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 것은 후퇴할 수도 있고, 닫힌 것이 다시 열리기도 한다는것. 한 사람의 긴 강물 같은 삶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보여주었습니다. - P38
그런데 고백하자면 저도 ‘이렇게까지‘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릅니다. 그냥 ‘해야 한다‘는 직감만 믿고 따를 뿐이죠. 우리는 알아서 행하기도 하지만 행하고 나서야 왜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기도 하죠. 저도 나중에 알아챘어요. 손에 쥔건 비록 앙상한 글 몇편일지라도 애를 쓴 그 순간순간이 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는 걸요. 그건 주부에서 작가로 직업이 달라진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변화예요. 욕구하면 안 되는 사람에서 욕구해도 되는 사람으로, ‘욕구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허용하게 됐습니다. ‘욕구란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정의해요. - P52
자가 소유주이자 살림꾼 울프의 모습은 의외였다. 책에 따르면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번 돈으로 몽크스하우스의 낡은 화장실을 고치고,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올랜도』 인세로는 방과 거실을 증축했다. 『등대로』의 인세로는 런던과 로드멜을 오가기 위한 자동차를 구입하고 말야. 이러한 경제적 자립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두달 후 울프는 진짜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고하네. 세상에나! 울프에게는 멋지고 당당한 삶의 드라마가 있었다. 이토록 생활력 있고 강인한 모습은 어째서 그간 드러나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의 옮긴이 메이가 친절하게 짚어준다. 울프는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불행한 여성 작가, 광기와 성폭력과 불감증(!) 같은 키워드로 이야기되는 삶"(199면)으로 그동안 소비되었는데, "아름다움, 기쁨, 유머, 관능, 열정, 욕망으로 찰랑대는 삶"(200면)을 살았고 물질적 풍요로부터 얻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활기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불행한 여성 작가라는 낡은 라벨이 아니라 새로운 라벨, 글 써서 집 가꾸고 차 사는 활기찬 울프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 P58
『사랑 예찬』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여러 문장으로 변주됩니다. 하나만 골라보면요.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좀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둘이 견지하는 충실성에 대한 강조예요. "사랑은 만남으로 요약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 속에서 실현된다." - P66
30대를 지나고 나니 인연의 지형에 서서히 변화가 생겼습니다. 양육에서 집필로, 주력하는 일이 달라져서겠지요. 40대는 책 쓰는 일과 글쓰기 수업에 온전히 바쳤습니다. 수업이나 책 만드는 일로 만나는 이들과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죠. 짧게는 두어시간부터 길게는 특히 수업에서는 몇 계절을 낯선 이들과 한시적 언어공동체로 만납니다. 직업, 나이, 성별 같은 사회적 외피를 벗고 책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뿔뿔이 흩어지죠. 동창도 아니고 고향 친구도 아닌 문우들. 만나는 순간 충분히 진실했기에 미련이 남지 않는 사이, 이 느슨한 대로 단단한 관계가 저는 좋습니다. - P70
내가 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과오가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나의 일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에 놓인 여성을 만나는 일엔 미숙했던 것 같아. 너에 대한 나의 소홀함처럼. 책에도 나오는 대로 먼저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자고 하거나, 시시콜콜 속사정을 묻고 위로하는 일 같은 것들, 마음을 낸 다정한 행동들, 그 계산 없는 노동이 결국 환대이고 연대일 텐데 말이야. 그런 점에서 우리 관계는 나의 무심함에도 지치지 않은 네 손끝에 빚졌다. 『붕대 감기』 말미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고백처럼 네게 전할게.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 P79
뒤처진 새 / 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 P84
이 집요한 삶의 배반을 견딜 방법은 없는가. 예전에 어느 문학잡지를 보다가 중국계 미국인 작가 이윤 리 Yiyun Li의 말이 너무 와닿아서 베껴놓은 적이 있어요. 그가 그랬죠.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 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 P107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일‘ 혹은 ‘일의 성과‘를 통하지 않고 관계 맺는 일이, 사회적 쓸모가 아닌 본연의 욕망을 바탕으로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 같아. 일이란 게 존재 증명과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편이 되어버린 사회이기에 우린 그토록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겠지. - P115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 세사르 바예호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 연명하는 어두운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노동의 결과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며, 누구의 위에 서거나 아래에 깔린 존재, 세월의 도표는 가진 자에겐 빠짐없이 보여지지만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백성의 굶주린 방정식에 대해 왕의 눈은 반만 열려있음을 고려해볼 때
인간은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지만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가진 물건, 화장실 절망, 자신의 잔인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 하루를 지우는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그는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그는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 P122
그날 북토크에서 저는 교사에게 말했어요. 내 자식이 특성화고를 가지 않아서 현장실습은 안 하다라더 청년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나중에 직장을 다니며 노동자로 살아간다.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나이들어 비정규직으로 재취업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적자생존으로 돌아가는 경쟁 시스템은 멀쩡하던 사람도 ‘늘 화가 난 사람‘이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이렇게 폭력이 만연한 풍토에서 어느 직종이라고 해서, 어떤 스펙으로 무장을 한들, 몇살이라고 해서 안전할 수 있겠느냐고요. 무엇보다 대다수 보호자가 내가 혹은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까봐 걱정하지만 내가 혹은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해야만 이런 폭력적인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준이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을 걸고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도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말아야 내 아이도 지킬 수 있다는 호소라고요. - P160
