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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 - 국가대표 무릎 주치의 김진구 교수의 메디컬 에세이
김진구 지음 / 꿈의지도 / 2025년 3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의 발전은 낡은 것과 새것의 충돌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은 왜곡된 '보수'라는 단어가 언젠가는 우리 사회에서도 강직함과 정직함, 새로운 세대를 포용하고 존경받는 단어가 되기를 희망하며. 간절히... (p.236)
<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은 의욕이 없는 분,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분들을 위한 책이다. 김진구 선생님은, 이렇게 산 사람도 있구나 하며 흥미롭게 들여다봐주면 좋겠다고 하신다. 에세이 집을 소설책처럼 읽다가 멈춰 생각했다가 다시 읽기의 과정을 반복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과정을 서점에서 읽었다고 상상해 보았다.
내가 서점에 가서 무심코 책을 펴 읽기 시작한다. 재밌어서 빠져든다. 드라마에 나올 듯한 응급상황에서는 지금 그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맘이 급해져 막 빨리 읽는다. 음악을 들으며 수술하는 장면을 읽으면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환자가 결국 죽음을 택한 장면에서는 함께 마음이 아파진다.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따라서 울고 있다. 결국 책장을 덮고 이건 나 혼자 읽을 수 없다며 들고나온다.
내가 죽음을 택한 환자의 소식에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을 Sympathy(동정, 연민)라고 한다. 감동적인 이야기에 따라 우는 건 Empathy(공감)이다. 만약 의사가 환자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다면 불쌍하고 딱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든 꼭 고쳐주고 싶다. 수술이 잘 되면 자랑스럽다. 내가 의사라는 우월감도 느낀다. 그러다가 못 고치면 스스로 자책한다. 그런데 만약 의사가 공감을 한다면 어떨까?
환자의 아픔은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의사 역시 사람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환자의 완치는 스스로의 노력과 보호자의 정성 또는 신의 은총 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고쳤다는 사실은 자랑이 아닌, 내가 내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자긍심이 남는다. 최선을 다했기에 결과가 안 좋아도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더 연구하고 노력하게 된다.
선생님은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전문가나 최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돌팔이라는 말을 일부러 더 가져다 썼다고 한다. 나는 고작 돌팔이에 불과하다며 스스로 교만해 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인간적으로 환자에게 다가가 어떻게든 환자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돌팔이라는 말에 진 빚이 참 많다.
나는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후배들에게 하는 당부 5가지가 참 좋아서 그것을 중심으로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는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다. 그래서 이 당부는 꼭 의대생 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를 빛나게 하는 당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1. 외로운 사람들을 사회는 전문가라 부른다.
선생님은 하루 마지막에 하는 샤워만 자신을 위해서 하고 하루 세 번 이상 하는 나머지 샤워는 모두 환자들을 위해서 한다. 나를 믿고 내게 몸을 맡긴 환자들을 위한 배려다.
처음에는 너무 귀찮고 힘들었지만, 힘들수록 몸에 밸 때까지 반복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프로가 되기 위한 유일하고 혹독한 비밀이었다는. 그래서 프로는 디테일이 다르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2.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숨기지 마라.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연구실에 뼈와 무릎관절 모형을 사들여 수술 노트를 새로 작성한다. 교과서 반 페이지 분량이 네 장에 걸쳐 60 단계의 술기로 세분된다. 나는 술기(術技)라고 해서 기술의 오타인 줄 알았다. 의학 분야에서는 숙련된 기술을 술기라고 한다. 보통 기술이 아니라 어려운 기술이니까 강조해서 기술을 거꾸로 말한다고 기억하기로 했다.
손재주가 없다는 관용어인 all thumbs를 열 손가락이 다 굵고 짧은 엄지손가락이어도 어느 손가락보다 더 회전이 자유롭지 않냐며 초긍정 마인드를 보여주신다. 정말 엄지손가락을 잘 마사지하면 혈액순환도 잘 되고 잠도 잘 오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엄지손가락은 아주 쓸모 있는 손가락이다.
이런 긍정 마인드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진상은 꼭 있다. 진상을 순화해서 블랙 컨슈머라고 한다. 악성 소비자라는 뜻이다. 병원에서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선생님은 "나는 의사가 아니라 호텔 지배인이다. 지배인은 고객과 싸우지 않는다"라며 그때마다 스스로를 세뇌했다.
어떤 환자분이 인터넷에 비방글을 올려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무책임한 글로 매도당하면서 덕분에 내가 인터넷 스타가 되겠다고 하셨지만 진실이 왜곡되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탔을까...
그래서 앞으로는 환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더 상세하고 친절히 설명하고, 환자의 궁금증에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병원 홈페이지에 비밀 게시판을 만들어 이런 블랙 컨슈머들이 실컷 불만을 올릴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싶다. 모든 불만은 직원이 아닌 이 게시판에 올려야 접수가 된다고 하면, 직원들도 좀 편해지고 게시판에 실컷 불만을 적다 보면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3.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라.
