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민족의 이민, 그중에서도 주로 동유럽 출신의 매우 가난한 유대인들이 독일 한복판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짐멜은 낯선 사람들의 개입이 원래 주민들의 이 재미있고 사교적인 즐거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했다. 그는 외국인들 속에서 산다는 것이 사회성을 억압한다면,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 인식을 심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이들의 도래는 원래 주민들이 자신들이 당연시해오던 가치들에 대해 재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P74
짐멜에게 사회성sociality이 갖는 미덕은 일상적인 인상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사회성과 페어빈둥 Verbindung을 대비시켜 이 점을 설명한다. 페어빈둥은 한데 묶고, 다시 온전하게 만들고 치유한다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사회성은 상호간의 경험이 남긴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인식될 때 비극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미국의 불운한 전쟁이 끝난 지 20년 뒤 하노이로 돌아온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인 택시 운전사가 한 말은 짐멜이 생각했던 것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우린 당신들을 잊지 않았소." 그는 단지 그렇게만 말함으로써 치유가 되는 말을 해주기보다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관계를 인정했을 뿐이었다. 나와 동행한 지인은 현명하게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회성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타인에게 능동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은 연대와 대비된다. - P75
개혁가들은 교육의 공백이나 가족생활의 관리, 주택 문제, 도시로 새로 진입하는 계층의 고립 같은 사회적 질문에 관심을 보였다. 사회적 좌파 진영의 공동체와 노동 조직가들은 이런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바닥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연합주의 associationism라고 불리는 19세기의 유서 깊은 운동을 자신들의 운동의 뿌리로 삼았다. 현대의 풀뿌리 조직은 바로 그 연합주의에서 유래한다. 이 운동은 타인들과의 협력이라는 순수한 행동을 전략적 도구가 아니라 목적 자체로 강조했다. - P81
1900년까지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는 대략 이런 식으로 줄곧 이어진 경계선을 따라 나뉘었다. 이론적으로는 두 진영 모두 공동의 불의와 대적하고 있었으므로 함께 섞여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향식과 상향식 노선 사이의 차이는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분리가 현대에 우리에게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렇다. 그런 기질적 차이는 좌파 내부의 투쟁보다 더 넓은 나침반에 따라 움직인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 개혁가들 역시 외관상 이런 분리선을 경험했다. 요점 정리 형식으로 발언하는 정책 두뇌들로 채워진 싱크탱크들은 모두 옛날의 정치적 좌파의 정신을 물려받은 상속자이다. 때로는 상충하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는 상이한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풀뿌리 조직은 옛날의 사회적 좌파 정신의 상속자이다. 한쪽 길은 공유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변증법의 목표이다. 다른 길은 대화적 과정을 강조하는데, 여기서는 상호 교환이 어떤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있다. 한쪽 길을 따라가면 협력은 도구이고 수단이지만, 다른 쪽 길에서는 그것이 목표 그 자체이다. - P85
앨린스키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노조 조직가와 공동체 활동가가 각기 탄압받는 자들과 어울리는 방식의 차이였다. 그는 이 차이를 퉁명스럽게 설명한다. "알고 보니 노조 조직가들은 공동체 조직가로서의 실력은 없었다." 남 앞에 단합된 모습을 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밀실제휴의 습관 덕분에 도시의 이웃들 사이에서는 강력한 연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합하여 투쟁하기‘라는 공식은 재고되어야 했다. 명료성과 정확성으로는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94
애덤스는 차이와 참여의 문제에 놀랄 만큼 단순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즉 부모 노릇, 학교생활, 장보기 등 일상의 경험에 집중한 것이다. 그녀는 사회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의 공식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솔 앨린스키의 선구자였다. 연합 행동은 정책 공약 같은 결과물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으로 시험되어야 한다. 일상의 경험을 이룬다라는 문제에서 직접 부딪히게 되는 협력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애덤스가 여기서 내놓은 대답 역시 앨린스키가 한 대답의 어머니 격이다. 애덤스가 세운 헐 하우스는 엄격한 교환이 아니라 느슨한 교환을 강조했으며, 비공식성을 장점으로 삼았다. - P97
공동체 조직가는 외국인이건 자본주의 게임에서 패한 사람들이건, 마비된 것 같은 기분에 빠진 빈민들을 공동체 활동에 참여시켜야 했다. 조작가는 수동적인 상태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자본주의의 악덕을 극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에 집중해야 했다. 큰 그림속에서만 상황을 보다 보면 열에 아홉은 참여해도 소용없다는 느낌이 더 깊이 새겨지게 된다.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해 조직가가 헐 하우스의 영어 수업에서처럼 암묵적인 교전 규칙, 즉 교환을 위한 관례와 의례를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시카고의 사회활동가이며 제인 애덤스의 문하생인 샬럿 타월Charlotte Towle은 직원들에게 격식 없음의 논리를 지침으로 제시했다. "돕기는 하되 지시하지 말라"는 지침은 제인 애덤스에서 솔 앨린스키에 이르는 공동체 조직의 전통을 요약해주는 말이다. 게다가 타월의 지침을 실행하려면 조직 자신이 격식 없음을 즐겨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대감은 사교성sociability의 경험으로 바뀌는데, 이것이야말로 공동체 조직이 전통적으로 희망해온 것이다. - P98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격식 없음은 항상 무질서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또 이렇게 말하면 복지관의 복도와 방안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복지관 생활이 바깥 세상에서 누릴 삶의 지침이 되지 않고 그저 이따금씩 맛보는 좋은 경험에 그칠 위험도 있다. 공동체적 협력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런 우려가 적중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좋은 경험은 되지만 삶의 방식은 아니다. 협력하니까 기분은 좋았지, 그래서 어쩌라고? 오늘날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전문가인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솔 앨린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공동체에서 연대의 결과는 어딘가에 연결되어야 한다. 행동은 구조를 필요로 하며,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 P100
사회적으로 오웬은 움직이는 연대의식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구상하여, 작업장의 뿌리를 한 공동체에만 고정시키지 않으려 했다. 생산의 네트워크란 곧 노동이 이리저리 움직여 다닐 수 있다는 뜻이며, 노동의 내용이 실험에 의해 진화하고 변형되는 것처럼 작업장 내의 협력도 유연해져야 하며 이동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협력의 기술은 원래 노동자의 자아 속에 쌓여 여러 장소로 옮겨 다닐 수 있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회 연주자 스타일의 협력이다. 순회 연주자들은 구성원과 장소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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