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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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옥 [거리의 마술사]

 

교실에서 왕따를 당하던 절반쯤 자폐아 '남우'가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복도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이 사건이 남겨진 가해자와 방관자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그 과제에 달성하기 위해 작가는 소설 속에서 어떤 마술적 장치를 만들었는가? (이 질문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이기는 한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남우가 자신을 때렸던 친구 '태영'에게 행한, 칼로 찔러 죽이는 마술은 성공했고, (즉 실제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신을 공중에 띄우려는 마술은 실패했다. (즉 남우는 죽었다) 그런데 이 두 마술 덕분에 적어도 그의 옛 소꼽친구 '희수'는 남겨진 자로서 '마법'을 경험한다. 아래로 떨어진 친구를 보며 희수는 환상적인 느낌을 경험한다.

 

그가 분명히 무언가 실패했을 때, 자신의 시도 속에서 영원히 추락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고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후에 아주 기적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 그것은 세상이 일순간 아주 평화로워진 것 같은 마법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남우를 내려다보는 학생들 모두가 일순간 그 세계 속에 포함되게 하는,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의 눈을 가진 하나의 영혼이 되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히 남우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남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 전부가 떨어졌다.(10)

 

소설 초반에 제시된, 정지된 그림처럼 묘사된 이 장면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 같은데, 희수가 느낀 것이 나에겐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독서의 한계다. 작가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남우는 마치 예수를 연상케 하고, 그 예수는 마술이라는 속임수, 그것도 절반 밖에 성공하지 못한 속임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구도... 잘 모르겠다.

 

 

이장욱 [절반 이상의 하루오]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여행자인 그녀와 나는 이쪽에 있고, 여행지의 풍경과 사람들이 저쪽에 있다. 이쪽과 저쪽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유리막 같은 게 있다. 우리는 유리막 저편의 세계를 구경하고 저편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수수료를 받는다. 여행이든 관광이든, 우리가 그 풍경 속에서 살아간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중간에 하루오가 슥 들어와 양쪽의 경계를 흩뜨려 놓는다. 유리막 같은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바깥의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그런 것이다.(64)

 

소설을 읽는 여러 즐거움 중에 하나는 실제로는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생생하게 만나게 되는 경험이다. 이건 작가의 능력이 출중해야 가능한 일인데, 이장욱이 창조한 '하루오'는 마치 얼마전 읽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가 상정한 여행자(실은 여행자로서의 김영하)가 소설 속에 생생하게 현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야기 구조는 수월하게 탄탄해서 읽는 내내 레고 블록을 설명서를 보며 하나씩 짜 맞추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가장 하이라이트라면, 하루오와 헤어지고, 함께 여행했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후 이런 저런 성년으로서의 쓴 경험(결혼과 부부 생활의 실패와 무책임한 도피로서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을 한 뒤에 다시 하루오의 소식을 들었을 때이다. 과연 작가는 이 경험을 다 겪은 후의 너절한 화자에게, 아니 우리에게, 똑같은 시간을 살아낸 하루오를 어떤 모습으로 보여줄까. 잠깐 멈추고 상상을 해보았다. 여전한 하루오, 망가진 하루오... 어느 쪽일까. 정답은 절반의 하루오였다. 그리고 화자도 절반의 하루오가 된다. 꼼꼼히 읽지 않아서 왜 소설의 제목이 절반의 하루오가 아니라 절반 이상의 하루오인지는 잘 모르겠다)

 

 

황정은 [상행]

 

소설 초입에선 어렸을 적 경험이 겹쳤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결혼식 같은 행사에서 나이 든 분들이 "네가 갸 아들이냐?"고 아는 척 할 때의 불편함. 나는 알 리 없고 그 분들도 나를 촌수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먼 관계. 이 소설의 화자는 그보다 더 먼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내 친구의, 어머니의, 돌아가신 고모부의, 새 처와 그의 노모. 그 두 할머니가 돌아가신 고모부의 동생 소유의 집에서 살다가 동생이 죽으면서 동생의 자녀들이 팔려고 내놓은 그 집에서 쫓겨날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다행히 화자는 나처럼 불편함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득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질적이지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자고 가.

