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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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은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처음 내놓은 개념으로, 이를 다룬 책의 제목 "The Managed Heart"에 핵심이 담겨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관리되는 마음‘인데, 얼핏 들으면 마음공부 같은 종교적인 수행이 연상된다. 그러나 감정노동은 그 본질이 전혀 다르다. 타인을 위해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쳤어도 티를 내면 안 된다. 피로감이나 짜증을 감추고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괴리가 노동자를 소진시킨다. 혹실드는 이를 가리켜 ‘감정 부조화emotive dissonance‘라고 하는데, 감정과 표현을 억지로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는 무척 어렵고, 그로 인해 긴장과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에서 소외된다는 점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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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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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배제 형태는 영구임대아파트와의 격리다. 어떤 단지의 경우, 철조망으로 경계를 쳐놓아 양쪽 주민들이 서로 접촉할 수 없도록 하기도 한다. 중산층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사귀지 못하도록 주의를 준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그 아이를 ‘영구‘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한다.
우리는 남들을 열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한다. 자기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과의 선 긋기를 통해 스스로의 잘남을 확인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절대적인 기준이다. 경제의 수단으로 고안된 돈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삶 자체가 수단이 되어버린다. 사용설명서specification의 약자인 ‘스펙‘이 경력 및 자격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찍이 칸트는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윤리적 원칙을 세웠는데,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대하기도 쉽지 않다. 자신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삶은 타인을 수단으로만 대하는 관계와 맞물려 사회의 비인간화로 이어진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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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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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어느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고문의 비인간성을 증언하고 있다.

<고문이나 체벌은 ‘굴종과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체벌은 ‘잘못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란 말이 나오게 만드는 걸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런 굴종과 복종은 사람에게 요구해선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이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해 굴복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문 피해자 분이 끝까지 털어놓는 것을 망설였던 기억이 뭔지 아느냐. 고문자들이 그 분을 실컷 때린 후에 "나 담배 피우면서 쉬는 동안 노래나 불러봐라"고 했단다. 그분은 그때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노래했는가를 털어놓으면서 괴로워했다. 그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심한 구타가 아니라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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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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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생겨나는 조건을 다음의 세 가지로 간추린다.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은 마음,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비폭력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그리고 폭력적 충동을 제어해주는 정서적 역량(사랑, 죄책감, 두려움)의 결핍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첫번째 조건이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를 무척 창피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어떤 술꾼이 연상된다. 왜 자꾸 술을 마시느냐고 묻는 어린 왕자에게 술꾼은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무엇을 잊고 싶으냐는 질문에 술꾼은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어린 왕자는 다시 묻는다. 뭐가 그렇게 부끄럽냐고. 술꾼은 대답한다. 술을 마시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객관적으로 ‘사소한’ 일로 인해 수치심을 느낄수록,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다시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그것을 감추고 싶은 마음도 커지게 된다. 수치심이 수치심을 낳는 자가당착.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어린 왕자의 술꾼처럼 외적인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돌파구는 거칠게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가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는 비밀을 은폐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마초적인 기질을 과장되게 드러낸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 자부심을 얻으면서 수치심에 압도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열패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무리하게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충동이 생기는데, 누군가를 깔아뭉개면서 자신이 높이 올라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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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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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하고 직접적인 형태의 모욕보다도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우리 일상 속의 은근한 모욕이다. 대개 무시나 경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상생활에서는 모욕과 모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모욕감과 모멸감도 그러한 차이에 병행하여 대비를 이룬다. 모욕감을 느낄 경우, 그 감정을 유발한 사람을 분명하게 지목할 수 있다. 반면에 모멸감은 누군가가 나를 직접 모욕하지 않았다 해도 느낄 수 있다. 또는 어떤 상황 자체가 모멸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감정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를 경멸할 때는 심장박동이나 혈압 또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등 생리적인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시하는 표정이나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도 간단하게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크고 작은 모멸감을 불러 일으키며 살아가지 않는가.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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