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는 끝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온전히 선택하지 못할 터다. 우리의 전기는 대개 시간과 공간의 질서 속에 미리 마련된 자리들을 차례로 점유해가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여러 틀이 우리에게 부과되고, 여러 역할이 우리의 몸과 정신을 사로잡으며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앞으로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결정하는 만남들이 우리 운명을 빚어낸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단조로운 궤적을 따른다. 그것은 통과의례를 포함한 제도적 의례가 경계 지어놓은 리듬과 주기에 종속되며, 학업과 청춘, 부부로서의 삶과 부모 됨, 직업 활동과 은퇴, 노년에 이르기까지, 국면마다 특정한 생활 양식과 존재 방식이 거의 필연처럼 따라붙는다. 옷차림과 거주 형태, 정동affect, 일과와 습관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부여된 사회적 지위를 뒤따라가며 그에 걸맞은 정체성을 놀라우리만큼 손쉽게 수용한다. 마치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나 피할 수 없는 필연인듯, 우리는 세계와 맺는 관계를 재정렬하고 말투를 바꾸며, 옷차림과 몸가짐마저 어느 순간 단숨에 바꾸어버린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개별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결정 요인을 재구성하는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누구나 자기만의 전기를 살아간다는 관념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까지 주장했다. 내가 ‘나‘라고 부르는 나란, 삶의 주기 속 서로 다른 순간마다 사회적 세계의 여러 공간에 흩어져 있는 위치들이 일정한 결로 엮이며 생겨난 산물일 뿐이다. 내가 나의 것이라 여기는 행위들 또한 대개 그 사회적 공간들과 삶의 주기 속에서 특정 시점에 내가 점유한 위치가 낳은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생물학적 소멸 이후에도, 또 다른 이들이 차례로 등장해 나와 비슷한 행위를 되풀이하고 비슷한 정동을 경험할 것이다. 그들 역시 그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환상적인 방식으로, ‘자기 고유의 정체성‘에 귀속된 것으로 믿을 것이다. - P7
"가족 체계"는 바르트가 열망하는 유토피아와 정확히 대척점에 놓인다. 그것은 자기 리듬에 타자의 리듬이 맞춰지기를 요구하는 체제다. 이 삶의 형식은 구조적으로 훼손적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개별자들에게 하나의 공동 거주 공간 안에서 삶을 전개하도록 강제하는 순간, 그 공간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집단적 제약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말대로, 가족은 "모든 자기 고립의 순간과 자기리듬적 삶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차단한다". - P50
그렇다면 다른 삶, 더 자유로운 삶을 발명한다는 문제는 관계를 줄이고 폐쇄적인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의 증식과 경계의 해체, 그리고 틈의 확장을 중심으로 다시 사유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세상의 과도한 무게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훼손하는 것은, 우리 삶이 몇 가지 틀에 박힌 관계들, 곧 서로 대체 가능하고 단조롭기까지 한 관계들로 축소되어버리는 현실이다. …. 우정을 삶의 양식으로 다듬어가는 일은, 여느 유토피아적 기획과 마찬가지로, 바깥을 향한 열망이 끝내 관류하는 실존적 실천이다. 곧 사회적 삶을 규정해온 규범적 형식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다. - P54
우리의 우정은 언제나 서로의 어려움과 고통을 자연스럽게 떠맡는 자리였고, 끊임없이 서로를 돌보는 관계이자 도움의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면, 갑자기 일을 멈추거나 생활의 리듬과 일정 전체를 몇 시간, 며칠, 혹은 그보다 더 긴 기간 동안 조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요구를 거의 극한까지 밀어붙여왔다고 느낀다. 아마 우리의 공유된 현재를 규정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세사람 모두가 언제나 서로를 위해 예민하게 깨어 있으며, 어떤 일이 생기면 즉시 달려갈 수 있는 상태로 살아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응급실에 함께 가는 일, 나쁜 소식을 들은 친구를 곁에서 지지하는 일, 건강에 대한 염려가 생겼을 때 곁을 지키는 일, 더 나아가 상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해외로 떠나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이미 여러 차례 공유해왔다. - P66
우정의 삶을 떠받치는 충동은 아직 충분히 언어화되지 않았다. 나는 우정의 고유한 정동 내부에, 자신을 증대하고 배우며 다른 기획들을 구상하려는 욕망이 자리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 P115
우정은 세계를 새롭게 조합하고 다른 선들을 그리며, 한 작가의 삶을 다른 삶과 연결하고, 그렇게 이어진 삶들을 다시 또 다른 관계로 확장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사회라 불리는 지나치게 규범화된 공간 속에 약간의 새로움과 움직임이 돌연히 스며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 P121
