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도 라디오에서는 짧은 사연들이 지나갔다. 슬프지도 재밌지도 않은 사연들을 산과 나는 계속해서 들었다. 어느 순간에는 푸르른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는데 산을 쳐다봤을 때 산은 울고 있지 않았다. 산은 이제 울지 않고도 푸르른 냄새가 나는구나. 그 냄새를 맡고 있으니 수로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흐르는 물을 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은 기분. 산과 나는 이제 슬픈 마음 없이도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 -여름은 물빛처럼- - P101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카페는 여전히 좋았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덕에 마음 놓고 사람 구경을 할 수도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듣듯 카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사랑이나 적의, 죽음 충동 같은 사람의 감정들이. 내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에 빠지고 있었고, 누군가를 미워했으며, 때때로 죽고 싶어 했다. 그런 마음들은 어째서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이어지는 걸까. 그것을 생각하자 그만 아득해져 이미 죽었는데도 또 한번 죽고 싶었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 P244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령이 ‘나’의 원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기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너는 누구야?" 하는 ‘나’의 물음에 유령이 "나는 너야."(10쪽) 하고 답하고 있으니까. 작가는 유령을 통해 얼어붙은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여 준다. 매 순간 떠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선명하게 이름을 붙여 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일 말이다. -작품 해설, 황예인- - P266
내 마음을 먼저 살려낸 후에야 누군가의 마음 또한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육신이 죽었음에도 생생한 마음의 결을 보여 주던 이랑이 소멸을 앞두고 "이제 와서 뭘 해." 하며 줄곧 꿈꿔 오던 바를 포기하려 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256쪽)진다. ‘나‘는 이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그다음에야 ‘나‘에게 "모든 것이 그리워질 것만" 같은 마음이 되돌아온다. 제빛을 찾은 ‘나‘의 죽음은 지원서 대신 유서를 쓰던 시기의 삶보다 훨씬 행복하게 느껴진다. 너를 돕고 나서 나를 구하게 되는 이 순서, 그건 제힘, 나 자신이 나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하는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작품 해설, 황예인-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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