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배우고 익히고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법. 숨만 쉬고 있어도 박수 칠 일이다. 기다리는 법.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때가 있다. 제한 속의 자유로움. 내 몸이 정해준 한계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은 같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앎. 나는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안다. 내 몸부림을 안다. 다짐과 맹세를 안다. 내 밤의 꿈과 악몽과 기도를 안다. 무엇이 나를 지탱하는지 안다. 내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그렇게나 커다란 공포와 아름다움, 그게 모두 내 안에 존재할 수 있으며 내 마음이 그걸 버틸 수 있다는 걸 안다. 혹은 산산조각난 마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걸 안다. 지침이 된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과 조바심, 과거에 대한 향수나 후회로 질식되지 않은 현재를 살아야 한다. 나의 최선이 닿은 곳이 여기임을, 여기, 오직 여기임을 믿는다. 쓰기의 기술 몇 개. 그건 앓기의 기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고독 속에 번창하기, 두 현실을 살기,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기, 자신에게 분명해질 때까지 실험하기, 두려움 속에 계속하기, 불확실성 속에 계속하기, 더이상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계속하기..…………
그 어떤 아름다움도 경이도 배움도 무의미해지는 밑바닥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겪고 난 지금, 이중 어떤 것은 더이상 내 마음을 밝히지 못한다. 한때 자부심을 가졌던 앎에도 무감해졌다. 병이 계속 악화되었다면 할 수 없을 소리라고 여기게 된 것도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내 삶에서 가장 놀랍고 중요한 변화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게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는 끈기와 단단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전부 아팠던 시간에서 왔다. 내 언어와 비밀과 사랑의 수원. 병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남을 것이다.

나는 되고자 했던 게 되지 못한 것인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원했던 삶을 놓친 것인가, 시간을 버리고 낭비한 것인가, 기회와 청춘을 빼앗겼는가, 상실뿐인가 뒤처진 것인가,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인가. 그래서, 다시 이 질문. 선택할 수 있다면 이 병이 없었길 원해?

답을 해보자면, 그렇다, 병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건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한 번 더 겪으라고 한다면 그냥 안 살고 말 것이며(우리가 인생을 한 번만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리 눈이 번쩍 뜨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그런 식으로 얻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라는 답이 지금의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라면 대답을 못 하겠다. 다른 방식으로는 내게 오지 않았을 변화들 때문이다.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는 태산이 시작된 곳과 대양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삶의 아이러니와 농담에 의해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만든 그 시간이 없었길 내가 어떻게 원할 수 있겠는가. 어릴 때 꿈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내 자신을 조금 더 잘 견디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나는 이 나로,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을 겪은 바로 이 나로 살고 싶다.
‘이 단체에서 오 년만 더 해보고 우리끼리 새로 단체를 만들어 키우자!‘라고 루미-세상을 떠난 내 친구-와 의기투합했던 날을 생각한다. 그 나라에서 우리가 꾸었던 꿈을 생각한다. 내가 갔을지도 모르는 섬들, 건넜을지도 모르는 바다들, 배웠을지도 모르는 외국어들을 생각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의 뒷면, 사랑하는 그 풍경을 지겨울 정도로 자주 봤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대신 나는 질병의 왕국을 오래 떠돌았으며 고통의 언어를 익혔다. 그러나 내가 과거의 꿈과 계획을 돌아보는 때는 드물고, 돌아본다고 해도 회한의 감정이 아니다. 내 작은 세계 안에서 내가 출 수 있는 가장 큰 춤을 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이 춤이 남긴 내가 마음에 든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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