몇 해의 시차를 두고 에두아르와 내가 모두 대학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끝내 그곳과 거리를 두게 된 데에는 주요한 공통 이유가 있다. 디디에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곧 다른 방식의 글쓰기 개념과 마주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디디에가 몸소 보여준 지적 실천과 우리에게 하나의 모델로 자리했던 글쓰기 방식은 언제나 이른바 공리주의적 윤리 위에 놓여 있었다. 글쓰기는 무엇인가에 실제로 기여해야 하며 그 필요성은 글 자체가 아니라 글의 바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반대로 학문 장은 연구를 목적 없는 활동으로 보는 관념 위에서 작동하는 듯하다. 문학 장과 더 일반적으로는 문화 장 역시 예술작품의 내재적 가치를 끊임없이 선언한다는 점에서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그리고 연구의 무용함은 실제로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 자신에게조차 무용한 것으로 체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셋은 모두 롤랑바르트의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학계의 관행적 틀을 풍자한 구절을 무척 좋아한다. "참담=학술 강연, 지루함=원탁 토론." 대학이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는 이러한 지루함과 공허함, 우울함이 함께 얽혀 있다. 어떤 목적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말들이 반복되고 사실상 독자조차 존재하지 않는 담론이 생산되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P163
어쩌면 부르디외가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다음의 사실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인정이 곧 신비화라는 점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인정은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배제를 동반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회적 세계 위에 드리운 저주는 상징권력이 본질적으로 대조를 세우고 차이를 새기며 구별을 생산한다는 데 있다. 모든 성스러움에는 그에 상응하는 세속성이 있고, 모든 구별은 그에 따르는 속됨을 낳는다. 그러므로 "구별된계급이 존재Étre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보완적 계급이 무Néant, 혹은 덜한 존재로 추락하는 것"을 그 대가로 치르게 만든다. 모든 공인 행위와 인정의 작동은 특정한 규범이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배제의 효과와 지위상의 비참함이 발생한다. 우리가 제도에 우리를 인정할 권능을 부여하고 그 안에서 존재할 이유를 찾고자 하는 한, 우리는 하나의 배제적 체계를 안정화하게 된다. 이 체계에서는 어떤이들의 상징적 삶이 다른 이들의 상징적 죽음을 낳는 구조, 존재와 저주가 대립하는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존재의 부조리에서 벗어나려던 형이상학적 필요성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체계에 협력하도록 만드는 근본적 동력이다. 그 결과 우리는 타인의 배제와 격하를 통해서만 자신으로 존재하고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불순함과 슬픔, 그리고 일종의 악함에 놓이도록 운명지어진 듯 보인다. - P203
관계 창조의 실존적 의미는, 자기 삶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함으로써 우연성. 자의성에 휘둘리지 않는 자율적 삶의 형식을 모색하는 데 있다. 제도적 공인을 둘러싼 투쟁에 가담하지도, 그 투쟁이 불러오는 지배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인간 조건의 비참함과 우연성, 자의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자기 삶을 정당화할 수단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기준을 발전시키고, 자기만의 세계를 발명하는 일이 요구된다. 이 때문에 관계의 발명은 자율적 예술가, 자율적 지식인, 자율적 작가의 노력을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장소가 된다. 그들은 외적인 제도와 규칙은 물론 내면화된 규칙에 대해서도 반항적이고 완강한 존재로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급진적 독립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세우는 지점에 이른다. 우정은 인정을 넘어선 삶이라는 관념을 그 자체 안에 품고 있다. 우정은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의 실천의 이름이며, 긍정의 정치, 행위와 능동성을 중시하는 니체적 도덕의 형식을 취한다. 이때의 도덕은 인정에 대한 집착과 타인의 판단을 최후의 심판으로 삼아 스스로를 재단하는 태도가 필연적으로 낳는 적대감과 반동성에 맞선다. 그리고 바로 그 판단, 곧 타인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최후의 심판으로부터 나는 디디에와 에두아르와 함께, 우리의 관계와 그 관계가산출하는 것들을 통해, 매 순간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다. - P207
3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 ‘바깥‘은 사회 밖으로 달아나는 장소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 제도적 궤도와 관계 위계로부터 거리를 생산하는 실천의 방향으로 나타나며, 이단성은 고립이 아니라 접속의 증식으로 증명된다. 이때 관계는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늘려가는 것이고, 경계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느슨해지며, 틈은 축소가 아니라 확장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가용성의 윤리는 미덕이 아니라 기술이 되어, 타자에게 열려 있기 위해 시간을 비워두고 필요하면 일상의 흐름을 멈추는 결단으로 반복되며, 만남은 사적 내부에 봉인되지 않고 카페 같은 공적 장소를 거점으 로삼아 지속의 형태를 얻는다. 결국 3이란 2의 폐쇄가 강제하는 세계 안에서 다른 사회성을 만들어내는 바깥의 구성, 곧 관계의 배치로 출구를 설계하는 일로 요약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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