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 아마추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솜씨의 수준을 평가하는 말은 아니었다. 예술의 아마추어는 그림을 수집했고, 음악을 했고, 역사를 연구했으며, 마찬가지로 과학의 아마추어들은 천문학에서 의학, 식물학으로 옮겨 다녔다. 독자적인 생계수단이 있는 경우, 아마추어들은 지식의 산책자flaneur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수입원이 없는 장인들은 이런 사심 없는 방식으로 처신할 여유를 좀처럼 낼 수 없었다. - P189
하지만 협력의 어떤 점이 근대적인지를 이해하고 싶으니 우리는 이 대비를 완전히 포기하기는 싫다. 실험은 대화적 대화를 유발한다. 결말을 확정짓지 않은 채 가설과 과정과 결과에 관해 사람들과 토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막 등장하기 시작한 과학은 대화적이고 결말이 열린 대화를 긍정적으로 본 데 반해 기독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가톨릭교는 그것이 교회의 권위를 훼손할까 봐 겁을 냈고, 개신교는 자유로운 사고에 의거한 토론이 자신감이라는 죄로 연결될까 봐 겁을 냈다. 밀턴이 자신의 작품에서 이브와 뱀 그리고 이브와 아담이 나눈 대화를 통해 표현한 두려움 바로 그것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은 이렇게 쓴다. 대화적 대화란 "인간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념을 긍정한다. 창조적 이해를 위해서는 (・・・・・) 자신의 이해 대상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192
꽌시는 사회적 결속social bond이 어떤 식으로 경제적 삶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본질적으로 이 결속은 비공식적인 성격으로, 기존의 규칙과 규제의 엄격한 테두리 밖에서 지원해주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오늘날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혼란스러운 중국의 상황에서는 이 결속이 필수적이다. 중국 사회의 공식적 규칙들 가운데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네트워크는 사람들이 살아남고 번영을 누리기 위해 이런 규칙을 우회하도록 도와준다. 비공식적인 결속력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는 그것이 개인적인 대화든 혹은 솔 앨린스키의 공동체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든 대화적 교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회에서 이런 교환의 범위를 확정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교환이 중국인들에게서처럼 실질적인 가치를 갖는가? 우리가 협력에 대해 중국인들처럼 생각하고 싶어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꽌시는 비공식적인 것이지만 지속 가능한 것이 되고자 한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장래의 언젠가 반드시 돌려주리라는 것은 알지만, 어떤 식으로 그것을 돌려주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꽌시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는 관계이다. 서구식 계약의 기준에서 보면 그처럼 확정되지 않은 기대는 어떤 실체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의 학생이나 공무원이나 실업가에게, 그런 기대는 분명한 실체를 지닌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책임감이 없다고 판명된 사람들은 처벌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현재 행동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해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둘째로, 꽌시 네트워크 속에서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사회 서열상 아래든 위든 당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 혹은 당신에게 필요한 누군가와도 꽌시를 맺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다른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의 가족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3장에서 서술되었듯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서구 문화에서는 수치심이 자제력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수치심은 자신의 신체나 발언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데서 연유한다. 현대의 가족생활, 더욱이 현대의 사업 관행은 이런 자립성의 개념을 확장했다. 타인에 대한 의존성은 약하다는 신호, 성격적 결함의 신호로 여겨졌다. 자녀를 기를 때나 직장에서 우리의 제도는 자율성과 자족성의 증진을 추구한다. 자율적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어딘가 깊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사회적 안착social embeddedness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P220
획득된 권위는 일상적 불평등의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것은 지휘와 복종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굴욕감을 완화시킨다. 베버식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서 굴욕감이 생기는 것은 하인에게 아무런 선택지가 없을 때이다. 더 폭넓게 본다면 주인이 전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인은 굴욕감을 느낀다. 굴욕감을 주지 않는 사장은 보스턴의 공장에서처럼 소리도 지르고 욕을 할 수도 있고, 춤토르의 스튜디오에서처럼 현장의 직원들에게 일을 처리하도록 맡기고 자신은 이곳저곳으로 조용히 돌아다닐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그는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다. 우리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처럼, 굴욕감이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3장에서 언급한 대로 엘리아스는 이 과정을 방귀 뀌는 것이 자신을 수치스럽게만든다는 식의 개별적 경험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엘리아스는 수치심이 더 장기적인 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권위를 획득하는 의례에서 분노의 순간들은 지나간다. 일시적으로는 굴욕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수치심 역시 사라진다.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문명화하는 의례의 힘이 가진 한 가지 측면이다. 사장과 직원들 간의 관계가 그런 감정 폭발로 전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토론이 구속력 있는 의례가 될 수 있다. 다만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있다. 토의의 주제라는 게 기계에 기름칠을 언제 할지, 아니면 침대를 어디에 놓을지 같은 문제처럼,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의견 교환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일터가 구성된다면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여기게 된다. 적어도 내가 시간을 보낸 보스턴의 신발 공장에서는 그랬다. 폭풍이 부는 사이사이의 며칠 혹은 몇 주일 동안, 주임과 기술자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어떤 브랜드의 산업용 윤활유나 워셔액, 보호막 등이 기계에 가장 좋은지 논의했다. 여기서도 말을 듣고 메모를 하는 주임들은 권위를 획득한다. - P246
