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런 식으로 리듬이 생긴다. 습관을 각인시키고 습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나은 습관을 또다시 각인시키는 것이다. …… 여러 가지 신체적인 기술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예전에는 불충분했거나 여유가 없었던 동작들이 수정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발전은 어떤 하나의 동작이 올바르게 수정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우리는 각각 특정한 행동을 수행하는 데 특정적으로 적합한 기술을 한 통quiver 가득 갖기를 원한다.
‘통‘이라는 것은 기술 발달에 관한 중요한 이미지이다. 사람들은 간혹 기술적으로 숙련된다는 것이 어떤 과제를 실행할 올바른 방법 한 가지를 찾아내는 것이며, 따라서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보는 법을 배우는 것까지 포함해야만 더 충실하게 발달해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통이 여러 가지 기술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복잡한 문제를 완숙하게 다룰 수 있다. 한 가지 옳은 방법이 모든 용도에 다 들어맞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 P321

격식이 없는 사회적 삼각 구도는 우리가 만드는 사회적 관계이다. 먼저, 동작은 관계를 활성화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다. 다음으로, 연대하는 동작은 불수의적인 반사작용이 아니라 학습된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동작을 더 잘하게 될수록 격식 없음은 더 본능적이 되고 표현력이 풍부해진다. - P332

이런 식의 대화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경험은 모두 사회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체화된 사회적 지식embodied social knowledge‘의 형태들이다. 여기서 ‘체화‘란 단지 은유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사회적인 동작을 취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힘으로 행동하는 것은 오감을 동원한 경험이며, 타인들에게 우리 자신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타인들과 있을 때 편안해지는 그런 것이다. 예절을 나타내는단어를 찾고 있던 카스틸리오네가 이탈리아어에서 오래전부터 "통통 튀는 듯한springy"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오던 단어인 스프레차투라로 돌아간 이유 또한 바로 이런 감각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가볍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적으로 그런 종류의 즐거움과 만나게 된다.
온갖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회관계에서 최소한의 힘만 들인다는 경험은 6장에서 탐구한 불안의 감소라는 것과 대조된다. 불안 감소는 외적인 자극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이 취하는 방법은 개인적인 움츠러들기이다. 신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힘을 최소한으로 쓴다면 우리는 더 감각적이 되고, 주위 환경과 더 많이 연결되고 그것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에 저항하는 사물이나 사람들, 우리의 즉각적인 이해에 저항하는 경험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P337

구조 변경에서의 일관성 결여는 장인들이 애초에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 발생한다.
이러한 도전은 대체로 모든 수리 작업에 등장한다. 수리 작업자는 파손을 기회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경고로 생각해야 한다. 어떤 물건이 고장이 나면 우리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또 고장나기 전에는 원래 어떠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망가지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그들은 평생 살아오느라고 망가져버린 생존자이지만, 생애 초창기에는 잘못된 인생이 아니었다. 일관성 없이 수리하게 되면 변화의 느낌은 맛보겠지만 원래의 창조 행위가 담고 있던 가치는 사라질수도 있다. - P343

재건축에는 대화적 사고가 구현되어 있다. 그 결과는 파손 수리에 대한 윤리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노이에스 무제움의 전시실을 걸으면서 관람자들은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결코 잊지 않게 되지만, 그 기억은 폐쇄적이거나 자족적인 것이 아니다. 그 공간적 서사는 앞으로 전진하며, 단지 새로워 보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가능성에 활짝 문을 열어준다. 그 정치학은 변화의 정치학이며, 파손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고정되지 않으면서 역사적 균열을 뛰어넘는 정치학이다.
협력을 수리할 때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 P348

나의 세대에 속한 여러 구직 카운슬러들은 심리요법 훈련은 받았지만 심리치료사는 아니다. 제인 슈워츠 같은 조언자들은 고해를 듣는 신부처럼 굴지 않으려 한다. 즉 의뢰인의 정신 내부로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의뢰인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가령 어떤 의뢰인이 가정 폭력에 굴복한다면, 카운슬러의 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이 담당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초연한 처신법은 시간의 제약 때문이기도 하다. 카운슬러들은 대개 수백 명의 의뢰인을 만난다. 경험 많은 카운슬러들은 지나치게 동정심에 사로잡히는 초심자들의 태도를 시정해준다. - P358

앞에서 우리는 협동적으로 듣는 기술을,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감정이입을 통해 이해하고 응대하는 것을 기준으로 설명한 바 있다. 통상 "다른 말로 하면"이라는 구절은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위해 쓰인다. 하지만 주앵빌이나 킬에게 그런 구절의 목적은 그 메시지를 어떤 식으로든 굴절시키려는 데 있다. 주앵빌의 기술을 실행하는 협상자는 일부러 상대방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것처럼 하여 앞뒤를 연결할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분명 주앵빌은 듣는 기술이 뛰어난 청중일 뿐만 아니라 영리한 독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테크닉이 플라톤에게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재구성하여 그들 자신이 나타내려 했던 뜻과는 약간 달라지게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생각을 열어젖히기 위해 일부러 잘못 듣는다는 것이다. - P364

