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괴롭다면, 숨고 싶다면, 나는 왜 이 일을 할까? 왜 굳이 드러낼까. 표현할까. 지난 7년간 망설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걸까? 이 질문이 있었기에 드러내는 쪽으로 몸을 기울일 수 있었다. 나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편견을 먹고 자라는 성장 위주의 언어가 아닌, 편견을 해체하고 세계를 돌보는 언어. 배제가 아닌 연대의 언어. 나를 자유롭게한 언어. 당신에게도 꼭 닿길 바라는 이야기들. 자유들. 그이야기를 전할 때만큼은 익숙한 문장을 뒤로하고 용기 낼 수 있었다. - P6

나는 아직 더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야 한다고 믿는다.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연령, 이주 상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정상 규범을 강화하는 단일화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 세계에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흘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 우리 안에 가라앉은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 P9

나는 신뢰받지 못했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며 간결하지 못한 화법이 몸에 밴, 꾸미는 걸 좋아하는 여자. 그건 사회에서 주입받은 ‘여자’의 모습이었고, 신뢰와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불편한 상황에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무표정을 짓기도 한다. 화장과 렌즈를 생략하고 안경을 낀 채 앞에 서는 날도 있다. 고개는 끄덕이고 싶을 때만 끄덕이며 싫은 건 정확하게 싫다고 표현한다. 특히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 주제(위치)를 모르고 함부로 중립이나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참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면 나는 기꺼이 변할 수 있다. 그렇게 표현해도 상대는 자기 관리 못하는 여자가, 감정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받아들이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모든 말과 태도를 앞서는 건 발화자의 위치라는 사실을 이미알고 있었다. - P39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에이즈에 걸린 대통령과 동성애자 부통령을 원한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 독성폐기물이 쌓인 땅에서 자라 백혈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원한다. 열여섯 살에 낙태해본 대통령을 원한다. 두 악인 중 덜 나쁜 자가 아닌, 기꺼이 뽑을 수 있는 후보를 원한다. 마지막 연인을 에이즈로 잃은 사람, 자려고 누울 때마다 죽은 연인을 떠올리는 사람, 연인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 품에서 그를 놓지 못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집에 에어컨이 없는 대통령을 원한다. 병원, 차량국, 복지센터에서 줄 서본 적 있는 대통령을, 실업과 해고를 경험한 대통령을, 성폭력, 동성애 혐오 폭력을 겪고 강제 추방 당한 대통령을 원한다. 마당에서 십자가가 불태워지고, 무덤가에서 밤을 지새워본 사람, 강간에서 살아남은 사람, 사랑에 빠지고 상처 입어본 사람, 섹스를 존중하는 사람, 실수하고 실수에서 배워본 사람을 원한다. 나는 흑인 여성 대통령을 원한다. 치아가 엉망이고 태도가 불량한 사람, 끔찍한 병원 밥을 먹어본 사람, 크로스드레서, 마약에 중독되었던 사람과 회복 중인 사람을 원한다. 시민불복종 운동에 헌신했던 대통령을 원한다.
그리고 나는 왜 이런 일이 불가능한지 알고 싶다. 왜 우리는 대통령이 항상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광대여야 한다고: 항상 창녀를 사는 사람이며 결코 창녀여선 안 된다고 배우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왜 대통령은 항상 사용자이며 결코 노동자여선 안 된다고 배웠는지, 왜 항상 거짓말쟁이고 도둑이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을 거라고 배우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 조이 레너드Zoe Leonard, 〈나는 대통령을 원한다! Wanta President〉(1992) - P42

아빠는 내가 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성향보다 지위의 문제였다.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며 살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거나 계약직이었던 20대에도, 대필 작가나 외주교정자였던 30대에도 갑보다는 을의 위치에, 때로는 병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지시하고 요구하는방법을 알지 못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 P55

청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가르친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가르친다‘는 말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나이와 권력에 따라 당연히 주어지는 역할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언어에 담긴 위계를 직시하고 그 의미를 비틀어야 한다. 어른/아이의 이분법으로 누군가를 훈육하려는 오만, 평화를 가장한 무지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 P62

내가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쓰는 건 아니다. 그저 나에게 화두인 이슈를 포장하지 않고 표현하는 거다. 나누고 싶어서, 나눠야 살 것 같아서. 그저 내 소매 끝에 매달린 먼지를 떼듯,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뿐이다. 그럼 다른 누군가 입을 뗀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또 다른 이야기를 부른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꺼내지 않은 말 속에 숨어 있던 뱉고싶은 말을 배운다. 꼭 직면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누군가 꺼낸 말들 사이에서 내가 꺼내지 않은 말들을 돌아본다. 그렇게 함께 해방하는 감각을 배운다.
말만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롭긴 어렵지만, 꺼내지 않고 시작되는 자유는 없으니까. 내 해방이 당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당신의 해방이 내 해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배운다.
당신이 입을 떼는 그 순간에. - P74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말을 통해 타인을 언짢게 할 수도,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처럼 대화에도 퇴고의 기회가 있다. 진심으로, 너무 늦지 않게 사과하는 것. 그 일에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사과하면 불리해질 거라는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하기. 나는 사과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너무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나는 바란다. 말을 뱉기 전에 신중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보다 기꺼이 사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고를 쓴 뒤에 여러 번 퇴고하며 보다 무해한 글로 다듬듯, 말을 뱉은 뒤에도 퇴고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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