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통찰은 얻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상 무언가를 ‘건지려고’ 들면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이용해서 이력을 꾸미거나 평판을 높이려는 생각을 포기하니까 마음의 빗장이 열리면서 글이 쏙쏙 들어왔다. 단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게 되고 작가의 혜안도 느껴졌다. 그야말로 엑스타시스(ekstasis,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밖에 서다‘ 란 뜻), 색다른 정취에 의식이 황홀경을 느끼는 엑스터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나를 넘어서는 그런 느낌을 맛보았다. - P309

"우리는 정설, 곧 바른 이론보다는 정행, 곧 바른 실행을 중시합니다." 입을 닦고 테이블에서 빵 부스러기를 치우면서 하이엄이 차분히 대꾸했다. "바른 믿음‘ 보다는 ‘바른 행동‘을 중시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가 어떻고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만, 생각을 어떻게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건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시 같은 것에 불과한 거니까요. 우리 유대인은 무얼 믿느냐에는 개의치 않아요. 그저 할 뿐입니다." - P402

사실은 그로부터 6년 전 핀칠리 센트럴 지하철 역 부근의 허름한 카페에서 달걀 토마토 샌드위치를 같이 먹다가 하이엄 머코비한테 언질을 받은 셈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앙은 실천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교는 아침을 먹기 전에 스무 가지의 실천불가능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는 도덕의 미학이요 윤리의 연금술이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신화라든가 종교가 참다운 까닭은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학적 혹은 역사적인 실재에 부합해서가 아니라 생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신화와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끌어와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인물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려고 영웅 신화를 만든 게 아니다. 예수나 붓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웅 신화의 역할은 행동으로 나서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영웅을 일깨우는 데 있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구도라는 것은 ‘진리‘ 라든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알차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인간적 인격체나 천국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온전히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신격화하는 것은 그래서다. 마호메트, 붓다, 예수의 원형은 모두 충만한 인간성의 상징이다. 신이나 열반은 우리의 본성에 덤으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룩해질 수 있다. 자기 안에서 그걸 깨달아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
한 브라만 사제가 지나가다가 붓다한테 당신은 신이요 유령이요 아니면 천사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어느 것도 아니며 "나는 깨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 안에서 잠자던 능력이 깨어날 때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옛날에 내가 한 수도 생활은 나를 오그라뜨렸지만 참다운 신앙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믿었다. - P456

다양한 종교 전통을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자아에서 벗어나려는 일관된 노력이 엑스타시 곧 몰아의 경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엑스타시스, 문자 그대로 자아의 밖에 선다는 뜻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의 신학자는 자기를 비우는 이런 겸허가 신의 일생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신화를 만들어냈다.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그렇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다.
나를 버릴 때 비로소 평소의 경험을 뛰어넘는 다른 가능성에 눈뜨면서 가장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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