선생님은 수술을 할 때 <레 미제라블> 하이라이트 17곡을 다운받아 틀어놓고 노래가 바뀔 때마다 수술 속도를 조절한다고 한다. 펠로우, 전공의, 간호사 등으로 이루어진 한 팀이 음악 덕분에 편안함과 긴장감이 적당히 어우러져 하루 수술 스케줄을 물 흐르듯 소화해낸다.
음악을 이용하니 수술팀들은 30분짜리 곡을 틀으면 탄성이 터지고 두 시간짜리 곡을 틀게 되면 수술이 복잡하고 까다로울 것이라는 예고라 미리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명령이 아닌 배려하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나는 타이머를 이용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몇 분인지를 체크해서 그 음악이 끝나기 전에 숙제를 끝낸다던가, 그 음악이 끝나면 반드시 쉬어야 한다던가 하는 음악을 이용한 시간 관리법도 매우 유용한 팁이다.
슈만을 틀어달라는 소녀에게 슈렉은 안다고 하니 까르르 웃는다. 그 웃음으로 긴장을 풀고 소녀는 어려운 수술을 잘 마치고 재활도 잘 이겨냈다는 이야기. 일본의 와세다 대학이 세상에서 가장 센 대학인 것도 처음 알았다. 와~ 세~다!
4. Empathize! (공감하라)
나는 사기를 당해 본 적이 있어서 사기꾼이라는 말이 너무 싫다. 그런데 이 책으로 사기꾼이라는 말을 들으면 웃게 되었다. 내 마음의 상처도 조금 치유된 느낌이랄까.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환자와 의료진의 사기를 높이려면 내가 먼저 수술팀의 사기를 올리는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 때문이다.
사기꾼이란 말이 나도 힘든데 모두의 사기를 위해 내 마음을 숨기고 에너지가 넘치는 척 기분 좋은 척 사기 친다는 뜻이기도 하고, 단순히 사기를 올려주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기 친 사기꾼은 덕분에 나는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독서를 시작하게 만들었으니 나의 사기를 올린 사기꾼 맞다.
진정한 사기꾼(?)은 김연경 선수였다고 한다. 그녀는 이야기를 할 때 남을 탓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나는 늘 남 탓만 하고 살았는데... 언제나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좌절을 기꺼이 감당해내려고 애썼던 그녀의 은퇴를 통해 그녀와 같은 멋진 사기꾼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응원한다.
이미현 선수가 친엄마를 만나고, 엄마는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는 소식도 너무 기뻤다. 비록 어쩔 수 없이 입양을 보내야 했지만 그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이렇게 다시 만나 과거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나도 행복해진다.
5. 진실한가?
수술할 때 이렇게 저렇게 하지 말라고 떠드는 모든 것들은 지난 25년간 했던 실수들이라고 한다. 이 실수를 숨기지 않고 모두 밝히고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손재주가 없어 수술도 잘 못하던 사람이 구제불능 의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실수를 기록해서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이도가 있는 기술은 사체 해부실이든 모의 뼈 수술이든 수술실이 아닌 곳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연습했다. 모든 좋은 수술은 모든 실수에 대한 명료한 기억이다. 각 과정마다 실수한 것을 적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술기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 노트를 달았다. 지금도 120여 단계의 Dr. Kim's Note를 가지고 있다.
논문을 심사할 때 교수님는 그 논문이 거짓말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지적할 체크 리스트가 70여 개나 준비되어 있다. 아들에게도 교수님께서 논문을 리젝트 할 때 왜 이 논문이 거짓인지를 반박할 체크리스트가 70가지가 넘는다고 했더니 아주 좋은 정보라며 좋아한다.
친구여 우리가 걸어온 길을 너무 특별하다고 여기지 말자는 말. 나 혼자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는 알량한 자부심도 내려놓자는 말. 그리고 나 혼자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란 말에 그동안 쌓인 응어리가 다 풀려 버렸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연대가 있었으며 눈에 보이진 않아도 신의 가호와 선의가 나를 끌어주고 밀어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 혼자 애써 버티며 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덕이었다. 나도 이렇게 세상을 넓게, 고맙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제는 우리가 길이 되자.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가 길이 될 수 있다. 길이 되기 싫으면 응원하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그것도 함께 길이 되는 게 아닐까? 선생님의 모든 수술이 팀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듯 말이다.
선생님은 할아버지 무릎을 고쳐주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기증하여 장기를 이식해야 하는 환자를 고쳐주고, 건강을 되찾은 장기 이식 환자는 지친 내 마음을 고쳐주고, 돌고 도는 행복이란다. 이 맛에 오늘도 가운을 휘저으며 수술실과 진료실을 누빈다고. 받은 것을 나누려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 때문에 힘든 고비를 숱하게 넘어올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시겠다며.
나도 선생님처럼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인 날이 좋으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하면 적당해서 모든 날이 다 좋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