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을 모두 부정하고 싶었다. 환멸로 가득했다. 생래적 허무주의자 도리스 레싱은 아프리카에서도 또 한 차례 인간의 한계를 깊이 깨닫는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관목 숲 사이에서 "시간이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면서 또 한 손으로는 그것을 전부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P26
1925년에 『댈러웨이 부인』, 1927년에는 『등대로』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드디어 작가로서 자신감을 획득한다. "내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일종의 해방감도 느꼈다. "매일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등대로』를 쓰고 난 다음에, 나는 그들을 내 마음속에 묻어 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선언했다. - P39
책을 읽으며 콜레트는 점점 지혜로워졌다. 비로소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몇몇 친구들은 콜레트에게 너는 너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작가로 살아가면서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콜레트를 칭찬하며 여성 작가의 탄생을 기다렸다. 콜레트도 더 이상 허송세월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기 시작했다. 콜레트는 누군가를 제대로 격려해 주는 일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콜레트도 먼저 누군가를 알아보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1951년, 콜레트는 지독한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어쩌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그러자 가 보지 않은 길이 궁금해졌다. 자전적 소설을 스스로 극으로 각색까지 한 「지지」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 보고 싶었다. 주인공 지지 역을 물색하던 중 몬테카를로에서 우연히 오드리 헵번을 발견하고, 콜레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길 봐, 내가 찾던 지지야." 대문호 콜레트가 손짓했지만, 오드리 헵번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한다. 콜레트는 오드리 헵번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공연 전까지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맹렬히 연기 수업을 받을 뿐이던 오드리 헵번은 막이 오르자 서서히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막이 내릴 때쯤에는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 P48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했다. 프리다의 소망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65
제이디 스미스가 지향하는 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작가는 오직 그 질문만을 던진다. "구원은 현재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글 쓰는 여자는 오늘에 집중한다. - P93
볼프는 신화의 가치를 긍정했다. "신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학에서 문제 삼고있는 그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도록 강요합니다. …… 우리는 왜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계속해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가?"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해 낸 볼프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볼프 자신이야말로 분단과 통일 시대의 갈등 상황에서 여러차례 "희생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새로운 질문을 계속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몸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코린토스의 희생양 메데이아는 마지막까지 묻고 또 물었다. 81세가 되던 해인 2010년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볼프는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볼프는 분단과 통일의 중요 국면마다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성찰한 작가였다. 글 쓰는 여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 P122
2001년 9·11 테러 직후, 수전 손택은 부시 행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反) 이성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미국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전 손택에게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한 (과도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한 수전 손택은 문학을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고 정의하며, 문학을 선택했기에 "국가적 허영심, 속물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안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다만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인 2004년 12월, 71세의 수전 손택은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P148
1877년부터 <폭풍의 언덕>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시대마다 새로운 찬사가 잇달았다. "<폭풍의 언덕>은 어떤 소설과도 닮지 않았다."는 서머싯 몸의 평가는 정확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밀리 브론테의 "거대한 야심"을 꿰뚫어 보았다. 에밀리는 "세상을 한 권의 책 안에 결합시킬 힘"을 스스로 발견한 작가였다. 오직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용기"만을 간구했다.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세상 폭풍우에 시달리는 지구 안에서 떨지도 않는다." 에밀리는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세상 앞에 당당했다. 글 쓰는 여자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 P159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는 남은 시간을 "자서전인 듯한 글을 쓰는 데 열중하여 거의 휴식도 운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원고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가까운 시일 안에 형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출판되어 하나라도 내게 공명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나의 시작부터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이 세상의 절멸과 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거라 믿고 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쿠보쿠의 시를 잊지 않았다. "핑계대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1926년 4월 가네코후미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석 달 뒤 자살을 감행하여 천황의 ‘은사‘에 저항했다. - P182
헤르타 뮐러는 스스로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지는 곤혹스러운 시대에 과연 문학은 무엇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증언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악몽‘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가치를 환기시켰다. "이것들 보라고, 살고들 싶지." - P201
그의 단편소설 「천년의 기도」의 주인공 시 씨의 딸이 아버지에게고백한 것처럼, 이윤 리도 영어로 소설을 쓰며 해방감을 느꼈다.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는 언어를 쓰며 자란 사람은 새 언어로 말하기가 더 쉬워져요. 그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요."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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