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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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쓴 책 중 하나인 『행동하는 세계에서의 사색Contemplation in a World of Action』에서 머튼은 오랫동안 교회가 상반된 것이라 표현해온 영적인 사색과 세속적 참여의 관계를 고찰한다. 그는 이 두 가지가 결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물러남과 사색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 시간은 언제나 이 세상에 대한 책임, 이 세상에서 져야 할 나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머튼에게 중요한 것은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었다.

내가 살아갈 시대는 선택할 수 없다 해도,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현재 일어나는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참여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세상을 선택한다는 것은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이 세상의 과업과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 P119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여기에 수반되는 모든 희망과 슬픈 사색을 품고 현재의 세계를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현재에 책임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좋은 삶의 희미한 윤곽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삶은 ‘신화와 미신‘,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외국인 혐오, 기후변화 부정, 그밖에 현실에 기반이 없는 다른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이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관심경제는 우리를 참담한 현실에 계속 붙잡아두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고충이 과거에 어떤 형태였는지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든 실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 발짝 떨어지는 순간에 영원히 떠나고 싶은 절박한 욕망이 지금 이곳에서 거부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다짐, 거부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참여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 참여는 새로운 방식, 즉 패권 경쟁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 바깥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참여다. - P124

모든 아이디어는 나 자신과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사이에 있는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교차점에서 생긴다. 더 나아가 생각은 내 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인식하는 것과 내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 사이에서 생긴다. 인지과학자 프란시스코 J. 바렐라Francisco J. Varela와 에번 톰프슨Evan Thompson, 엘리너 로시Eleanor Rosch는 현대 인지과학과 고대 불교의 교리를 비교한 책 『몸의 인지과학』에서 흥미로운 과학 연구를 통해 이 생각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시각이 자연의 특정 색깔과 함께 진화했다는 사례를 들며 인식은 그저 ‘저 바깥‘에 있는 정보를 전달할 뿐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저자들의 말처럼, "인지는 이미 주어진 정신이 이미 주어진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정신이 함께 창출해내는 것이다." - P247

이러한 생태학적 이해는 비와 구름, 강 같은 ‘물질‘들을 식별하게 해주는 동시에 이러한 정체성이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심지어 산도 침식되며, 우리 발밑의 땅도 거대한 판을 따라 움직인다. 또한 (구름이라는 것을 지칭할 이름이 있는 것은 유용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가리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때때로 서로 만나며 ‘구름‘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유지되는 일련의 흐름과 관계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이 이야기가 익숙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는 내가 상상 속 자아를 ‘피부라는 포대‘ 안팎의 여러 현상의 교차점에서 나타나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할 때 사용한 틀과 유사하다. 수원이 정확한 위치 파악을 거부하듯이 우리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며 우리의 관계와 공동체, 정치가 그러하듯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현실은 뚜렷하지 않다. 현실은 체계화되기를 거부한다. 미국의 개인주의에 대한 집착과 개인화된 필터버블, 퍼스널브랜딩 같은 것(원자화된 개인이 절대 서로 만나는 일 없이 각개전투를 벌이게 하는 모든 것)은 댐이 강 유역에 저지르는 것과 똑같은 폭력을 인간 사회에 저지른다.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러한 댐을 없애야 한다. 오드리 로드는 「나이, 인종, 계급, 성별: 다름을 재정의하는 여성들」에서 내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는 규정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 정체성의 여러 다양한 요소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인종적·성적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성으로서, 나의 한 측면을 뽑아내서 유의미한 전체로 제시하라고, 그렇게 나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거나 부정하라고 끊임없이 권유받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는 파괴적이고 단편적인 삶의 방식이다. 나는 내 모든 부분을 터놓고 하나로 통합할 때, 그렇게 내 삶의 원천에서 나온 힘이 외부에서 부여한 정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흐를 때에만 나의 에너지에 온전히 집중할 수있다. 오로지 그럴 때에만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은 여러 투쟁에 온전한 나 자신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있다.

