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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해방 사이
이다희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23년 5월
평점 :
각자 스스로 세운 기준대로 선택하고,
상대의 기준은 힘껏 존중해 주는 것.
어렵지만 잘 이루어진다면
혐오도, 긴장도 없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것 같아
- p.250
약을 먹듯 책을 읽으며 숨쉬기 위해 글을 썼다는 이다희 작가의 말이다.
나는 내 의견과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상대방의 의견은 듣지 않으면서, 나는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나도 역시 애 하나 키우는 걸 힘들다고 하면 어떡하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잘못되었다는 비난의 소리로 들려서 듣기 싫었다. 사람은 누구나 내 상처가 아프다. 당장 내가 아픈데 남은 얼마나 아플까 걱정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닐까?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내가 아픈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내 기준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그 후에라야 상대의 기준을 힘껏 존중해줄 수 있는 힘도 생긴다. 순종만 하는 착한 여자가 아닌 까칠하지만 속 편한 여자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편지글 형식의 독서 에세이집이다. 그러나 책소개와 감상의 형식이 아닌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24권의 책과 연관 지은 각 장의 마지막에는 잠시 멈추어 기록해 보는 페이지가 있다. 나만의 기록을 남겨 나중에 스스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할 것 같다.
엄마 이야기가 나오니 나도 엄마에게 엄마는 그때의 엄마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아들에게는 내 방식이 아닌 너의 방식도 힘껏 존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엄마, 장모님, 아내의 역할에서 내려와 엄마도 이 좋음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단 말이 참 따듯하다. 남들 기준에 맞춰 둥글게 깎지 말고 모난 대로 살자는 말, 좋은 자기를 믿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말에 맘도 편안해진다.
나는 아이 낳고 살찐 내 모습이 싫었다. 그런데 작가는 보여지는 몸에 집착하지 않고, 잘 기능하는 몸을 열심히 단련했단다. 그 말 하나로 나도 잘 기능하는 내 몸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도 내 몸에게 요구하는 세상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몸의 주인으로 살기를 연습 중이다.
작가는 어느 순간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즐겁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글쓰기가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깨달은 작가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잘 살도록 지켜주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던 글쓰기로.
'돈 벌지 않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생각'이라는 말을 듣고는, 예전의 내가 생각났다. 돈을 벌고 있으면, 내가 뭐라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고,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놀고 있을 때는 사람이 뭐라도 해야지 스스로 밥만 축내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말에 뜨끔했다. 아이가 없는 시간에 집에 있으니,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위축됐다.
사회가 정한 이미지에 순종했기 때문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는 좋은 아내에 싹싹한 며느리라는 말을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힘들게 노력했지만 나 역시 제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돈을 못 벌어도 나는 살아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귀한 존재임을 안다.
책 중간쯤 나오는 경비 아저씨가 분리수거 문제로 작가에겐 뭐라 하고 남편이 가니까 바로 꼬리를 내리는 얘기는 누구나 공감 가는 부분일 것이다. 난 오래전 일이지만, 여자가 첫 손님이면 하루 종일 손님이 없다고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일본 갔을 때는 한국 사람은 마늘 냄새가 난다고 무시당하고, 중국 갔을 때는 한국은 중국 사람이 자전거 타고 하루면 다 돌 수 있는 작은 나라라고 무시당한 적도 있다. 극소수였지만.
청소나 허드렛일을 해서 무시하고, 상사라고 아랫사람을 종처럼 부리고, 외국인들을 학대하고 임금을 안 주는 일들은 자본주의와 이기주의를 잘 못 인식한 일부 사람들 때문인 것 같다. 돈을 지불한 내 권위가 우선이라는, 즉 사람 위에 돈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작가는 독서 모임을 통해 지나온 모든 것들이 소명을 실현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도 소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 소명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소명이라는 말을 생각 해 보게 된 것만 해도 보물을 발견 한 것 같다.
잭을 읽는 내내 작가가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와 함께 공감하고 함께 울며 그동안 쌓인 줄도 몰랐던 억울함과 설움들을 풀어 낸 귀한 시간이었다.
순종이 미덕이라고 배운 나지만, 내 기준에 너무 안 맞는 시댁과의 갈등 때문에 무던히도 싸웠던 지난날들. 나는 해방되지 못했었지만 내 아이의 세상은 해방이다. 내 아이의 세상은 각자 자기의 모습으로 살아도 존중 받는 자유로운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 실천해서 만들고 있다.
표지에 있는 '동굴에 빛이 드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처럼 각자의 어두운 마음 한 켠에 있는 창문을 열자. 이제부터는 한낱 가사 노동이 아닌 빛나는 노동이다. 볕이 든다.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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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캣 책곳간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