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호르몬을 가장 크게 증가시키고 원상태로 회복하는 데까지 가장 오래 걸리는 급성 자극은 다름 아닌 사회적 평가 위협 social evaluative threat 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위협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작은 잘못이라도 찾아내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고혈압, 우울증, 심장병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가장 크게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 P55
교수가 되고 보스턴으로 연구년을 떠난 2019년, 나는 이번에는 그가 가르치는 학부 수업을 청강했다. 「빈곤, 인종주의 그리고 건강Poverty, Racism and Health」이라는 제목의 수업이었다. 차별이 어떻게 발생하고 인간의 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탐구하는 그 수업에서 데이비드 윌리엄스는 맨 마지막에 항상 유튜브 등으로 동영상을 보여주며, 이러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진행되는 사회운동들을 소개했다. 그 운동들의 가치는 알 수 있었지만, 수업의 전반적인 흐름과 약간 거리감이 느껴져 그에게 왜동영상들을 보여주는지 물었다. "하버드의 학부생들, 특히 흑인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듣고서 몇 번 내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 내용은 너무나 좋은데, 수업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힘들고 우울해진다고. 어떤 희망들을 함께 이야기해 주면 안 되냐고." 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부터인가 발표를 하는 자리마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케네디 Robert Kennedy의 말을 인용한다. "한 인간이 이상을 좇아 떨쳐 일어날 때마다, 다른 이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할 때마다, 불의에 맞서 싸울 때마다, 희망의 작은 물결ripple of hope이 세상에 보내진다. 그렇게 쌓인 물결들은 억압과 차별이라는 가장 강력한 장벽조차 무너뜨리는 파도를 만들어 낸다." - P66
‘강화된 경계심 측정‘ 설문지로 실제 차별 경험이 아니라 차별을 경험할 것 같다는 우려만으로도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가령 집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오늘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고 무시나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등의 스트레스가 삶을 해칠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문지로 인해 1990년대 중반 내가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당시 여러 도시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정해진 시간마다 혈압을 측정했을 때, 낮에는 젊고 건강한 흑인과 백인의 혈압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면 백인의 혈압 감소폭이 흑인보다 더 컸다. 밤에도 흑인의 혈압이 많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늘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 긴장에 따른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마치 잠이 들었을 때도 온전히 긴장을 놓지 못하고 한쪽 눈을 뜨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최근에는 낮에 차별을 경험한 흑인들의 경우 밤에도 혈압이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여럿 나왔다. 차별적인 환경은 삶의 모든 시간에 악영향을 줄 수있다. - P73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가 외부인과 만날 때,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어떤 만남은 편견과 혐오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만남이 상호 이해로 이어지기 위한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그 만남이 위로부터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더라도 인종차별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교장이, 기업주가, 대통령이 없다면 그 만남은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의 확대로 이어집니다. 저는 한국의 정치가 지난 2년 동안 이동권 투쟁의 목소리를 방관했다는 몇몇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가장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싸우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악화시킨 적극적 개입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P96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 P108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과거와 어떻게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 P155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 면세점 노동자였던 홍 씨는 과거 회사의 엄격한 ‘꾸밈 지침‘과 관련해 "면세점 직원들은 상품보다 빛나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고 한다. 상품을 빛나게 하기 위해 인간이 희생되어선 안 되듯이, 정책을 돋보이게 하려고 주거취약지에 머무는이들의 삶을 지워서는 안 된다. 재난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약자를 먼저 덮친다. 가장 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의 연쇄를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언적이고 성급한 대책 발표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정책으로 생겨날 영향력을 면밀히 검토하고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난한 협의 과정이고, 그 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의지와 인내이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은 그 지난한 조율 과정 없이도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힘이 있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 ‘합리적‘이라고 인정받기 쉬우니까. 면밀한 검토와 협의 없이 선포되는 정책은 약자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투정이나 무능함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참사 대책이 결국 미래의 또 다른 참사를 만드는 시작이 아니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가. - P161
