해서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임금의 자리에 있어도 독부獨夫(혁명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격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맹자의혁명 사상으로 무장한 탕평군주가 대경장의 중심에 섰다.
더욱이 그는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군주는 백성에 의지하며", "백성과 나라가 서로 의지하고", "군주와 백성도 서로 의지한다"고 하여, 백성을 한갓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왕정의 동반자로 재설정하였다. 국왕은 "한평생 민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왔다"고 술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른바 ‘민국‘은 장기간 추진된 대경장의 여파로 점차 정치 개념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의 재정 개혁은 15-16세기 경제변동인 금납화 현상으로 촉발되었다. 17세기 전쟁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위기 상황에 대한 조정의 능동적인 대응책이 바로 대동법으로 나타났다. 대동법의 발효로 화폐와 환곡이 세제 변동과 연동됨으로써 조선 전기와 구별되는 후기의 경제체계로 한층 진일보하였다. 더욱이 18세기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균역법까지 타결됨으로써 중앙 재정은 온전히 통합되고 국가 총예산의 운영이 가능해졌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변동 양상은 공시인이나 공노비 등과 같은 사회신분까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백성관의 재인식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 이래 실학 담론에서는 조정이 무능하여 재야 지식인의 정책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억측해왔다. 그러나 사실 유형원이나 정약용의 개혁안은 조정의 정책과 상당한 연속선상에 있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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