참여가 달성해야 하는 과제는 참여 자체를 참여자들이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의의 경우, 그것은 회의를 구축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악기 수리 공방처럼 구축된 회의라면 신체 동작을 통해 합의를 창출할 것이다. 실험실 스타일의 작업장 같은 구조를 가진 회의라면 공개적으로 진행되겠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야 하며, 한편으로는 확정된 의제와 또 한편으로는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방황이라는 두 협곡 사이를 교묘하게 조종해서 지나가야 한다. 신경 써야 할 요소들이 많은 회의라면 구조 변경 수리에서처럼 사람들을 회의 탁자에 불러 모으는 수고와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리겠다"는 환상은 품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회의에서 참여자들은 암묵적-명시적-암묵적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기술의 리듬을 통해 서로에게 더 잘, 더 충실하게 이야기하는 의례를 개발할 것이다. - P371

공식적인 회의가 가진 진짜 장점은 그것이 이런 종류의 유화정책의 악덕을 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발언 내용을 기록하여 문서로 남긴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보존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최대한 강력하게 제시할 수 있다. 기록은 공식적 투명성을 제공하며, 회의에서 타협이 이루어지더라도 참여자들은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굴복한건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진정한 신념을 협상 테이블에 내놓았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기 때문이다." 공식성은 모든 참여자들이 발언 형식과 순서를 준수하거나 절차에 따라 발언권을 얻는다면, 어떤 발언도 배제하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갖는다. - P376

어떤 면에서 사기에 대한 뒤르켕의 설명은 간단하다. 조직에 대한 강력한 애착은 사기를 높이는 반면 그 애착이 약하면 사기는 저하된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비영업부서 직원들의 사례도 뒤르켕이라면 바로이런 식으로 직설적으로 파악했을 것이다. 즉 좋은 노동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는 있었지만 사기는 낮았는데, 이는 일터가 충성심을 거의 길러주디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뒤르켕에게는 조직이 공식적인 관료제의 구조보다 더 중요했다. 조직은 군대나 정부의 부서처럼 전통과 상호 이해, 의례, 예절을 체현하는 곳이었다. 그런 것은 조직 도표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뒤르켕에게 우리는 조직 문화라는 개념을 빚지고 있다. 이 문화에서는 초연함이 사기를 저하시키는 경험이 될 수 있다. - P406

헌신을 시험하는 세 번째 방식은 신뢰성reliability이다. 우리는 이 시험방식이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사건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행동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벌들은 춤추겠다고 결정하는 게 아니다. 춤을 추려는 충동이 그들 유전자 속에 들어 있다. 헌신을 할 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요소가 많아질수록 그 신뢰도는 낮아진다. 상황과 욕구가 변하면 헌신을 철회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영장류는 집단에서든 개별적으로든 헌신을 철회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철회를 배신으로 규정하여 도덕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거나, 감정적인 틀에 집어넣어 실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른인 우리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때가 있고 그들도 우리를 실망시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인들의 경험 속에서 구축된 헌신은 벌의 춤처럼 어김없이 일어날 수는 없다.
1980년에 카브리니 그린 공동체의 동향인 모임에서, 그곳 출신인 위생국 현장감독이 그랬듯이 나 역시 뭔가를 돌려주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다. 시카고에 살 때 나는 가끔 카브리니 그린으로 돌아갔지만, 첫째, 셋째 토요일에는 뉴욕의 스페니시 할렘에 있는 주거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가 돌려주어야 할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즉 아이들에게 음악 연주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돌려주기‘는 그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무 바빠서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면 그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그것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뭔가를 돌려준다는 것이 내게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들 눈에 나는 신뢰하기 힘든 사람이었고, 내가 꼬박꼬박 가려고 최대한 노력하기는 했어도 그들에게는 그런 인상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점차 나는 그들의 불안감과 나의 신뢰 가능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마침내 뭔가를 돌려주고자 하는 욕망이 내 마음속에서 스러져갔다. - P412

카리타스는 이런 신앙을 기반으로 한 급진적 헌신의 기초 이념이었다. 기독교 신학에서 카리타스caritas라는 라틴어 단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관심을 보이는 재능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이 뭔가를 얻어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전략적 사교성이나 교활하게 계산하는 기술과는 다르다. 카리타스는 또 최소한 동물 행동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이타주의와도 다르다. 그것은 기꺼이 싸우다가 죽겠다고 하는 병정개미나 인간처럼, 그룹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P417

이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려고 가장 열심히 노력한 미국인은 20세기에 오랫동안 미국 사회당의 지도자를 역임한 노먼 토머스NormanThomas(1884~1968)였다. 그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지역적 활동을 선호하는 미국적 경향을 결합하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도구는 그 자신의 행동이나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서 보여준 격식 없음이었다. 그는 공동체적인 협력 경험을 지속 가능한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을목표로 삼았다. …… 토머스가 본 대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아메리칸 드림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밖을 내다보고 서로 협력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데 있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사교성은 이 목표를 위한 급진적 수단이다. 최소한 토머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따를 만한 규범이나 지배자 없이도 함께 어울리는 과정에서 경험을 더 많이 얻게 되므로 서로를 더 귀중하게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 P426