첫째, 학제의 차이입니다. 제 부족한 이해가 맞는다면 교수님의 공부는 사회를 관찰하고 그 변화의 동력과 과정을 기술하는 학문인 반면에, 제 공부는 어떻게든 아픈 사람을 치료해야 하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야 하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응용과학입니다. 저는 의학을 공부한 보건학자이니까요. 그런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는 당장 예방할수 있는 이유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항상 앞에 있다보니, 마음이 많이 급합니다. 둘째로, 저는 연구자이지만 제가 비평가가 아니라 무대위에 올라와 있는 플레이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학문에서도 거리를 두고 시스템을 관찰하고 보다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과정이 과학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산되지 않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누군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동료들이 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며 당장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현실이 변화할 가능성은 요원합니다.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자정능력도 실은 그 구체적인 과정을 바라보면 누군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P177
리 배지트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인 것은 맞지만, 정말로 변화를 원한다면 전략이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2019년리 배지트를 만나 반동성애 운동이 점점 더 세력을 키워가는 한국의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녀는 "반동성애자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 뒤에서 작동하는 힘을 분석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 P232
그런 과정을 겪으며 우파의 반동성애 진영 싱크 탱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그들을 보며 배운 점도 있다. 더 나은 내용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 그 내용을 사람들과나눌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두고 경쟁하지만 대중과의 소통은 다르다. 과학적으로 튼튼한 언어와 대중에게 설득력 있는 언어는 다를 수 있다. 내 연구는 동성 커플이 어떻게 차별을받고 복지 혜택을 빼앗기는지 보여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연구 결과는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내가 결혼한 것은 복지 혜택 때문이 아니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 봤다. 결론은 사랑이고 헌신이었다. 그래서 동성 커플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려 애썼고, 이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 P238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자신의 정치적 진영을 옹호하는 수준에서 천안함 사건을 이해하면 그 긴장이 ‘정리‘가 되어버려요. 안심이 되고 편안해지거든요. 그럼 이 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질문이 되지 못해요. 그렇게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걱정되지요. ‘과연 이 책을 어떤 사람이 읽어줄 것인가‘, 혹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남는 이 찜찜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자기만족을 위한 글을 쓸 수는 없잖아요. 그 긴장을 잃지 않도록 좋은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 글을 써서, 우리 모두 시스템의 일부였기에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미래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 P303
만약에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게 100인데 10밖에 못 왔어요. 그럼 90만큼 남았다고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0만큼 견디고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세상이 나아가는 건 항상 힘겹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루어 낸 작은 성과들, 어렵지만 겨우겨우 버텨낸 무언가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린 항상 져요. 내내 초라해지고, 내내 지쳐요. 또 하나, 저는 역사의 일부 특별한 순간을 빼놓고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정세에서 뚜렷한 희망이 있었던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래요. 그렇다고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지요. 희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정세나 조건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희망은어떤 에너지이고 의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다 열심히 해봤는데도 세상이 바뀌지 않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을때, "세상에는 희망이 없어"라고 말할게 아니라 "나는 지쳤어" 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것 같고 그러면 이다음에, 아직 에너지가남아 있고 아직 그만큼의 좌절을 겪지 않은 다음 세대가 바통을이어받아서 또 다른 싸움을 해줄 거라고 믿거든요. 그렇게 역사는 이어달리기처럼 연결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래의 피해자들은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서 이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 막막한 싸움을 견뎌내 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사람들로 인해서 미세해 보일지 모르지만 변화는 축적되고 있고, 미래의 피해자들은 그 변화된 무대 위에서 살아가기에 조금은 다른 싸움을 할 수 있으니까요. 미래의 사람들도 분명여전히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겠지만, 그 무대는 오늘을 견뎌낸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희망은 실은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요. 천안함 생존 장병들의 싸움으로 인해 근무 중 생겨난 사건으로 PTSD를 겪는 군인들이 국가유공자가 되는 길이 조금은 더 넓어진 것처럼요. 그리고 피해자분들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보상받고 위로받고자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분들 마음속에는 동시에 ‘이 고통을 다음세대의 누군가가 또 겪으면 안 된다‘는 바람도 있거든요. 그런 마음을 기억해 주는 것, 그리고 정확한 언어로 사건을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내 준 사람에 대한 가장 나은 형태의 예의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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