신뢰란 홀바인의 탁자 위에 놓인 도구들과 같다. 당신은 작동법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그것들을 기꺼이 사용하려 한다. 은행가가 잘 알지 못하는 파생상품을 거래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거래하는 금융 상품을 믿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위험에 대한 그의 지식보다 더 강하다. 건축가의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 자신도 결코 자금을 모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런 프로젝트를 믿는다. 그들을 책상 앞에 묶어두는 것은 짐멜이 말한 믿음의 도약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그 믿음이 입증될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믿는 마음이다. - P248
의례는 획득된 권위를 이루는 바탕의 일부분이고, 은폐하는 거짓말은 믿음의 도약을 필요로 하는 신뢰 속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잡담은 제쳐두더라도, 위기 관리와 문제 해결은 협력과 파열을 연결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런 관계는 모두 매우 섬세한 소통을 포함한다. 더욱이 삼각 구도의 각 요소는 연합association에 의해 강화된다. 파열을 일으켰던 사건이 처리될 때 신뢰는 더 강해지며 권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총괄적으로 볼 때 섬세하기도 하고 결속력도 있는 사회 구조이다. - P252
가장된 연대감, 타인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과 압박 하에 놓인 단기적인 팀워크는 4장의 시작 부분에서 논의했던 지속적인 사회적 연대의 모델 케이스인 꽌시와는 극적으로 대비된다. 꽌시는 조심스런 악수가 아니라 비판과 날카로운 조언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모델로서 전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날카로운 조언을 받아들인다. 무엇보다도 꽌시는 지속적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건을 초월하게 되어 있는 관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네트워크는 발전하여 더 많은 파트너를 포함하게 된다. 각 파트너들은 서로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의지한다. 스포츠 팀과는 달리 참여자들은 여러 게임에 동시에 관련된다. 꽌시의 관계에는 효율을 위한 축소나 절감이 없다. 오히려 네트워크는 확대되어 점점 더 큰 모자이크가 되고 더 강해진다. - P272
여기서 비영업부서의 기술자들이, 위기로 치닫는 동안 컴퓨터용 회계처리 프로그램을 해석하지 못하는 상급자들의 무능력보다는 그들의 무관심을 더 큰 문제로 꼽았다는 사실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순전히 소질aptitude 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또 그들이 탓한 것은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관리자들(그들 중에서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많다)보다 더 무관심했다고 판단되는 자기 조직의 최상급자들, 즉 사장, 이사, 임원 들이었다. 그런 요인들이 어떻게 혼합되었든 간에 결과는 유능함과 위계간의 전도된 관계, 상급자들에 대한 신뢰를 와해시키는 고통스러운 역행bitter reversal이었다. 바로 이러한 형태의 차별화하는 비교는 사일로 효과를 심화시킨다. 진심으로 들어주려는 관심이 없다면 소통하고 싶은 욕구도 사라진다. 비영업부서의 노동자들이 이런 전도된 관계를 상당 기간 경험하게 되면 그들은 상관의 온갖 세세한 행동에서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거드름을 피울 자격이 없음을 확인해주는 표시를 찾으려 애쓰는 무자비한 심판관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별화하는 비교를 끌어오는 사람도 스스로에게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 이런 상황에서는 차별화하는 비교의 결과가 은밀한 만족감보다는 씁쓸함이 되기 십상이다. - P277
그들은 협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테크니컬한 소양을 갖추고 있는데 반해 상급자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신뢰감의 감소 현상도 느꼈다. 위기는 권위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종이였는데, 상급자들 중에는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회사를 방어하지 못하고, 다른 지도자들이나 시스템 탓을 하면서 개인적 책임을 회피했으며, 일자리를 잃게 된 부하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었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 P283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정교해졌다. 하인츠 코후트 Heinz Kohut는 ‘거울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에 "과대적 자기grandiose self"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나‘는 현실의 모든 공간을 채운다. 과대적 자기가 표현되는 한 가지 방식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통제할 필요를 느끼는 데 있다. 코후트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사람들이 성인으로서 겪는 경험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신체와 감정에 가해지기를 바라는 통제가 더 강조되는 것이다. 확실히 과대적 자기에 굴복한 사람들은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가 "억압되고 노예화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코후트가 활동하던 무렵의 또 다른 정신분석가인 오토 케른베르크Otto Kernberg 의 견해에 따르면 그로 인해 행동 자체가 가치를 잃게 되는 결과가 생긴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는 "나는 어떤 기분인가?"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몰입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현실이 개입하게 되면 불안감을 느낀다. 자아가 풍요로워지기보다는 자아가 상실될 것 같은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통제 받고 있다는 느낌을 되찾게 되면 불안감은 줄어든다. 내면에서 이런 정신분석적 거래가 발생하면 외적으로는 사회적 결과가 뒤따르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회적 협력이 감소하는 현상이다. - P296
허약하고 묵직하지도 않고 신뢰할 수 없는 사회 질서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움츠러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경험에서 협력보다는 움츠러드는 쪽으로 무게를 더해주어 현대 사회의 저울추를 기울어지게 만드는 힘이다. 철학자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은 사회가 사람들의 가능성을, 무엇보다도 협력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풍요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것을 약화시킨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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