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사람들 -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2021년‘올해의 인권책’선정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공공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차적인 복지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가족으로부터 돌봄과 복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수급권을 부여하는 잔여적 (residual) 형태로 구성된다. 수급신청자가 소득 및 자산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법적 부양의무자인 ‘1촌 직계혈족(부모, 자녀) 및 그 배우자(며느리, 사위 등)‘에게 부양능력이 없거나 미약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수급권이 보장된다. - P74

"유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복지 시설과 제도 속에서 정영희는 분명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성은 정신지체 장애인, 노숙인, 일반수급자라는 형태로 환원될 때에만 인정받는다. 거기에 ‘정영희‘라는 정체성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존재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유령"이 되었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누군가를 만나 연애 관계를 형성할 때 정영희는 성적 욕망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 성적 욕망을 매개로 상대방과 상호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며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
……..
여기에서 정영희가 표출하는 욕망은 자아의 표현이나 주체적 의지가 아닌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정신지체 장애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특성으로 이해되고 전문적 시설을 통해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정민희가 정영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포괄적 의미의 돌봄과 "사람다운" 삶은, 이러한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폐쇄 시설 역시 가족이 제공하고자 한 일상적 돌봄의 일부분이다.
물론 폐쇄병동을 단순히 통제와 억압의 기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은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가진 병리적 특성과 시설의 치료적 효과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욕망, 정상, 통제와 치료로 이어지는 문법에서 부정될 수밖에 없는 정영희의 욕망이 본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 P85

그런데도 기초생활보장제도에 관한 정보 부족이나 ‘주거조사관이 오고 나서 수급이 끊겼다‘는 식의 무성한 소문은 언제 수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현장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주민들은 기초생활수급에 대한 우려와 공포를 수없이 내게 들려주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에 곧 수급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수급이 끊기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째서 이번 달 수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오곤 했다. 기초생활수급은 쪽방촌 주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그 수단이 사라졌을 때 언제라도 일상이 중단될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 P94

그래서 그녀는 경제적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리면서도 홍인택과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쥬앙 빌(João Biehl)과 피터 로케(Peter Locke)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논의를 빌려, "욕망은 끼어들고, 회피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것으로 승화함으로써, 권력이 만들어내는 주체화의 양식과 영토화를 지속적으로 비집고 나온다"고 말한다. 정신지체 장애인, 일반수급자, 클라이언트로, 돌봄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존재로 주체화되었던 정영희는 그것을 "비집고 나오는" 욕망을 관계의 형태로 "승화(sublimation) "함으로써 동자동 쪽방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 P104

시신이 안치소에서 차량으로, 차량에서 카트로, 카트에서 화장 시설로 옮겨지는 과정은 행정 규정에 따른 절차다. 주민들이 볼 때 이러한 행정 절차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추모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처리되어야 할 "짐짝"에 가깝다. 그러나 절차와 절차 사이에 존재하는 - P117

그러나 주민들은 각자 동자동 쪽방촌에 오기까지 경험한 "과거 얘기, 가족 얘기, 자식 얘기" 등 서로의 "각자 사정"을 묻지 않는다. 물론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거 이야기 잘 안 한다"라는 조정일의 말처럼, 쪽방촌 주민들은 서로의 과거와 기억을 의도적으로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현장연구 기간 내내 많은 주민들이 이러한 ‘암묵적 윤리‘를 보여주었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다가도 "내가 너무 많이 말했네. 쓸데없는 이야야기를…………"라며 황급히 말을 중단하기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던 다른 주민에게 "그런 깊은 이야기는 막 하지 말어!"라고 소리치며 말리기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과거의 기억은 서로 함부로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주민들의 암묵적 규범이다.
이처럼 쪽방촌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암묵적 윤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의 연결은 가능하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연결은 완전한 연결이나 가까워짐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 거리 두기와 단절을 포함하는 망각의 관계에 가깝다. - P125

"여기에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거예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거죠."
김동석은 무언가를 나눠주는 활동 때문에 주민들이 "마비"되고 "길들여진"다고 생각한다. "고마움"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은 어두워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인데도 자기힘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능력은 점차 사라진다. - P158

