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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온도가 전하는 삶의 철학
김미영 지음 / 프로방스 / 2023년 1월
평점 :
가끔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진행하는 ‘삶을 되돌아보기 – 자서전 쓰기 강좌’가 있다. 여기 참여하는 분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써 내려갈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 낼 때, 보통 “따뜻했던 어린 시절”, “혹독했던 IMF 시기”, “열정적으로 운동하고 공부했던 사춘기”였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러고는 막상 글로 쓸 때엔, 시간 나열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을까.
이 책 <기억의 온도가 전하는 삶의 철학>의 저자인 김미영 작가도 본인의 지나온 삶을 갈래갈래 뽑아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뽑아낸 삶의 기억들을 모두 모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되씹으며 통찰하는 단계를 밟았다.
“따뜻했던 어린 시절”을 예로 들면, 이 시절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삶은 아니다. 어떤 한 개인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삶’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삶이 따뜻하기만 했을까? 실제 과거로 돌아가 그때 그 시절의 삶을 확인해본다면, 온통 따뜻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따뜻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즉 ‘개인의 기억’이 그렇다는 것이다.
김미영 작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개인의 삶의 기억’마다 어떤 ‘온도’가 있음을 통찰한 것이다.
“내 삶의 기억 속에도 각각의 온도가 전해지곤 한다.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삶의 얘기들...”이라고 ‘작가 소개’에서도 이를 밝히고 있다.
이런 통찰을 통해, 작가는 ‘지나온 삶의 기억’들을 ‘온도’로 측정하여, 따뜻했던 기억들, 열정적이었던 기억들, 싸늘했던 기억들, 추웠던 기억들로 갈무리하였다. 이는 그대로 이 책 <기억의 온도가 전하는 삶의 철학>의 목차를 형성한다.
1. 따뜻했던 기억들(내 삶의 이유)
2. 열정적이었던 기억들(내 삶의 힘)
3. 싸늘했던 기억들(내 삶의 깊이)
4. 추웠던 기억들(내 삶의 상처)
이 책을 읽다보면, 희한하게 책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럴 만도 했다. 작가가 소환한 삶의 기억 하나를 읽으면, ‘나는 저 때 어떤 삶을 살았던가’ 라고 회상에 잠기게 되고 내 머릿속 한 귀퉁이에 있었는지도 모를 기억이 문득 떠올려지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고 첫 번째 삶의 기억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시골 마을’(p13)을 읽으면서 저런 현상이 이미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의 영원한 시골 마을! 그런 시골 마을이 있어서 참 따뜻하다.”(p19)
작가의 시골 큰아버지 댁에 대한 이야기인데, 내게도 그런 시골 마을에 대한 정겨움이 있었음을 잊고 있다가 큰고모님 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익산시 외곽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너른 마당이 인상적인 예스런 시골집에서 닭 키우고 논밭 일구시던 큰고모님 댁은 갈 때마다 정겹고 포근했다.
‘다시 글을 쓰게 한 따뜻한 시선’(p42) 편에서는 2권의 책을 한 출판사에서 연이어 출판하게 된 사연이 나온다. 작가가 원고를 몇 군데 출판사에 투고하였는데, 그 출판사의 대표가 보내온 ‘진정성이 있는 따뜻한 답변 글’과 ‘인간적이고도 따뜻한 시선’(p47)은 작가가 계속해서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라 밝히고 있다.
내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취미로 시나 소설을 쓰는데 별다르게 발표는 하지 않고 간직만 하고 있던 차에, 마침 푸른약국출판에서 주최하는 ‘이.막.이 프로젝트’라는 신진작가 및 기성작가 협업출간 프로젝트 소식을 접하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신진작가 공모에 단편소설을 응모하였는데, 선정되었다는 내용과 출판계약서가 첨부된 따뜻한 답신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final 행복>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책이 나왔을 때의 그 감격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감정 쓰레기통의 쓸쓸한 운명’(p173) 편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과의 감정 문제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나의 감정들조차 추스르기 힘든 상황에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잡다한 감정들까지 담아내야 할 때”에는 “난 ‘엄마’라는 자리를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있다.”(p177)라고 하소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커다란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가족들의 온갖 감정 쓰레기들을 받아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난 엄마니까.”(p177)라면서 다시금 마음 단단히 먹는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았던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눈에 넣으면 너무도 아플 것 같은 날카로운 사춘기로 변해가고 있었다.”(p198)라는 사춘기에 대한 인상적인 표현이 있는데, 이런 날카로운 사춘기 아이들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내게도 아이 하나가 있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친근하고 엄마가 아플 땐 아픈 곳을 쪼물쪼물 주물러주던 아이였다. 그런데 초등 6학년 말 즈음부터 대화하는 게 조금씩 틀어지더니 중학생이 되면서 서서히 말 수가 줄어들고 말을 듣지 않는 경우들이 생기다가, 급기야 가족 간 불화의 촉매로 작용하였다. 사춘기였다. 그렇게 근 2년 이상의 불안한 관계는 아이가 중3이 되고 어느 날 그 간의 불만과 오해, 응어리들이 풀리는 계기가 생기면서, 활발했던 사춘기 불화의 화학작용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폐지 줍는 할머니 찾아 삼만 리’(p87) 편과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나의 엄마’(p217) 편에는 또 다른 ‘엄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작가의 어머니이다. 노년이 되어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신도 다소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시어, ‘엄마’의 건강 걱정에 병원으로 모시고자 작가는 ‘자식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몹쓸 놈의 쓴소리도 참 많이 내뱉었’(p88)고 옥신각신 고성이 오갈 정도의 몸 씨름도 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결국은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4일째 되는 날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례식과 화장...