밥 줄게.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158)

 

대화가 정말 리얼하다. 작가노트에서도 문경에서 경험했던 일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듯이, 소설속 두 할머니들이 쓰는 말투는 경상북도 북부 사투리가 맞다. 짧고 퉁명스러운 듯한 말투. 나도 고향이 근처라 더 잘 와닿았다.

 

화자는 딱 반나절을 그곳에 있었으면서 그 곳이 왠지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보자고 굳게 마음을 먹어도 언제나 잊었던 월식을, 이번에야말로, 잊지 않고 보고야 말리라 다짐한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161)

 

목적 없이 떠난 짧은 여행에서, 목적을 갖고 그곳에 갔던 오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화자는 무언가를 얻어왔다. 변한 것이다. 피곤했지만 이제는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겠다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염원했음에도 잊기만 했던 그 무엇을!

 

 

손보미 [과학자의 사랑]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 아주 오랬동안 나랑 친했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난 너랑 제발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싶어. 왜 맨날 감정적인거야. 왜 자꾸 외롭다고만 하는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의 어떤 공포가 자신의 감정에 직면하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매우 지적이고 오만한 태도와, 인간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감정들을 부정하는 무지와, 자신의 의해 상처받은 상대를 논리적으로 비난하는 몰염치를 드러낸 채 무책임하게 서둘러 우리로부터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세상 이치에 아주 능통하다고 생각하는 '햇병아리'였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의 그런 태도는 평생 동안 유지된 셈이다. 그는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과학자보다는 영화배우에 걸맞다는 인상을 주었다.(175)

 

과학자 고든 굴드는 가정부 에밀리 로즈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억압했기에 자신을 '가정부의 유혹을 이겨낸 훌륭한 남편'이라고 정의했고, 여전히 아내 비비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에밀리에게 '왜 나를 유혹했냐'고 비난했다. 이런 고든의 억압된 욕망을 알아본 사람은 당연히 그의 아내 비비안이었고, 그녀가 떠난 뒤에도 고든은 평생 아내가 왜 떠났는지, 에밀리가 왜 자신을 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남들은 관심없는 자신의 연구주제를 고개 끄덕여가며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는 상대와 지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의 감정 영역에서의 결함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물리학에서조차 자신이 발견한 중력장 이론의 의미를 자신만 이해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 말미에 고든이 에밀리에게 보냈다는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당신은 언젠가 중력에 맞서서 날아오를 거요.

그리고 당신은 음탕한 여자가 아니오."(204)

 

 

정용준 [당신의 피]

 

다섯 살 때 엄마의 관자노리를 칼로 찔러 죽인 아버지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내 인생에서 퇴장했고, 화자는 이모집으로 입양이 되었다. 24년 후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 화자는 신장투석실에서 일하고 있고, 아버지가 그곳에 투석을 받으러 오면서 생기는 화자의 심경의 변화.

 

극적인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 상황에서의 작중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 나는 미리 심리적인 방어막을 쳐 놓는다. 그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고, 철저하게 무시하겠다고. 실제 그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없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그와 함께 했던 기억도 없고, 그렇기에 그가 내게 어떤 상처를 준 것인지 나도 의식하지 못한다. 완벽한 타인.

 

그런데 여기서부터 작가는 장난을 친다. 그와 화자의 관계가 화자가 생각한 것으로 끝나지 않게끔... 화자가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화자는 동요한다. 아버지는 관 속과도 같은 투석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변 환자들과도 대화를 시도하고, 이제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그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때 화자의 마음은 요동친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그가 불행하게 살거나 어딘가에서 죽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그가 불행하지 않거나 잘 지내기를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다.(233)

 

이런 복잡한 감정과 고민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규정하고 있는 그에 대한 내 입장을 부정하는 격이 아닌가. ... 그의 얼굴을 대하면 대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고 마음이 상했으며 이상하게 억울했으며 기이한 수치심을 느꼈다.(234)

 

그래도 우린 ... 혈육이 아니냐.(238)

 

왜 화자는 아버지가 투석실을 도망치듯 떠난 뒤, 극심한 허기를 느끼며 달걀을, 투석을 받는 환자들이 먹는다는 달걀을 꾸역꾸역 우겨 넣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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