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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의 구멍 ㅣ 초월 3
현호정 지음 / 허블 / 2023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와 사람들의 관계를 눈부신 직물 위에 펼쳐내는 작가의 솜씨는 베틀 앞의 아라크네를 떠올리게 한다.❞ _구병모(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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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듦새
『고고의 구멍』은 초월 시리즈의 세번째 책이다. 판형은 첫 번째 책인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 두 번째 책인 『빛과 영원의 시계방』과 동일한 규격으로 초월 시리즈를 한 책장에 모아 꽂아두었을 때 정말 보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소설책 단행본 기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이즈라고 생각해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고, 세로가 살짝 긴 편이라 문고본의 분위기도 풍긴다는 것이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표지 일러스트도 인상적이었는데, 일러스트에서 고고가 마주하고 있는 구멍이 고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자 동시에 이 세계에 뚫려 있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아야 할 예측 불가능한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의 몸에 '구멍'이 생겼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며 어찌 보면 그로테스크하고 일종의 언캐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치다. 익숙하고 일정 부분 고정적이었던 우리의 몸에 변형이 생기고 그것이 삶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분명 공포로 이어질 수 있을 법한데, 신기하게도 고고는 구멍의 발생에 두려움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의아할 법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고고의 구멍이 우리의 신체에 생기는 물리적인 상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고고의 몸에 생긴 구멍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환상성을 부여하며, 동시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인간의 감각을 재구성하는 기제로서 존재한다. 소녀 고고의 구멍은 곧 행성 망울의 구멍이며, 그 구멍들은 결국 모두가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깊은 심연이자 어둠, 그리고 동시에 빛이라 할 수 있겠다.
✦ 서정과 성장의 미학
추천사를 쓰신 구병모 작가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신화'라 말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제시되는 망울의 창조 신화만으로도 이 소설은 아름다움의 몫을 다했다'고. 책을 다 읽고 다서는 이 이야기가, 한 개인의 신화임과 동시에, 한 행성의 신화이자, 더불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느꼈다.
세계의 창조나 국가의 건설과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시간의 흐름 및 생명의 발생 그리고 소멸을 설명하고 그것을 읽은 우리를 이해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끔 만든다면 충분히 그 서사를 신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은 그것이 미지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기지의 세계로 편입되고, 이러한 이해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새로운 우주를 구축할 수 있다.
『고고의 구멍』은 '고고'라는 소녀의 성장통을 다양한 상징으로 형상화하여 우리 모두가 겪어왔고 또 앞으로 겪게 될 삶의 질곡을 현현한다. 이야기는 서정적이고, 비유적이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며, 때로는 모호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어떤 인물의 성장의 과정을 미학적으로 그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고가 겪는 모든 일들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언어로 그려지며 언뜻 보았을 때는 환상 그 자체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사건과 상황에 내재해 있는 고통과 상처 그리고 후회는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던 성장통을 불러온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표현과 묘사 속에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그러나 완전하지 못함 그 자체로 가치있는 존재들의 서툶이 선연히 드러난다. 아직 (어쩌면 영원히) 어설프다는 것을,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망울의 신화는 완성된다. 단숨에 이해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천천히, 곱씹으면서, 그리고 곱씹히면서. 독자는 미지의 세계가 사실은 결코 미지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서서히 구멍을 메우고 날개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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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에게 있어 수액을 맞는다는 행위는 울음의 반대처럼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 들어오는 거였다. 그들의 수액에 수면제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고 나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눈물과 졸음은 애초에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니까. _64쪽
❥ "새들이 날 수 있는 건 날개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몸이 엄청나게 가볍기 때문이기도 해. 아주 많은 것들을 비워낸 후에야 가능하다고." _72쪽
❥ 고고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두 협곡인이 그런 관계가 아니면서도 서로에게 유일한, 어쩌면 영원한, 고고로서는 상상해본 적 없는 특별한 사이인 것이었다. _88쪽
❥ '날개가 있는 이에게는 나는 게 행복이고, 날개가 없는 이에게는 날지 않는 게 행복일 거라고 고고는 말했었어. 하지만 그때 고고는 분명 행복했던 거야. 나 없이도. 어쩌면, 내가 없어서' _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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୨୧ 동아시아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୨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