‘그렇게 엄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남은 거라곤 한 줌의 재가 전부였다. 아니, 철심도 있었다. 고관절 수술을 할 때 박아 넣었던 것이 그대로 재와 함께 섞여 나온 것이다.’(p222)
“그 순간, (나는) 또 오열했다. 가슴을 갈기갈기 찢으며 상상조차 못 할 정도의 고통이 뒤따랐다.”(p222)
어린 시절 밤새 시침질하며 이불 누비어 겨울날 자식들의 따뜻한 이부자리 마련해 주시던 ‘엄마’(p35-40), 쑥을 좋아하여 한 바구니 쑥을 캐내어 구수한 쑥국 냄새 가득한 저녁상 차려주시던 ‘엄마’(p20-25)에 대한 따뜻한 기억과 함께, ‘나를 낳고 길러주신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그해 여름, 너무도 춥고, 아팠’(p222)던 기억이 작가의 삶 속에 깊이 새겨졌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 또한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들과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특히 내 아버지를 화장하고 내 손에 건네진 납골함을 보자 또 다시 오열했던 기억...
이 외에도 이 책에는 일상의 회고와 감상, 가족에 대한 생각과 느낌 등 작가의 다양한 삶의 기억들이 담겨져 있다.
이 책 속에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 각각의 기억의 온도 말미에 “기억의 온도 / 공감이 가는 그들의 말” 코너가 실려 있다. 관심 있게 읽다보면 꽤 공감 가는 문구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35쪽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구처럼 말이다.
꿈을 품고 뭔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 괴테 -
이에 대해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의도를 밝히고 있다.
“아울러 각 기억의 온도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작가, 철학자들의 ‘한 줄 문장’도 함께 실려 있어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있어서도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싶다.”(p284)
이 책은 한 번 잡으면, 어쩔 수 없이 느리게 읽게 될 것이다. 참 많은 삶의 기억들을 회상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내 뇌리 속의 기억들을 참 많이도 떠올려보게 되었다. 기분 좋은 독서였다.
덧붙이자면, 자서전 혹은 에세이 글을 쓰고 싶은 독자분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우선, 이 책은 문장들이 잘 호응되고 어색한 점 없이 잘 읽힌다. 작가분의 문장력이 상당하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견본’으로 활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통찰하는 감각’ 또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감을 모았을 때,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는 너무 흔한 서사방식이어서 엄청나게 독특한 아이템이 아니고서야 눈에 띄기도 어렵고 회자되기는 더욱 어렵다.
분명 이 책의 소재들도 누구에게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미영 작가는 ‘개인의 삶의 기억’마다 어떤 ‘온도’가 있음을 통찰해 내었고 이를 통해 ‘기억의 온도’라는 독특한 아이템을 뽑아내었다.
또한, 이 책은 ‘내용 구성에 있어서 좋은 예’를 선사한다. 작가의 기억들을 모두 온도로 치환하는 작업을 거쳐, 삶의 기억을 온도별로 구성하였다.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시작과 원고투고 및 출판계약에 대해 조언을 얻을 수 있다.
‘다시 글을 쓰게 한 따뜻한 시선’(p42-48), ‘뜨거운 영혼을 갈아 넣은 글 수프’(p79-84), ‘첫 시작에 대한 맑은 열정’(p129-134) 부분을 읽는다면 도움이 될 듯싶다.
이렇듯 자서전이든 에세이든 ‘글을 쓴다.’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해 이 책 85쪽에 공감이 가는 어록이 있어 소개한다.
나는 유명해지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글을 쓴다.
- 아나이스 닌(여류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