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는 일은 내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표현할 수 있으니까, 내 인식의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한계에서 멈추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쓰고 읽고 말하고 듣는 거 아닐까요? 제가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당신의 이야기에 몸을 바짝 당겨 앉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서로의 한계가 만나 연립하는 순간을 믿어서요. 우리는 부딪치며 넓어지는 중이에요." - P140
나는 오해한다. 쉽게 오해한다. 두려움은 오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미움도, 적의도, 분노도 오해일 수 있다. 설사 그게 오해가 아닌 진실이어도 나에게는 소통할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겁이 난다는 이유로 미리 차단하고 싶지 않다. 일단 진심으로 표현한다. 언젠가 상대에게 내 말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샤워하다가, 밥 먹다가, 변기에 앉아 있다가, 혹은 자기와 사랑하는 이들이 차별이라는 벽 앞에서 멈칫하거나 다쳤을 때. 어떤 순간이든 그에게 이 말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정법을 안고 계속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쉽게 두려워하지만, 결국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느끼는 순간은 온다. 내 오해가 깨졌던 순간들처럼, 내 두려움이 억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처럼. 그렇게 두려움과 오해를 넘어 말을 건넨다. - P146
"저는 사랑의 신화를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나를 알 수 있을까요. 타자가 있어서 나를 아는 것인데, 내가 사랑하지 않고 누구와 공감하고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언제나 사랑을 꿈꾸죠. 비록 사랑을 통해서 상처 입고 눈물 흘리고 때로는 에로스의 바다에 빠져서 익사한다고 할지라도 징검다리로 올라올 수 있는 힘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사랑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지요. 내가 죽지 않기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나를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요. 사랑이라는 건 누구한테나 가능한 것이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오물을 몸에 간직한, 사악하고 비겁하고 연약한, 타자를 삼키며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뱀파이어인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며 세계를 책임지는 일. 혐오와 사랑, 무수한 아이러니가 흐르는 곳에 아이러니한 내가 있다. - P163
줌파는 책에서 자주 술에 의존했던 내 엄마의 이야기를 읽었다면서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머니의 술은 제 슬픔과 같다고 생각해요. 저도 자주 생각했거든요. 술이 몸에 받았다면 정말 술에 기댔을 거라고요. 저는 승은 씨 어머니의 술이 제 눈물처럼 보였어요.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술은 꼭 필요한 표현이었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눈물을 훔쳤다. 엄마는 자주 말했었다. "술을 먹으면 솔직할수 있었어.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었어." 줌파와 엄마의 울음이 겹친다. 나는 말이 되지 못한 그녀들의 울음을 들으며 자랐다. 슬픔의 이유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나 또한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을 삼키거나 뱉으며 살았으니까. - P190
울부짖음은 주로 짐승의 소리, 여성의 소리로 폄하되어 왔다. 눅눅한 감정을 제거하고 바짝 말린 소리만이 공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배웠다. 나는 그 잠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싶다. 나는 당신의 슬픔을 하나하나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늘 하늘이 너무 맑거나 흐려서 눈물이 흐를 수도 있고, 아픈 기억을 직면하는 괴로움으로, 사무친 그리움으로, 이유 모를 슬픔에 잠길 수도 있다. 다만 당신이 울음을 참거나 홀로 삼키지 않길 바란다. 당신에게 울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길 바란다. 그 울음이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울음 뒤에 가려진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내 자기만의 언어로 재해석할 관계가 곁에 있길 바란다. 당신의 울음을 듣기 위해 자세를 잡는다. 어떤 울음은 가장 적극적인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 P194
불안정하고 불안하다고만 여겨왔던 침묵을 다시 생각한다. 침묵은 여러 가지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이미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당신이 못 듣고 있어서 힘들다는 서운함의 표현이기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며 뱉는 신음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진공 상태에 있다가 무언가 서서히 열리며 피어오르는 불씨이기도, 당신과 이 공간이 이야기를 꺼내기 믿을 만한 곳인지 가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침묵을 불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희미해진다. - P250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역할을 가진다는 것,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 "이 경찰이 폭력을 쓰는 것을 내가 목격했습니다"라는 말이든 "아니, 너랑 섹스하기 싫어"라는 말이든 "내가 꿈꾸는 사회는 이렇습니다"라는 말이든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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