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그녀에게 열정은 한순간 사람을 사로잡는 무엇이었다. 그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고,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열정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의지라는 것. 그것이 향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는 것. 그 시절, 석주의 열정은 사람을 단번에 압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만히 길들이는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집중되고 있었다. - P87

그날, 석주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것은 닮은 꼴의 하루가 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는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 P263

석주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과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라는 것 또한.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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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ㅣ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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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미나는 강한 캐릭터야. 무지와 관성이야말로 나약함인데 젤소미나는 영화의 어느 한 컷에서도 그렇게 존재한 적이 없어. 화내고 신기해하고 슬퍼하고 부끄러워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앞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던져 회개하지. 나는 힘 있는 역할을 해야 할 때마다 젤소미나를 떠올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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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ㅣ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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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독고다이, 혼자 심으로 가는 거야. 닭알도 있잖여? 지가 깨서 나오면 병아리, 남이 깨서 나오면 후라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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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언제나 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순간의 감정이라는것도 사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뒤엉키면서 만들어내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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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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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모든 존재의 본질이란 위태로이 핀 끝에서 동요하는 것, 살아가면서 조금씩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우리의 어마어마한 하찮음이 속수무책으로 격동하고 들썩이는 평화의 제물임을 깨닫는 것 아닐까.
그때까지 버림받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우리는 끝없이 자신에게 매혹되어 정신이 팔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자신에 관한 연극과 신화와 숭배를 창조한다. 다른 선택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기술, 지식, 지성을 탁월한 수준으로 올려놓고, 온전히 다 해소할 수 없는 성취욕으로 안달이 나고, 여전히 대답이 없는) 우주 공간을 바라보고, 그래도 꿋꿋이 우주선을 짓고, 외로운 우리 행성을 수없이 돌고, 똑같이 외로운 달에 잠시 가서 무중력 상태의 당혹감과 일상적인 경외감을 느끼는 와중에 이런 생각에 잠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거울처럼 빛나는 지구를 향해, 지지직대는 무전기를 들고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듯한 생명체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고. 여보세요? 곤니치와, 차오즈드라스테, 봉주르, 거기 들리나요, 여보세요? - P54

지상의 어느 생물을 고르든지 그 생물의 이야기가 곧 지구의 이야기가 되리라고, 문득 생각해 본다. 그 한 생물이 모든 걸 말해 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역사를, 다가올 모든 미래를. - P188

이것은 국지적인 장면에 불과하다. 작은 소동, 미니드라마다. 우리는 충돌하고 부유하는 우주에 갇혀 있다. 최초의 빅뱅으로 우주가 쪼개지며 길고 느리게 퍼져 나간 잔물결 속에 우리가 있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서로 충돌하고, 남은 은하들은 서로를 피해 흩어진다. 그렇게 홀로 떨어지고 나면 스스로 팽창하는 공간,
저절로 탄생하는 공허만이 남는다. 그때도 존재할 우주력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존재했는가는 1년 중 딱하루, 찰나에 깜빡였다 사라지는 빛이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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