그가 바라보는 주민은 누구나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중 후자가 주민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평소에는 전자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설령 주민들이 마비되고 길들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강제적으로 없애거나 고쳐야 할 것이 아니다.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런 거죠,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
여기에서 김동석이 말하는 "본모습"은 곽주형과 황민욱이 말한 임금노동과 경제적 생산 중심의 독립과는 다르다. 동료 주민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에서 꺼낸 "3만원"은 주민의 "본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임금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지도, 부를 창출하지도, 독립을 성취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플 때 병문안을 온 주민의 ‘줌(giving)‘에 응답해 "3만원"의 형태로 ‘되돌려주었을(reciprocat-ing)‘뿐이다.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 두 주민 사이에 이루어진 줌, 받음, 되돌려줌을 통해 둘은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상징 차원에서 연결된 ‘우리‘가 된다. 김동석이 말하는 "본모습"이란 바로 이러한 상호의존 관계와 주민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solidarity)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의 변화다. 김동석은 각종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주민이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품 지원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 돌봄, 즉 긍정적 상호의존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68

식도락에서 밥을 먹는 쪽방촌 주민의 모습, 무언가를 돌려주려 노력하는 1단지 주민의 모습이 일상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호혜적 실천이라면, 난협이나 주민협동회의 활동은 조직화된 차원에서의 호혜적 실천이다. 이들은 일상적 · 조직적인 차원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주민들의 인격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비와 길들여짐의 낙인을 거부한다. 짜장면 나눔과 식도락 사업은 주민을 위해 식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당사자인 주민에게는 결코 같은 경험일 수 없다. - P193

예컨대 칠레 산티아고 빈민 거주 지역(poblaciones)의 주민들은 선물과 증여를 통해 서로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받는 이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마치 자신의 행위가 주는 행위가 ‘아닌 척‘한다. 주민들은 안부를 묻는 척하며 은근슬쩍 노동을 돕고,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거짓말하며 음식을 나누거나, 우연한 만남을가장해 차를 태워준다.
선물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물의 시작, 즉 줌에 대한 최초의 인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아닌 척하기는 줌에 대한 상호 인지를 차단한다. 따라서 줌에 수반되는 돌려줌의 의무도 발생하지 않는다. 동료 주민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도움이 아닌 것처럼 우연으로 가장된 이상, 도움을 받는 이는 그 도움을 다시 되돌려줄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자신이 받은 도움이 돌려주지 못할 정도로 큰 것이라 하더라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에 응답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인격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도움을 받은 주민이 보답할 때에도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돌려주는 행위가 아닌 척한다. 즉 돌려주는 행위는 주는 행위에 대한 답례로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는 행위로 발생한다. 이러한 행위가 계속해서 발생하면 선물은 ‘줌-받음-되갚음-줌‘의 순환이 아니라, ‘줌. 받음1, 줌. 받음2, 줌. 받음3‘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끊어진 시간들이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층층이 쌓이는 "동시간적 선물(contemporary gift)"을 통해 주민들은 경제적 불안정성 속에서도 서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다. - P195

출구 없는 세계에서 과연 어떤 윤리적 응답이 가능할지, 그 응답의 형태는 무엇일지 쉽게 결론내리기 힘들다. 포비넬리 또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포비넬리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는 "삶은 어떤 구원적 미래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this is what is)‘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전미래적 관점에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벽장 안의 아이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아이의 고통 위에서만 자신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결이 어떠한 공통의 구조 위에서 등장하는지 ‘지금 여기의 모습‘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책이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버려짐의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개입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동자동 쪽방촌이라는 환경에서 주민들이 보여주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가능한 한 충실히 그려내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 이후 다시금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벽장을 마주하고 난 오멜라스의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 벽장 안을 들여다본 독자와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도 부분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이 연결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할지, 또 어떠한 형태로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벽장과 그 바깥의 부분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방식은 같지 않을지라도, 각자가 벽장 안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 또한 이러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 P2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