세월호 가족 이야기가 그래서 좋았습니다. 5년이란 고통의 시간을 견딘 목소리가, 슬픔에 단련된 말들이 쟁쟁하게 빛나는 슬픔의 교과서.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무엇인지 배운 것만으로도 큰 공부였어요. 그리고 좋은 책이 그렇듯 삶과 사람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담겼고요. 슬픔을 다루는 법이 정신을 단련하는 길로 통합니다. - P171
도대체 상처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란 무엇일까. 그건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선생님은 세월호참사 때 말씀하셨어요. 결국 내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에서 살고자 한다면,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묻습니다. 왜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요. 그럴 때 선생님에게 배운 아도르노의 말을 전합니다.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줄 알아야 된다." - P178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주체적인 연애를 하기 위해선 평소에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대화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그 실행에 실패할 기회가 필요하다고요. 레드 말대로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데 섹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 P220
솔닛은 세상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세상을 둘러싼 그 물의 일부가 되어, 기존의 이야기들을 훼손하거나 강화할" 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당함에 침묵하지 말자, 반박하고 저항하는 말들이 물처럼 넘치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 P237
글쓰기는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죠. 의지보다 기술의 영역이라서 생각을 연마할 연장이 필요하답니다. 내면의 낡은 생각(기간제 교사는 무능하다)을 부수고 새로운 사유(수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데도 기간제 교사는 왜 무능한 것 같고 정교사보다 낮은 보수를 받을까)를 만들어나가는 도구, 이걸 니체 Friedrich W. Nietzsche는 ‘망치‘라고 했고, 카프카 Franz Kafka는 ‘도끼‘라고 했습니다. - P241
자기와 거리를 두는 ‘바깥의 시선‘을 갖는 것만큼 ‘내면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한 것 같아요. 고통은 눈으로 보이지 않잖아요. 전적으로 ‘감‘으로 찾아오는 신호라서 자신에게 집중해 보지 않으면 느낌이 퇴화합니다. 캄빌리는 아버지 지시대로만 살다보니 자신보다 아버지의 감정과 기분에 집중하느라 자기 감각을 잃습니다. 시험성적을 받아보고는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라고 말해요. 아버지의 언어로 자기 상태를 해석하죠. 생각과 감정은 자꾸 표현해야 섬세해지고 발달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통제 구역인 집을 벗어나 고모, 사촌, 신부와 어울리면서부터 감정이 다양해지고 존중받는 기분이 무엇인지도 배워갑니다. - P138
저는 탁아소를 인간 대 자본의 투쟁이 일어나는 최전방의 상징으로 읽었어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제일 먼저 타격을 입고 가장 약한 이들이 모여 있기에 사회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탁아소가 쉽게 폐쇄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라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며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쁠 것이 분명하다‘는 어두운 전망을 품는 젊은이를 양산했다"고 지적해요. …… 그곳이 어디든지 성별, 나이, 직업, 종교, 성적 지향 등 사회적 조건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 나은 세상을 그려보는 말들이 흘러들고 경합하는 곳이 ‘좋은 공동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갈 곳을 찾지 못해 다시 대학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순순히 타협하지 않고 방황하고 다른 삶의 자리를 모색하는 시간이, 그 결기가 당신의 존엄을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의 커뮤니티에서 담담하게 시작되는 변혁"을 들려주면서도 그러나 "지름길이란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조언을 전하며, 인간다운 삶을 모색하는 그대의 계급투쟁을 지지합니다. - P273
당연한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로 세상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변화는 어슷비슷한 욕망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집단이 아니라 상식과 규범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장에서 일어나겠지요. 어느 모임이든 헤어질 때 발걸음이 가벼운 곳으로 갑시다. 우리 삶에 이로운 곳은 몸이 알려줄 테니까요. - P280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작품을 만드는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사는 동안 불행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가 더 길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닐까요. - P284
떠나간 이들이 가끔 떠오릅니다. 쓸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 역량 밖의 일이라며 고개를 돌렸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게 돼요.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이 타인과 부딪치기를 꺼리는 게으름에 대한 자기정당화는 아닐까. 또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인데, 배우려고 온 사람이 배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건 당사자의 용기 부족이라는 원인도 있지만 공동체의 무능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 P291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죠. 밤에 다니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직업을 택하는 것도, 화장부터 결혼까지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한글 떼기부터 페미니즘까지 공부하는 이유도...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죠.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혹독한 훈련 덕분일 것입니다. 인류를 둘로 나눠봅니다. 사사건건 자기 존재와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도, 걸 페미니스트도, 어긋난 대화로 고민하는 커트머리 여학생도 태어나서부터 전자의 삶을 산 경우겠지요. 남(자)의 기분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시키는 건 여자의 임무라고 배웠으니까요. 저도 감정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지적·정서적·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오래 전담했습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겠지요.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그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질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몸을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게 희망입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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