이 설명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도 적용 가능하며, 실제로 로드는 공동체 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자유로워야한다고 주장한다. 흑인 발표자가 자신을 포함해 두 명뿐이었던 한 페미니스트 콘퍼런스에서 로드는 다름을 대하는 두 가지 지배적 반응(끔찍한 관용 혹은 완전한 무지)에 분노를 터뜨리며 이렇게 말한다. "다름은 견뎌야 하는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양극성의 자원으로 여겨야 하며, 변증법처럼 이 양극성의 간극에서 우리의 창의성이 샘솟는다. (...) 이때 상호의존의 필연성은 더 이상 두렵지않다." 다름은 힘이며, 개인의 성장과 집단의 정치적 혁신을 가능케 하는 창의성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의 정치가 다름과 다양성, 만남에 부적합하게 설계된 플랫폼 위에서 펼쳐지는 지금, 로드의 말은 특히 깊은 울림을 갖는다. - P259

윤리적 행위자는 미리 결정된 조화의 상태나 정적 평형, 또는 그 어떤 궁극적 상태에 다다를 희망 없이 세상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목적론의 포기는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완벽한 조화나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의 포기를 수반한다. 이러한 비목적론적 윤리는 미리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거나주어진 역할을 연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동기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불가피하게 살게 된, 질서와 혼란이 공존하는 우주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역시나 불가피해 보이는 주체적 선택을 통해 이 우주의 소중한 다른 구성원이 심각하게 파괴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목적 없는 목표이자, 하나의 지점에서 끝나는 대신 끝없는 재협상 속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관점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적 없는 목표나 목표 없는 계획 개념이 익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이 개념은 오로지 목격하고, 쉴 곳이 되어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인내를 보인 것이 유일한 ‘성취‘인 우리의 오랜 친구, 쓸모없는 나무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 P333

1914년에 베를린 자유학생연맹Free Student League 앞에서 한 연설에서 베냐민은 "궁극적 상태의 요소들은 진보라는 형상 없는 경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위태롭고 비난당하고 조롱받는 창조와 아이디어로서 현재의 모든 순간에 내재해 있다"라고 말했다. 마치 두 개의 끝이 서로 만나려고 분투하듯이, 역사의 모든 순간에는 늘 무언가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역사가의 일은 상상 속 진보의 과정에서 등을 돌리고 잔해 속에서 충동의 기록을 파내는것, 과거를 현재 속에 살게 하는 것,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명백한 해체도 이와 유사하다. 명백한 해체는 훼손dismembering의 반대인 재구성re-membering의 의미에서 우리에게 기억remember할 것을 요구한다. 역사의 천사가 무심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죽은 자들을 깨워 부서진 것들을 다시 이어 붙이려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비록 (절대로) 전과 똑같아지지는 않겠지만, 콘크리트를 부수고 고속도로를 철거하는 것은 공동체를 다시 이어 붙이는 작업의 시작점이다.
기술결정주의의 탄압과 역경에 맞서 ‘연이은 재앙 사이에 있는 작은 틈‘들은 계속 자라나고 있다. 자연과 문화는 여전히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처럼 착취에 저항하며 자기 품속의 삶을 보호하려 한다. 소살강을 따라 새로 심은 오리나무들이 지금도 계속 자라나고 있다. 오론 부족의 푸드 팝업스토어였던 마캄함은 올해 정식 카페를 열었고, 오픈 첫날 문밖에 긴 줄이 늘어섰다. 어쨌거나 지금은 철새가 매해 다시 돌아오고, 나는 아직 알고리즘으로 축소되지 않았다.
두 개의 끝은 여전히 만나려고 애쓰고 있다. 훗날 베냐민은 이러한 움직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꽃들이 태양을 향하듯이, 과거도 은밀한 향일성(해를 쫓는 식물의 성질-옮긴이)을 지니고 역사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을 쫓으려고 분투한다." 이 이미지는 나에게 시간이 멈춘 듯했던 어느 날의 장미 정원을 떠올리게 했다. - P334

2004년에 열린 전망탑 개관식에서 전 시의회 의원이었던 낸시 나델Nancy Nadel은 작고한 남편 헤이스가 지역청년들이 오클랜드 서부의 새집들에 울타리를 제공하는 목공 회사를 차릴 수 있도록 도운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헤이스의 비영리단체가 나무에 정확히 수직으로 구명을 내도록 돕는 도구인 ‘도웰링 지그doweling jig‘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말하며, "스트레스를 받거나 중심을 잃은 사람이 있을 때 셰펠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앞으로 고꾸라지지도, 뒤로 넘어지지도 말고 땅 위에 수직으로 꼿꼿이서 있으라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 P336

코패르니쿠스적 전환은 생산성이 아닌 유지와 회복, 돌봄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성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회복과 유지라는 중요한 작업은 실행되지 않는다. 일터에서는 과잉생산성을, 인간관계에서는 수행성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우리는 회복하거나 자신의 실수를 책임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상처 입히는 결과로 이어진다. 유지와 돌봄을 중시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수치심과 후회를 내려놓고 진실하게 사과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우주가 ‘섬세한 관계망‘의 보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절망의 순간을 활기 넘치는 회복의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회복은 복원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명백한 해체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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