공동체 자체가 소명이 될 수 있을까? 신념, 정체성, 비공식적 사교성은 빈민들이나 주변적인 사람들의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방법들을 시사하지만,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다. 프로이트는 누군가 질 높은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자 "사랑하고 일하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조언에는 공동체가 빠져 있고, 사회적 팔다리는 절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는 공동체적 삶을 하나의 소명으로 끌어안았지만, 그녀가 말한 공동체는 대부분의 빈민들이 직접 경험하는 종류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참여자들이 모두 동등한 입지에 서 있는 공동체였다.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이것이 노먼 토머스의 지도 원리였고, 나는 그것이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게토에 살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이다. - P431

‘대화법‘은 사실 매우 오래된 서사적 관행에 붙인 현대적 명칭이다. 고대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 명칭을 사용했는데, 몽테뉴의 에세이에서처럼 조각들로 모자이크하여 일관성 있는 큰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리킨다. 하지만 몽테뉴는 내가 볼 때 이 문학적 관행을 상당히 교활하게 채택한 최초의 사람이다. 조금씩, 한 조각 한 조각씩 서술하여 독자가 느끼는 공격성을 억누르는 것이다. 잔혹성에 관한 에세이의 예에서 보듯이, 그는 독자들의 감정적 체온을 발산시킴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잔혹성이라는 악덕이 가진 터무니없는 부조리함이 더 뚜렷하게 부각되기를 원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이 "악덕의 과오를 알게 되기"를 기대했다. 몽테뉴에게는 이것이 대화법의 요점이었다. 어떤 문제든 혹은 실천이든 모두 전체를 돌아보면 여러 측면을 알게 되고, 초점을 옮겨보면 사람들의 반응은 더 냉철하고 더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있다. - P437

호기심은 우리가 자신을 넘어서 바라보도록 "격려"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온 말이지만, 바깥을 내다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게 반영된다고 상상하거나, 사회 자체가 거울의 방처럼 만들어졌다고 상상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사회적 연대를 제공한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는 기술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몽테뉴는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이 가장 중요한 사회적 덕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작은 시골 영지에서의 삶에 대해 기록한 글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습관과 취향을 이웃이나 노동자들의 그것과 비교한다. 물론 그는 유사성에도 흥미를 가졌지만 특히 그런 습관과 취향의 차이에 주목했다.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는 모두 서로 간의 차이와 부조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
모두들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인들에게 흥미를 품는다는 것이 아마 몽테뉴의 글에서 가장 급진적인 측면일 것이다. - P439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 저자는 정치에서 협력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문제 삼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나와 너, 우리와 그들 간의 분열이 극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대립의 정치가 아닌, 협력의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는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경쟁하는 존재인가, 협력하는 존재인가. 경쟁과 협력이 균형을 맞출 수는 없는가.
2부에서는 협력이 약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은 협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그럼으로써 협력과 권위와 신뢰가 모두 약해진다. 그것이 낳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곧 비협동적 자아, 개인주의라 불리는 자아이다.
그러면 이제 협력은 되살릴 길 없이 와해되었는가? 3부에서는 그것을 다시 강화시킬 수 있는 방식을 찾아 나선다. 저자는 협력이란 익히고 훈련해야 하는 하나의 기술, 즉 실기craft 라고 말한다. 그런 기술은 개인적인 훈련을 통해 얻어져야 하며, 또 그것이 튀지 않게 실생활에 녹아들어가게 만드는 방식인 종교적·세속적 의례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또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헌신도 필요하다. - P468

장인이 기능을 숙달해가는 과정은 기존의 서구 관념적 모델과는 전혀 다른 손과 머리를 함께 쓰는 과정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만나는 저항과 불분명한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아내고 포용하면서 그런 상태와 친숙해지는 과정이다. 협력은 모두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 연주에서처럼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개인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그 차이를 함께 엮어나가는 것이다. 타인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고, 타인의 동작에 반응하는 법을 익히면서, 그렇게 반응하는 능력을 실제 작업과 공동체 활동에 적용하는 것이 협력이다. 대화적 협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넷의 글에서 가장 유쾌한 충격을 받게 되는 부분은 바로 이처럼 물질과 부대끼는 삶의 현장을 사회적 인간 탐구의 중심으로 삼는 방식이다. 관념과 물질의 이분법을 간단하게 뛰어넘어버리는 것이다. "손으로 생각한다"는 장인의 모토는 육체노동에는 의미를, 의식에는 무게를 부여한다. 이 책의 관심은 그 모토의 협력적 측면에 주어진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손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애매모호하고 매끄럽지 않더라도 인간이 보다 구체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해진 시대에 개인들이 개인주의의 벽에 갇히지 않고 집합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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